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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이 사라진 회사조직도, 괜찮아?

<현명한 개입은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 를 읽고

by 엠마
Epilogue

집 안이 모두 잠든 깊은 밤, 거실의 마지막 온기마저 식어갈 때쯤 나는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어둠 속에서 작은 화면만이 희미한 빛으로 내 얼굴을 비췄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나는 회사 조직도를 검색해 들어갔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름과 직책들이 작은 사각형 안에서 서로 연결되고 뻗어 나가며, 마치 내가 잃어버린 세계의 지도가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했다. 스크롤을 내릴수록 익숙했던 자리들이 차갑게 반짝였고, 그 안 어디쯤에 있었던 나의 이름이 희미한 잔상처럼 떠올랐다.


“나는 다시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나를 위한 자리는 아직 남아 있을까?”

나는 장장 4년이나 휴직중이다. 어둠 속에서 그 질문은 천천히 부풀어올랐다. 손끝으로 화면을 스치며 나는 오래전부터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다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밤이 깊어갈수록 불안은 더 선명해졌다. 나는 익숙하지만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그 미로 속에서 오래 헤매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 흔들림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감정이 아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아이들은 새로운 학교와 계절에 자연스럽게 적응해 가고 있었지만, 정작 나는 여러 갈래의 길 앞에서 잠시 멈춘 사람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안고 지냈다. 지난주에 뜻밖의 돈이라는 작은 사건이 나의 내면을 깊이 흔들어 놓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그 흔들림의 정체를 들여다보았다. 자본주의 구조가 ‘일하는 사람’과 ‘일하지 않는 사람’을 나누는 방식, 돌봄 노동이 어떻게 여성의 정체성을 흔들어왔는지, ‘엄마’라는 이름이 어떻게 개인의 욕망과 충돌하는지를 마주하며 나는 오랫동안 쌓여온 심리의 지층들을 조심스럽게 걷어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나는 그 흔들림의 근원이 단순히 ‘휴직 중인 상태’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하강 소용돌이의 중심을 천천히 돌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책 『현명한 개입은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가 내 마음을 정확히 겨냥해 들어왔다. 저자는 우리가 어떤 해석의 틀에 사로잡히면 감정과 행동이 그 방향으로 흘러들어 가며 삶 전체가 소용돌이처럼 움직인다고 말한다. 그중 하강 소용돌이는 작은 의심이나 불편이 부정적 해석을 강화하고, 그 해석이 다시 감정적 반응으로 이어져 결국 삶 전체를 잠식하는 과정이다.


흰곰 실험과 ‘정신적 두려움의 대상’
“오래전 연구자들은 사람들에게 ‘흰곰을 생각하지 말라’라고 지시하면 오히려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그 대상은 더 강하게 떠오르고, 특히 그 대상이 스스로의 정체성과 관계된 두려움일 경우 더욱 강력해진다. ‘내가 나쁜 사람처럼 보일까?’라는 질문 하나가 떠오르면, 이 질문은 우리의 머릿속을 점령하며 결국 삶까지 잠식하려 든다. 질문은 부정하려 할수록 더 강하게 달라붙고, 부정적 결론은 빠르게 자기충족적이 된다.”
- 제 1장 하강 소용돌이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두려움의 대상일 경우, 그 질문은 더욱 집요하게 머릿속을 점령하고 결국 삶까지 잠식한다”는 책의 문장은, 조직도를 바라보며 ‘나의 자리’를 찾아 헤매는 내 마음의 움직임을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반대로 상승 소용돌이는 아주 작은 긍정적 경험이나 관점의 전환이 감정과 행동을 끌어올리며 삶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는 흐름이다. 누군가의 극복 이야기, 작은 조언, 혹은 새로운 해석의 한 문장이 사고방식을 새롭게 하고, 그 변화가 행동에까지 스며들어 결국 삶의 궤도를 바꾼다는 것이다.


