기억 에세이 - 1994년 4월
4월 초의 그날은 좀 시끄러웠다. 아빠의 상여가 아파트를 빠져나가는 데에 어떤 특별한 절차가 필요했는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단지 그걸 조용히 메고 나가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중간중간 죽은 이 또는 남은 이를 위한 언어가 큰 소리로 말해져야 하는 의식이 존재하는지 어떤지, 그 후로 단 한 번도 그런 과정을 지켜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기억 속에 남은 것은 어른들의 커다란 외침 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여기 죽은 사람이 영원히 자신의 집을 빠져나가고 있음을 알리는 비현실적인 목소리들이었다. 나는 우리의 불행이 필요 이상으로 크게 울려 퍼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빠의 영정사진 앞에서 문상객들을 맞이할 때, 엄마는 손님이 한 명씩 들어올 때마다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내며 울었었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엄마가 친척이나 친구의 얼굴을 보고 자연스럽게 내는 소리일 거라 생각했지만, 곧 그것도 의례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가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시작하면 나도 이내 마음이 불편하고 더욱 슬퍼지기 시작했으므로 내 눈에도 눈물이 맺히곤 했다. 손님이 없는 틈을 타 엄마는 내게 말했다. 사람이 오면 해야 하는 거라서 하는 거야. 힘드니까 너는 계속 울지 않아도 돼.
며칠 동안 나는 머리를 감지 못했다. 하루만 씻지 않아도 기름이 도는 열다섯 살이었음에도 죽은 사람의 딸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다. 다른 모든 평범한 사람들처럼 중학생 시절의 나는 예쁘지 않았다. 이 얼굴도 저 얼굴도 아닌 얼굴을 하고, 머리도 감지 못한 채 어울리지 않는 상복을 입고 있었다. 친척들은 내가 잠시 눈을 붙이려고 누워 있던 좁은 방에 둘러앉아 고스톱을 쳤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깔깔 웃었다. 그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힘들고, 또 잠을 잘 수 없다는 말을 엄마에게 했었던가.
나는 투명인간이 된 내가 낯설었다. 친척들이 고스톱을 치고 있는 그 방에서 나는 전혀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언제나 내 모습이 빛나고 있음을 의식하며 생활하던 나는, 그 시간부터 다만 아빠를 잃고 어안이 벙벙해진 채 숨 쉬는 내내 상처만 입는 사춘기 아이로 변해갔다. 고스톱판 앞에서 방이 떠나가라 웃어젖히던, 나와 정확히 어떤 관계에 있는지도 알 수 없던 먼 친척의 목소리를 견디면서 나는 나를 밝히고 있던 어떤 불빛이 완전히 꺼져버렸음을 느꼈다.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으리란 것을, 사람들이 나를 동정의 눈길로 바라보며 수군거릴 거라는 것을 알았다.
상여가 나가던 날은 완벽하게 눈부신 봄날이었다. 일주일의 장례 기간이 끝나면 나는 다시 등교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