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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좋은 ㅎㅏ루 Aug 25. 2019

부르고뉴의 마지막 상속녀, 두체스 드 부르고뉴




어릴 적 즐겨 보았던 만화영화 ‘플란더스의 개’의 배경은 풍차가 도는 전형적인 네덜란드였다. 맥주를 알기 전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멕주를 조금 배우고 나면 벨기에가 맥주의 역사에 있어서, 특히 맥주의 다양성에 있어서 얼마나 많이 기여했는 지를 알게 되며, 벨기에 중에서도 플란더스 지방의 맥주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플란더스가 네덜란드가 아니라 벨기에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벨기에는 플란더스라는 북부 지역과 왈룽이라는 남부 지역의 두 개의 문화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왈룽은 주민의 40%가 프랑스에 합병하는 것을 찬성할 정도로 프랑스어권에 가깝다. 반면 플랜더스는 역사적으로 벨기에와 네덜란드, 프랑스의 역사가 공존했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 곳 플란더스 서쪽에는 벨기에 맥주 중에서도 아주 유명한 맥주 스타일이 있다. 이곳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스타일, 이곳이 아니면 그 이름도 붙일 수 없으니 바로 ‘플란더스 레드 에일’이라는 스타일이다.


1970년대 플랜더스의 빨간 맥주에 처음으로 ‘플란더스 레드 에일’이라고 이름을 붙인 마이클 잭슨(10년 전에 죽은 팝의 황제가 아니다. 맥주의 황제이다)에 의하면, ‘세계 어느 양조장에서도 필적할 만 만한 것이 없고, 양조 시설 자체가 고고학적인 사찰’이라고 하며 이 스타일을 매우 독창적이면서 전통적인 것으로 인정했다.


There is nothing comparable in any brewery elsewhere in the world, and the whole establishment is a temple of industrial archaeology.


플란더스 레드 에일을 상업적으로 처음 판매한 곳은 1821년의 로덴바흐Rodenbach 브루어리로 가장 유명한 플란더스 레드 에일이지만 한국에서는 구입하기가 쉽지 않다. 한국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두체스 드 부르고뉴Duchesse de Bourgogne로, 최근 홈플러스에서 8,900원에 구입한 적이 있다. 대체 이 맥주가 어떤 맥주길래 혓바닥이 이리 길었을까? 예전에 적은 간단한 테이스팅 노트를 옮겨 본다. 거듭 말하지만 난 혓바닥은 길어도 혓바닥의 감각은 뛰어난 편은 아니다. 어떤 맥주인지 대략적인 힌트만 얻었으면 좋겠다.


맥주명 : 두체스 드 부르고뉴

ABV : 6.2%

외관 : 짙은 밤색에 투명하게 붉은 기운이 있으나 아주 붉거나 검은 느낌은 아님

거품 : 거의 없는 수준

아로마 : 식초나 홍초 같은 시큼한 향

플레이버 : 퀴퀴한 지푸라기 같은 맛으로 시작해서 시큼한 포도의 끝 맛이 느껴짐. 체리 같은 과일 향도. 끝 맛만 보면 드라이한 레드 와인 같음. 스파클링 와인인데 레드 와인 같은 느낌

마우스 필 : 가볍거나 중간 정도


이 맥주를 마신 안훼님은 이렇게 총평했다.


맛있긴 한데 차라리 와인을 마시는 것이 좋겠어



두체스 드 부르고뉴는 벨기에 플란더스 지방의 서쪽에 위치한 베르헤게 브루어리 Brouwerij VERHAEGHE (1875년 설립)에서 생산하는 플란더스 레드 에일이다. 이 맥주는 발효를 두 번한 이후 18개월 동안 오크통에 숙성하여 만든다. 최종 상품은 8개월 된 미숙성 맥주와 18개월 장기 숙성한 맥주를 섞어 만드는데, 이렇게 블렌딩 하는 이유는 오크통의 상주균에 의해 만들어진 시큼함과 산도의 밸런스를 잡기 위해서이다. 숙성기간과 블렌딩 방법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플란더스 레드 에일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두체스 드 부르고뉴 병에는 오른손 위에 새를 얹고 다른 손으로는 옷깃을 잡은 채 우수에 잠겨 있는 여인이 그려져 있다. 오늘은 이 여인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부르고뉴의 마지막 상속녀


