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라고 불린 벨기에 골든 스트롱 에일, 듀벨의 역사
악마라고 불리는 맥주가 있다. 아니다. '~라고 불린다'는 의미에는 원래의 이름이 있다는 뉘앙스가 있으니까, 이 맥주는 그냥 악마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맥주 이름이 곧 '악마'이기 때문이다. 맥주 분류 상 벨지안 골든 스트롱 에일에 분류되는 이 맥주는 적당히 쌉쌀한 맛과 절제된 플레이버, 독특한 홉의 캐릭터를 가진 맥주이다. 필스너 맥주의 인기에 대항하기 위해 나왔다는데 역시나 편하게 마실 수 있어 악마의 맛이라기 보단 천사의 맛에 가깝다. 악마의 탈을 쓴 천사 듀벨, 이것은 에일의 반격이다.
듀벨
앞서 듀벨은 적당히 쌉싸름하고 절제된 향과 아로마, 독특한 홉의 캐릭터를 가진 맥주라고 설명하였다. 이 모든 것은 듀벨만의 독특한 맥주 제조 과정에서 나온다. 이 양조 과정은 대략 90일이 소요된다. 물을 제외하고 맥주의 가장 중요한 재료는 보리인데 보리의 발아에만 5일이 걸린다. 사용되는 몰트는 필스너에 주로 사용되고 페일 몰트 중 하나인 필스너 몰트와 거품 유지력이 강하고 바디감이 두터운 카라필스 Carapils 몰트이다. 홉은 기본적으로 슬로베니아의 스티리안 골딩 Styrian Golding 홉과 체코의 사츠 Sazz 홉 두 가지를 사용한다. 듀벨은 20°C에서 26°C 사이의 탱크에서 1차적으로 발효한다. 이때 사용되는 효모는 듀벨의 주인인 무어가트가 1920년대 더 좋은 재료를 찾기 위해 영국에 건너 가 스코틀랜드에서 가져온 변종 효모이다. 이후 -2°C로 냉각한 저장 탱크에서 숙성시킨 후 병에 넣는다. 병에 넣을 때는 설탕과 효모를 추가해 병 안에서 또 한 번 발효시킨다. 이 병들은 24°C의 따뜻한 지하실로 2주간 옮겨지고, 그러고 나서 차가운 지하실로 옮겨 6주간 숙성시킨다. 병에서의 추가 발효로 맥주의 도수를 높이고 긴 숙성 기간 때문에 원숙하고 안정된 맛을 낸다.
듀벨 무어가트 브루워리
듀벨은 벨기에의 듀벨 무어가트 브루워리 Duvel Moortgat Brewery에서 만든다. 듀벨 양조장은 1871년 얀-레오나르트 무어가트 Jan-Leonard Moortgat와 그의 와이프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양조장이다. 당시에는 벨기에에만 3,000개의 양조장이 있었는데 살아남기도 쉽지 않았다. 무어가트는 수 차례 시험과 실패를 겪으면서 영국식 상면 발효 에일을 만들어 그 지역에서 소박하게 인기를 끌었다. 주로 브뤼셀의 중산층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지역의 작은 양조장에 불과했다. 양조장이 본격적으로 호황을 맞은 것은 그의 두 아들이 양조장을 물려받은 이후부터이다. 창업자 무어가트에게는 알베르트 Albert와 빅토르 Victor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알베르트는 맥주 양조를 책임지고 빅토르는 맥주 판매를 책임지면서 형제간의 갈등 없이 양조장을 안정적으로 운영하였다.
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00년 대 초, 두 형제는 영국인의 입맛에 맞는 영국식 에일을 만들면서 대중적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만족할 수는 없었나 보다. 그들은 영국 맥주 모델을 기반으로 하지만 완전히 새롭고 특별한 맥주를 만들고 싶었다. 두 형제는 새로운 레시피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좋은 재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영감을 얻기 위해 영국으로 맥주 여행을 떠났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다소 변형된 에일 효모를 구해와 체코의 사츠 Sazz 홉과 슬로베니아의 스티리안 골딩 Styrian Golding 홉을 섞어 맥주를 만들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새롭게 완성된 이 맥주에 빅토리 에일 Victory Ale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아마도 전쟁의 승리와 맥주의 완성을 자축하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빅토르 에일은 어쩌다가 악마가 되었을까? 일설에 의하면 두 형제의 친구이면서 지역의 저명인사인 구두수선공 친구가 빅토르 에일을 마시고 지역 방언으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건 진짜 악마ㄴ데 This is a real Duvel(Devil)'. 이때부터 맥주의 이름은 '악마'를 뜻하는 듀벨이 되었다. 네덜란드어로 Duvel의 발음은 듀벨보다는 두블에 가깝다. 트라피스트 맥주에서 두 배를 의미하는 듀벨 Dubbel과는 다른 뜻이다. 듀벨의 도수는 8.5%이다. 평소 4~5%의 평범한 맥주를 마셨을 사람들이 이 맥주를 마시고 비약적으로 악마를 연상했을 법도 하다.
