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23일, 독일 바이에른의 잉골슈타트에서는 맥주순수령 제정 5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은 이 자리에 참석해 500년이 지나도록 계승되어온 이 법령을 칭송했다. 맥주를 제조할 때 물과 홉, 보리 세 가지 재료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맥주순수령은 이제는 너무 유명해 더할 말이 없다. 맥주순수령은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인 1516년 4월 23일, 바로 이 지역 잉골슈타트에서 바이에른의 공작 빌헬름 4세에 의해 공포되었다. 이 맥주순수령은 원래 1487년 11월 30일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트 4세가 제정하여 뮌헨에서 시행되었지만 그때는 바이에른이 여러 제후국들로 쪼개져 있던 시기였다. 1505년이 되어 바이에른이 통일되자, 선제후국의 강력한 힘으로 바이에른 전역에 적용시킨 것이다. 이 법령의 제정에는 순수하지 못한 의도도 있었지만 어찌됐든 독일이 순수한 맥주를 만드는 데에는 크게 기여했다.
독일, 우리가 독일이라 부르는 이 나라의 원래 명칭은 독일 연방공화국이다. 이 말은 미국이나 러시아처럼 여러 개의 주와 이것이 합쳐진 중앙 정부가 있는 정치 형태를 가진 국가라는 뜻이다. 독일의 행정 구역은 현재 바이에른 주와 브란데베르크 주 등 16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크고 작은 왕국 혹은 도시들이 처음으로 통합된 건 1871년의 일로 고작 150년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인 독일의 통합에 맥주순수령이 한몫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프랑스의 작가 볼테르가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더더욱 제국도 아니다’라고 말한 신성로마제국의 중심 무대는 바로 현재의 독일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은 1806년 나폴레옹이 해체시킬 때까지 중세 독일을 형성하고 있었다. 중세 독일은 왕, 제후, 공작, 주교, 하급귀족 등이 지배하는 크고 작은 여러 개의 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맥주와 소시지만큼이나 다양한 국가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동맹하거나 서로 싸우기도 했다. 심지어 어제의 동맹 관계가 오늘은 적대 관계로 이어지기도 하고, 어제까지 피 터지게 싸우던 나라와 동맹을 맺는 등 서로의 이해관계 속에 매우 복잡다단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나마 신성로마제국이라는 타이틀 안으로 느슨하게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이유는 독일어를 사용하고 맥주를 물처럼 마시는 민족이라는 점이었다.
30년 전쟁, 1618년에서 1648년 사이 로마 가톨릭을 지지하는 국가들과 개신교를 지지하는 국가들이 대립한, 거의 모든 유럽이 참여한 이 전쟁이야말로 세계 대전 이전의 세계 대전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전쟁의 대부분이 독일 영토에서 치러졌다는 것이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독일 대부분의 영토가 황폐해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아와 페스트까지 터지면서 민간인을 포함한 사망자만 800만 명에 달했으며, 독일은 전체 인구의 1/3을 잃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독일은 314개의 크고 작은 국가들로 분열되어, 중앙 정치는 완전히 사라졌다. 독일의 양조장도 이 시기 많이 파괴되었다. 먹을 것도 없었던 이 시기 맥주를 만든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30년 전쟁이 끝나고 독일은 중세에서 근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 장차 독일을 통일시킬 프로이센이 점점 힘을 키우고 있었다. 프로이센은 한때 중개 무역으로 그럭저럭 먹고 살만 했던 힘없는 공국에 불과했고 영토도 폴란드와 러시아 사이로 지금의 독일에서 동쪽으로 한참 떨어져 있었다. 이런 프로이센이 독일에 편입된 건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프로이센의 왕은 대체로 ‘프리드리히’가 많다)가 후사 없이 죽자 프로이센의 영지를 사위인 브란데부르크 영주에게 물려주면서부터이다. 브란데부르크는 지금의 베를린을 포함한 지역으로 북부 독일의 요지이며 신성로마제국의 변경백이었다. 브란데부르크는 프로이센과의 사이를 지리적으로 막고 있던 스웨덴의 포메라니아를 차지한 끝에 통합에 성공했고, 프로이센은 독일 북부와 폴란드 북부, 러시아 서부를 잇는 거대한 영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군사 강국으로 성장한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그 뒤를 잇는 7년 전쟁을 치른다. 이때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엎치락뒤치락 팽팽한 대결을 벌였다. 오랜 전쟁의 결과는 결국 평화 협상으로 전쟁 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얻은 것이 없었지만 프로이센은 무력으로 점령했던 슐레지엔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이것은 장차 프로이센이 유럽에서 무시할 수 없는 강국이 될 것이라는 전조였다. 19세기 초반 신성로마제국은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하고 있었다. 1807년 프로이센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쾨니히스베르크(현재 러시아의 칼라닌그란드)까지 밀려나 있었다. 프로이센은 전쟁의 패배로 엄청난 배상금과 영토의 반을 내주는 굴욕적인 평화 협상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이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이었던 프로이센을 비롯하여 바이에른, 작센, 하노버, 뷔르뎀베르크를 하나의 독립적인 왕국으로 만들어 버리면서 이로서 신성로마제국은 사실상 붕괴되었고 오스트리아 제국과 5개의 왕국, 7개의 대공국, 공국, 선제후국, 후국, 방백국, 자유시 등이 느슨하게 결합된 독일 연방이 되었다.
