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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논다’는 말의 그림자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을 읽고

by 엠마

지난주, 나는 근래 들어 가장 어두운 동굴에 있었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구와 크게 다툰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느 날, 통장에 갑자기 큰 금액이 들어왔다는 사실 하나가 나를 오래 흔들었다. 지난해 회사에서 지급되던 성과급이 휴직자인 나에게도 들어온 것이었다. 숫자 몇 개가 찍힌 화면을 보고 있는 동안, 나는 기쁨과 당혹, 안도와 우울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나는 그 돈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남편이 최근 들어 강조해 온 연금펀드에 일부를 넣고, 예전부터 해야지 하며 미루던 해외주식에도 조금 투자했다. 그러고도 남은 돈으로는 결국 둘째 영어 전집을 샀다. 가격이 너무 비싸 망설이다가, 공구 최저가를 놓쳐버린 뒤 며칠 후 더 높은 가격으로 결제 버튼을 누르면서, 마음 한편에서는 묘하게 안정이 찾아왔다.


정말 이상한 감정이었다. 그 안정감이 오히려 나를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돈은 이렇게 쉽게 나의 내면을 움직이는 존재였구나. 돈이 있으니 아이에게 책을 사줄 수 있고, 조금은 미래에 대한 준비도 할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공부나 하고 싶은 일들도 모두 어떤 ‘가능성’을 갖는다. 나는 지금 당장의 돈보다 가족과 삶의 균형을 위해 휴직을 연장했지만, 통장 속 숫자들과, 곧 다시 빠져나갈 지출들이 조용히 내 귀에 속삭였다.


“이게 정말 답이야?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돈의 흐름이 내 감정 전체를 흔드는 이 불편한 경험은 한 가지 사실을 또렷하게 보여주었다. 나는 지금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노동하지 않는 존재’로 분류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분류가 어떤 방식으로 나의 자존감과 선택과 감정을 흔들어 놓는지, 비로소 명료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내가 읽고 있던 책, 정아은의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과 이어졌다. 이 책은 나에게 단순한 위로를 준 것이 아니라, 내가 흔들리는 이유를 구조적으로, 사회학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인간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지금 내 마음의 파동은 우연이 아니라, 내가 속한 세계의 언어와 구조가 나를 흔들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1. ‘논다’라는 말의 독성이 어떻게 내 안에서 재생산되는가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떠오른 것은 어느 날 할머니가 나에게 했던 말이었다.

“집에서 놀아도 바쁘지? 그렇지?”

말투는 따뜻했고, 표정도 진심이었다. 그러나 ‘논다’라는 말은 나를 깊숙이 찌르고 지나갔다. 그 말속에는 ‘바쁘긴 해도 결국 노동은 아니다’라는 오래된 관념이 스며 있었다. 아이의 점심을 만들고, 장난감 더미를 치우고, 다시 엉망이 된 방을 정리하고, 빨래를 돌리고 널고 개는 이 무한 반복의 세계가 ‘노는 것’이라면, 도대체 어떤 노동이 노동일까.


더 놀라웠던 건 이 말이 시간이 지나도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 “요즘 어떻게 지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 백수가 제일 바쁘잖아.”

그 문장이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순간, 나는 내가 아닌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기분이 들었다. 스스로를 ‘백수’라고 낮추며 말하는 방식은 분명 내가 선택한 언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들었던 ‘논다’라는 말이 내 안에 잔류했다가 자조의 형태로 변형되어 나온 것이었다.


이 깨달음은 나를 놀라게 했다.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구조를 품은 힘이었다. 그 힘은 타인의 입에서 시작되지만 결국 내 입을 통해 다시 되살아나 나를 공격했다.