이 두 개념을 읽고 난 뒤, 나는 비로소 내 불안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왜 나는 조직도의 작은 네모 칸 앞에서 숨이 막혔는지, 왜 누군가의 말 몇 마디가 오래도록 나를 무너뜨렸는지, 왜 나는 어떤 순간 앞에서 유난히 쉽게 움츠러드는지를 생각해보니, 모든 흔들림의 기원은 ‘지금의 나’가 아니라 ‘그동안의 나’ 속에 있었다. 나는 책을 읽으며 내 과거 회사에서 있었던 경험들이 어떤 부정적 트리거들을 만들어왔는지 되짚어 보았다.


관계에서의 하강 소용돌이 — ‘부정적 감정의 상호 반응’
“직장이나 가정에서 사소하게 시작된 불편함은 부정적인 해석이 덧입혀지며 점점 깊어질 수 있다. 누군가의 말에 서운함을 느끼고, 그 감정이 퉁명스러운 반응으로 이어지고, 다시 상대의 분노를 불러오면서 관계는 하강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간다. 우리가 불안할 때 이런 부정적 순환은 더욱 강해진다.”
- 제6장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돌아보면 이러한 흔들림은 복직과 휴직, 부서 이동과 적응이라는 반복의 시간 속에서 천천히 자라온 것이었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 나는 지방에서 일하는 남편을 따라 부서를 옮겼다. 그 소도시에서 아이를 낳고 첫 육아휴직 후 복귀했을 때, 나는 두 아이의 엄마라는 꼬리표를 떼어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며 숨 가쁘게 달렸다. 새벽마다 여러 번 깨는 아이를 돌본 다음 날, 피곤에 절어진 채 회의실에 들어가면, “그래도 둘 키우면서 열심히 하네”라는 말은 위로라기보다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이다’라는 감각은 내가 증명해야 하는 것을 더 늘려 놓았고, 그래서 나는 성과로 존재를 입증해야 한다고 믿으며 스스로를 끝없이 몰아붙였다.


그러나 나를 몰아붙이며 과도하게 성과에 집착할 수록 동료들과의 거리는 조금씩 멀어졌다. 결국 나를 챙기던 선배마저 등을 돌렸을 때 나는 관계와 마음이 동시에 무너져 내리는 깊은 추락감을 경험했다. 나는 그 모든 파열의 원인을 스스로의 부족함에서만 찾으며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것이 바로 하강 소용돌이의 방식이었다. 타인의 말이 아니라 내 해석이 나를 더 깊이 끌어내리는 구조이다.


서울로 복귀한 뒤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보다 어린 선배에게 업무를 배우는 과정은 예기치 않게 나의 불안을 자극했다. 나를 더 힘들 게 한 것은 주변에서 나를 불쌍하게 보는 시선이었다. “요즘 안쓰럽더라”라는 말은 위로라기보다 나를 이미 뒤처진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퇴근길 지하철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은 늘 단단히 굳어 있었고, 나는 그 표정을 통해 스스로에게 또 다른 낙인을 찍고 있었다.


다시 부서를 옮긴 후에는 겉보기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오히려 그 잔잔함 속에서 더 깊은 공허함이 자라났다. 하루하루가 이미 그려진 도면을 따라 움직이는 듯한 느낌, 내가 만든 색이 아닌 조직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방향성을 잃어가는 감각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졌다. “회사라는 거대한 배의 뱃고동을 위해 다시 내 시간과 에너지를 태우는 것이 맞을까?” 이 질문은 경력의 선택을 넘어,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나라는 사람의 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자리로 나를 데려갔다.


이 모든 과정을 지나 다시 회사를 떠나있는 지금, 나는 과거의 잔상들이 만든 부정적인 소용돌이에 갇혀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건 아닐까?