듀벨은 원래 다크 맥아를 사용하여 어두운 색깔을 지녔다가 1970년대 페일 라거에 대항하기 위해 레시피를 바꿨다. 이때부터 페일 맥아를 사용하여 지금과 같은 황금색의 블론드 에일이 되었다. 이후 듀벨은 이러한 스타일의 고전이 되어 세계 여러 브루워리에 영향을 주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벨기에의 델리리움 트레멘스 Delirium Tremens, 뉴질랜드의 투아타라 Tuatara, 네덜란드의 요펜 Jopen, 일본의 베어드 비어 Barid Beer 등이다. 이 모든 것이 훌륭한 벨기에 스타일의 블론드 에일이다. 공통점이 있다면 이들 맥주의 전용잔이 모두 튤립 모양의 잔이라는 것이다.
튤립 모양의 맥주잔은 1960년대 후반부터 듀벨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 때는 무어가트 집안의 3세대 후손이 경영하던 시대였다. 그들은 개성 넘치는 맥주에는 개성 넘치는 잔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와인 잔을 연상시키는 이 혁신적인 튤립 잔에는 330ml의 맥주 한 병을 모두 채울 수 있다. 잔의 둥글고 넓은 윗부분은 맥주의 플레이버와 아로마를 충분히 경험할 수 있도록 된 것이고, 그 아래 좁게 내려가는 부분은 헤드 부분에 거품을 채워 탄산이 오래도록 남아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듀벨 무어가트 브루워리는 2000년 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4세대 후손들이 경영하고 있다. 1923년에 겨우 몇 개의 나무 상자 분량 정도만 생산했던 듀벨은 현재 전 세계 60개국 이상의 나라에 듀벨을 수출하는 양조장이 되었다. 2015년 기록에 의하면, 연간 140만 헥토리터를 생산하고 있다.
듀벨 트리펠 홉 Duvel Tripel Hop
듀벨 무어가트 브루워리는 많은 종류의 맥주를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실질적으로 듀벨이라는 딱 한 종류의 맥주만 생산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듀벨을 약간 변형시킨 듀벨 트리펠 홉 Duvel Tripel Hop도 있으니 맞는 말도 아니다. 듀벨 트리펠 홉은 주 발효 과정 후에 라거링(저장 숙성) 과정에서 홉을 추가로 넣는다. 이 과정을 드라이 호핑이라고 한다. 이때 사용하는 홉은 미국 워싱턴 주의 야키마 Yakima 계곡에서 재배한 홉으로 자몽과 열대 과일의 신선한 맛을 낸다. 듀벨은 아메라카 페일 에일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미국의 홉은 다시 벨기에 페일 에일에 영향을 준 셈이다. 개인적으로 아메리카 페일 에일 중에서 시에라 네바다 페일 에일 Sierra Nevada Pale Ale을 좋아하는데 이것과 비슷한 스타일이다. 앞서 듀벨은 2가지 홉을 기본적으로 사용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에 한 가지 홉을 더 넣어 만든 것이 듀벨 트리펠 홉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매년 리미티드 에디션을 발매하여 세 번째 홉을 다르게 넣는다. 그러므로 매년 듀벨을 마셔야 하는 이유가 있다(그렇지 않아도 매년 마시겠지만). 듀벨 트리펠 홉은 알코올 도수가 무려 9.5%이다. Duvel은 두 배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Tripel은 세 배라는 중의적 의미도 있는 것 같다. 즉 트리펠은 세 번째 홉을 넣었다는 것과 세 배 정도 강한 맥주라는 중의적 의미일 것이다.
듀벨 트리펠 홉 리미티드 에디션과 세 번째 홉
Duvel Tripel Hop 2007 - 2011 : Amarillo
Duvel Tripel Hop 2012 : Citra
Duvel Tripel Hop 2013 : Sorachi Ace
Duvel Tripel Hop 2014 : Mosaic
Duvel Triple Hop 2015 : Equinox
Duvel Triple Hop 2016 : HBC-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