2. ‘게으름’이라는 단어의 오해


또 다른 장면은 어느 카페에서였다.
“누나 그냥 회사 다니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엄마가 동생이 한 말이라며 회사에 일찍 복직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 말은 내가 감히 설명할 수 없었던 현실을 단숨에 지워버렸다. 나는 회사에 다니고 싶다. 다시 사회와 연결되고 싶고, 경제적으로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아이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았고, 내가 일을 선택하면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신 감당해야 하는 구조가 너무 선명했다. 동생의 말은 그 복잡한 층위들을 모두 삭제하고, 나를 단숨에 ‘일하기 싫은 사람’으로 축소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질문하게 되었다. 왜 여성의 선택은 이렇게 쉽게 ‘성향’이나 ‘게으름’으로 축약되는가? 그 물음 뒤에는 자본주의가 여성의 돌봄 노동을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설계해 온 역사 전체가 숨어 있었다. 자본주의는 생산 영역, 임금이 지급되는 공장이나 회사를 중심으로 사회를 조직하며, 집 안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은 ‘비생산적’이라는 이름으로 구조적으로 삭제해 왔다. 산업혁명 이후 남성은 임금노동자로 공적 영역에 편입되었지만, 여성은 가사·양육·돌봄을 맡는 존재로 규정되었고, 이 노동은 ‘사랑’이나 ‘본능’, ‘희생’ 같은 말로 포장되며 자연스럽게 무급화되었다.


여성의 몸과 시간이 자본주의의 유지에 필수적이었다. 아이를 키우고, 노동자가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생활을 유지하는 그 모든 일들이 사회를 떠받치는 기반이었음에도 그 가치는 경제학의 장부에서 언제나 빠져 있었다. 더구나 가부장제는 이 돌봄을 여성의 ‘도덕적 의무’로 규정해, 여성이 노동자로 살고자 할 때조차 “아이보다 일을 우선하느냐”라는 도덕적 비난을 가능하게 했다. 식민지와 자연이 자원을 제공하며 조용히 착취되었듯, 여성 역시 역사 속에서 보이지 않는 자원으로 기능해 온 것이다.


그래서 여성의 선택은 언제나 ‘고민의 결과’가 아니라 ‘성향의 문제’로 오해되고, 삶의 구조적 제약은 쉽게 ‘게으름’이나 ‘무능’으로 축소되었다. 그 잘 보이지 않는 강력한 역사적 힘이,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말과 생각과 판단을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3. “연봉으로 따지면…”으로 시작하는 말의 구조


또 어느 날, 한 학부모가 말했다.

“연봉으로 보면 제가 남편보다 더 많으니까, 집에 한 명이 들어앉아야 한다면 남편이 집에 있어야죠.”


표면적으로는 정확한 계산처럼 들렸지만, 그 말에는 경제적 노동만이 가치 있는 노동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돌봄과 가사노동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처럼 취급되지만, 실제로는 감정·판단·관계·리듬이 모두 필요한 고도의 노동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 노동을 ‘본능’으로 축소했고, 가부장제는 그 본능을 ‘여성의 의무’로 굳혀왔다.


나는 그 말속에서 나의 위치가 얼마나 쉽게 ‘덜 중요한 사람’으로 치환될 수 있는지를 목격했다. 집 안에 들어앉아있다는 것. 이 말에 들어있는 독이야 말로 '구조'였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러나 모두가 무심히 반복하고 있는 구조였다.


그리고 문득 나 자신에게 질문이 떠올랐다.
“나 역시 남편보다 연봉이 낮기 때문에 남편은 회사를 가고 나는 휴직을 한 걸까?

“정말로 집안일은 연봉이 낮은 사람이 맡아야 하는 일인가? 내가 그래서 휴직을 선택한 걸까?”


겉으로 보면 우리 가족의 선택은 경제적 합리성처럼 보였다. 수입이 더 많은 사람이 일을 하고, 덜 버는 사람이 가정의 돌봄을 맡는 것이 ‘맞는 선택’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결정은 우리 가족만의 선택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여성의 돌봄 노동을 무가치하게 만들어온 구조가 자연스럽게 밀어 넣은 선택지였다.


자본주의는 임금이 있는 노동만을 ‘생산’이라고 기록하고, 돌봄과 가사노동은 ‘비생산’이라는 이름으로 장부 밖으로 밀어냈다. 가부장제는 이런 돌봄을 여성의 성향이나 본능으로 규정했고, 덕분에 여성의 돌봄은 언제나 ‘당연한 일’이자 ‘돈을 들일 필요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언뜻 보면 내가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 것 같지만, 사실 나는 이미 사회가 정해 둔 선택지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연봉이 높고 낮음이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무급노동을 언제나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취급해 온 사회가 내 선택의 지형을 이미 좁혀놓고 있었던 것이다.