이 인물은 부르고뉴 공국의 마지막 상속녀인 마리Mary이다. 맥주의 이름인 두체스 드 부르고뉴는 부르고뉴의 공작부인이라는 뜻으로 곧 마리를 의미한다. 맥주를 이야기하다 웬 역사 이야기이지 하겠지만, 부르고뉴의 역사를 이해하면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고, 플랑드르의 역사를 이해하면 이들이 만든 맥주도 이해할 수 있어서다. 그러고 나면 왜 이 맥주에 이런 이름을 붙였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부르고뉴는 공국으로 프랑스 신하의 신분인 공작이 다스리는 지역이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생각하면 프랑스라는 국가와 그 안에 있는 자치령 정도로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부르고뉴는 당시 프랑스, 잉글랜드와 동등한 국가의 입장이었으면, 프랑스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기도 하였다. 부르고뉴가 그대로 하나의 국가가 되었다면 지금의 유럽은 달라져 있을지 모른다.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의 왕인 장 2세에 대한 효심이 깊었던 아들 대담공 필리프 2세로부터 출발하였다. 필리프 2세는 아버지와 전투에 동행하면서 크고 작은 전쟁을 치렀다. 전쟁 중에 잉글랜드에 포위되어 부자가 함께 런던탑에 갇히기도 하였다. 이런 효심 깊은 아들은 불행히도 첫 째가 아니었고, 대권 상속의 제일 마지막 순위인 넷째 막내였다. 국왕은 목숨 걸고 자신과 함께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진 못했지만 대신 부르고뉴 지역을 선사하고 부르고뉴 공작에 봉했다. 이후 필리프 2세는 플랑드르의 마르그리트와 정략결혼을 하여 부르고뉴의 영토를 플랑드르까지 확장했다. 프랑스어로 플랑드르가 다른 말로 플란더스이다.


부르고뉴는 대담공 필리프 2세부터 담대공 샤를 1세까지 약 100년간 프랑스와 끊임없이 싸우면서 한편으론 잉글랜드와 동맹 관계를 맺는 등 강력한 힘을 행사했다. 아버지 장 2세가 아들 필리프 2세에게 이 지역을 선사했을 때 이것으로 인해 같은 가문이 싸우게 될 줄을 몰랐을 것이다. 부르고뉴와 프랑스의 싸움은 부르고뉴의 담대공 샤를이 죽으면서 끝났다. 샤를은 로렌 지방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다가 스위스의 강력한 용병에 의해 비참하게 죽었다. 그런데 샤를에게는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부르고뉴의 많은 영토를 그의 유일한 딸인 마리가 상속했다. 맥주의 레이블에 그려져 있는 초상의 주인공 말이다.


마리가 부르고뉴의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았을 때의 나이는 19세였다. 결혼 적령기가 다 된 이 상속녀가 누구랑 결혼하느냐에 따라 부르고뉴의 땅이 누구에게 갈 것인가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후보자로는 프랑스 왕 루이 11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가 있었다. 당시 부르고뉴는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사이에 있었다. 프랑스 루이 11세는 선수를 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여 부르고뉴를 공격하였지만 실패했다. 부르고뉴를 무력으로 빼앗겠다는 루이 11세의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자연스럽게 부르고뉴는 신성로마제국에 돌아갔다. 마리는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막시밀리안과 결혼하였다. 마리와 막시밀리안 사이에는 필리프라는 아들이 태어났는데(유럽 왕실의 이름 돌려쓰기 지긋지긋하다. 이 필리프는 앞서 언급한 대담공 필리프와 구분하여 미남공 필리프라 불렸다), 필리프는 카스티야(지금의 에스파냐) 공주 후안나와 결혼하여 그 유명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를 낳았다. 카를 5세는 태어날 때부터 신상로마제국의 영토와 합스부르크  영토, 부르고뉴 영토, 에스파냐 영토까지 손에 쥔 그야말로 금손의 아들이었다.


부르고뉴의 마지막 상속녀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할머니였던 부르고뉴의 공작부인 마리는 1457년에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승마를 좋아했던 그녀는 1482년 성 근처의 숲에서 막시밀리안과 말을 타다 낙마하여 죽었다.


부르고뉴 하면 바로 와인이 떠오른다. 두체스 드 부르고뉴는 와인과 같은 풍미를 가진 맥주이다. 맥주의 스타일은 와인의 빨간색을 연상시키는 플랜더스 레드 에일이다. 부르고뉴, 와인 그리고 부르고뉴의 마지막 상속자 이 모든 것을 두체스 드 부르고뉴가 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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