‘현명한 피드백’의 힘
“과제에 대한 비판적 피드백도 ‘나는 당신이 높은 기준에 도달할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 피드백을 주는 것입니다’라는 단 17개의 단어가 덧붙여졌을 때 전혀 다른 효과를 보였다. 학생들은 피드백의 의도를 신뢰하며 더 적극적으로 수정했고, 이는 성과뿐 아니라 장기적 진로 선택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 제7장 당신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그리고 그때, 책에서 말하는 ‘현명한 개입’의 뜻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강 소용돌이를 빠져나오는 길은 거대한 결심이 아니라, 내 경험을 다시 해석할 수 있도록 열어주는 아주 작은 틈, 단 한 문장의 전환에서 시작된다는 것. 나 또한 그 작은 틈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나의 불안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왜 어떤 말 앞에서 흔들렸는지 이해하게 되자 그 질문들은 더 이상 나를 끌어내리는 무게가 아니었다.


이제 나는 앞으로 펼쳐진 두 갈래의 길을 바라본다. 책을 읽으면서 복직이든 새로운 도전이든, 어떤 선택도 다시 나를 하강 소용돌이로 끌고 가게 두지 않겠다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책은 말한다. 우리가 어떤 길에서 다시 힘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대한 결심이나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해석의 작은 전환, 즉 “현명한 개입”이라고. 아주 작은 문장이 우리의 마음을 다시 움직이게 하고, 그 작은 움직임이 새로운 상승 흐름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 관점을 나의 복귀 시나리오에 대입해보면, 복직은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프레임으로 돌아가는 일이 된다. 책에서는 이를 “성장형 피드백”이라고 부른다. 사람에게 변화를 일으키는 피드백은 비난이나 지적이 아니라, “당신은 이 과정을 감당할 능력이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두는 말이라고 한다. 이런 피드백은 누군가가 외부에서 건네줄 수도 있지만, 내가 나 자신에게 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복직을 선택한다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려 한다. “이 낯섦과 부담은 너의 부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경험을 넓히라는 신호다.”


그 순간, 소속감도 다시 ‘증명해야 하는 것’에서 ‘서서히 쌓아가는 것’으로 바뀐다. 작은 협력, 작은 친절, 작은 신뢰의 경험들이 관계를 재건할 것이고, 그 속에서 나는 다시 회사라는 구조를 ‘소모의 공간’이 아닌 ‘미래를 위한 자산을 축적하는 곳’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반대로 새로운 일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의 ‘현명한 개입’을 품은 길이 된다. 나는 그 길에서 더 이상 완벽을 기준으로 나를 재단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나는 ‘아직 배우는 중’이라는 정체성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작은 실행들이 서로 연결되어 상승 소용돌이를 만드는 과정을 경험하고 싶다. 이 선택은 나의 욕망과 가치에 직접 닿아 있고, 그 흐름의 주도권이 내 손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성장이다.


내가 스스로에게 던진 단 하나의 질문 “왜 나는 어떤 말에서 그렇게 쉽게 흔들렸을까?”가 바로 그 작은 틈이 되었고, 그 틈으로 빛이 들어오자 그동안 나를 짓누르던 질문들이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 질문들은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흔들림 속에서 너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너는 이미 알고 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아주 작지만 분명한 방향이 생겼다. 과거의 나는 흔들림을 약함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나는 그 흔들림 속에서 상승 소용돌이로 이어질 작은 전환의 씨앗을 본다. 나의 경험을 다른 의미로 바라보는 일, 나에게 필요한 문장을 내가 스스로에게 건네는 일, 그리고 그 해석의 전환이 다음 선택을 조금 덜 후회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는 믿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용히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이름이 사라진 조직도, 괜찮니?”


그리고 어둠 속에서 아주 미약하게, 그러나 분명히,

이렇게 대답하는 내가 있다.


“괜찮다고 말해줄 사람을 기다리지 마.

괜찮도록 만드는 건 결국 너야.”


어쩌면 이것이 바로 나에게 찾아온 첫 번째 ‘현명한 개입’일지 모른다. 나는 이제 불안의 닻을 천천히 올리고, 주체적인 해석이라는 돛을 펴며 내가 향하고 싶은 항로로 몸을 돌린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상승 소용돌이의 첫 바람이 내게 닿고 있다.



현명한 개입은 언제나 듣는 것에서 시작된다! 내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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