독일의 분열은 경제적으로도 큰 걸림돌이 되었다. 예를 들어 당시 각 독일 연방에서 사용한 화폐의 종류가 6,000가지가 넘었다고 한다. 만약 프로이센에서 스위스에 맥주 한 박스를 보낸다고 한다면 막대한 관세를 물고 서류 심사와 환전을 열 차례 정도 했어야 했다. 운반 가격보다 관세가 더 많이 드는 구조였다. 독일인들은 이런 상태라면 독일을 통일할 수 없다고 직시하고 독일 연방 간의 관세 동맹을 제안하였는데, 이에 가장 앞장선 국가가 프로이센이다.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1818년부터 관세 동맹을 시작하여 바이에른, 뷔르뎀베르크 등이 참여했고 1834년에 완전한 독일 관세 동맹을 이루어 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사실상 동맹의 역할은 사라졌지만 프로이센의 강력한 지도자 비스마르크는 다른 방법으로 독일 통일을 이루어 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을 통일하는 것은 의회 정치가 아니고 철과 피라고 여겨,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다. 비스마르크는 서두르지 않았고 동맹과 전쟁을 통해 차근차근 독일 통일을 진행했다. 러시아와는 동맹 관계를 맺었고 프랑스에는 벨기에와 룩셈브르크까지 내주면서 중립을 유도했다. 1866년에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북독일 연방을 만들어 냈고, 1871년에 독일 통일의 마지막 걸림돌인 프랑스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마침내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심장부인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의 통일을 선포했다.
그런데, 바이에른 왕국이 새로 형성된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바이에른은 과거 30년 전쟁에서 가톨릭 연맹 편에 서서 싸웠을 정도로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였으니, 개신교가 중심인 프로이센 왕국의 통치를 받는 것이 탐탁치 않았을 것이다. 바이에른도 오스트리아처럼 독립 국가로 남고 싶다는 민족주의자들이 반동하고 있었다. 이때 바이에른은 독일 제국에 가입하는 조건으로 전 독일에서 맥주순수령을 따라 맥주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물론 이 제안은 양조장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우리가 말하는 ‘순수한’ 독일 맥주는 바이에른의 것이지, 북독일의 맥주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이에른을 제외한 다른 독일에서는 여전히 맥주에 여러 가지 향신료와 로컬 특산품, 과일 등을 사용하면서 베를린의 베를리너 바이쎄, 라이프치히의 고제, 쾰른의 쾰쉬, 한자동맹 자유도시의 홉 라거 등 지역마다 다른 스타일의 맥주가 있었다. 아무튼 이런 극심한 반대가 있었지만 어찌저찌 바이에른의 맥주순수령은 채택되었고 독일은 하나의 국가로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맥주순수령은 이후 유럽 사법 재판소에서 폐지할 것을 권고한 적도 있지만, 어찌되었든 독일에서 이 법은 대체로 준수되었다. 맥주순수령이 다시금 이슈가 된 것은 독일이 2차 세계 대전 이후 서독과 동독으로 분열되었다가 1990년 재통일을 이룬 다음이다. 당시 동독의 브란데베르크에 있는 한 수도원 양조장에서 ‘검은 수도원장’이라 하는 흑맥주를 양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맥주는 발효 중에 소량의 설탕을 사용했다. 벨기에와 같은 다른 수도원 양조장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브란데베르크 농림부는 이것이 독일의 맥주법에 위배된다고 제품 로고에 맥주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에 격분한 양조장은 맥주를 맥주로 부를 수 없을 바에야 맥주세를 내지 않겠다고 반박했다. 이 사건은 10년 간의 법정 공방으로 이어져 이 흑맥주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법정 공방의 결과는 물론 맥주를 다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현대 독일의 맥주법이 1516년의 맥주순수령과 같지는 않지만 대체로 그 정신은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독일도 세계 맥주 트렌드를 거스를 순 없다. 맥주순수령의 엄격함은 하면발효 맥주에 한해서 지켜지고 있는 편이고 상면발효 맥주에 대해선 더 유연한 정책을 쓰고 있다. 그리고 독일에서도 미국식 크래프트 맥주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이제는 맥주순수령을 지키지 않는다고 거꾸로 매달아 맥주통에 처박아 놓지 않는다. 대신 맥주순수령은 훌륭한 마케팅 도구가 되어가고 있다. 바로 라인하이츠게봇이라는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