4. 나를 구해낸 한 문장


책 속에서 한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마치 오랫동안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은 것 같았다.

“남편이 아내를 부양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남편이 일하러 갈 수 있도록 부양하는 것이다.”


이 문장은 내 존재의 위치를 다시 정렬해 주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기대어 사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가 사회에서 기능할 수 있도록 매일 기반을 마련하고 지탱하는 사람이었다. 가사노동과 돌봄은 사회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중심부를 조용히 떠받치는 구조였다.


출근길에 아이의 아침을 챙기고, 아픈 날 밤새 곁을 지켜주고, 학교 제출물을 확인하고, 생활 리듬을 유지시키는 일들. 이 모든 것은 누군가가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일할 수 있는 조건’을 보이지 않게 만들어주는 인프라였다. 한 사람이 회사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컴퓨터나 책상만이 아니었다. 그 사람이 출근할 수 있도록 집을 돌보고, 아이를 돌보고, 식탁을 채우고, 일상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누군가의 노동이 이미 깔려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자본주의는 이런 노동을 ‘부수적이고 사소한 일’로 보이게 만들었지만, 사실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토대였다. 대형 병원이 24시간 굴러가려면 간호사와 의사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이를 돌봐주는 누군가의 손길이 있어야 했고, 기업의 CEO가 세계를 돌아다니며 의사 결정을 내려도 집이 무너지지 않도록 누군가가 생활의 기반을 유지해야 했다.


자본주의는 늘 여성의 노동을 ‘보이지 않는 축’으로 삼아 굴러왔다. 남성들이 공장에서, 회사에서, 시장에서 ‘생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뒷배를 만들어준 이 돌봄의 축은 늘 그림자 속에 있었지만, 그림자가 사라지는 순간 빛은 방향을 잃는 것처럼, 이 돌봄이 멈추면 사회의 모든 구조는 즉각 흔들린다는 사실이 이제야 선명해졌다.






Epilogue


아들이 한국에 온 지 네 달. 나는 낮 동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천천히 탐색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아들이 혼자 하교하거나 혼자 학원에 다니는 연습을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아들이 혼자 다니기 시작하면 나에게도 조금은 시간이 생기겠지, 나도 내 삶의 온도를 다시 조절할 수 있겠지 하는 그런 기대도 있었다.


그런데 며칠 혼자 다니던 아들이 말했다.
“엄마… 근데 나 혼자 오면 외로워.”


그 말은 순간 나를 멈춰 세웠다.
경제학에서 늘 생략되어 온 수많은 엄마의 손길. 아이의 손을 잡아주는 일, 아이가 외롭지 않도록 곁을 지켜주는 시간, 아이의 마음을 채워주는 작은 온기. 내가 왜 휴직을 하고 있는지, 내 휴직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그 모든 것이 그 짧은 문장에 담겨 있었다.


아이 학교 앞에서 기다려주고, 학원에 데려다주고, 끝날 때까지 차 안에서 조용히 기다리는 시간. 누군가에게는 비효율적이고 길에 버려지는 시간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시간 속에서 아이의 마음은 조금씩 안정되고,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감각이 조용히 자라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떠올렸다. 이렇게 해주고 싶어도 할 수 없어 수없이 마음을 졸였던 과거의 나,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회사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서 아이 생각에 마음이 반쯤 걸쳐 있을 워킹맘들. 집에 머무는 엄마든, 일을 나가는 엄마든,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아이의 세계를 지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방식은 다르지만, 그 안에는 모두 사랑과 책임, 그리고 자신을 조금씩 깎아내어 가족의 하루를 이어가는 마음이 있었다. 우리는 이 구조 속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하고 있을 뿐, 누구의 삶이 더 가볍거나 더 무겁다고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점점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작은 손길 하나에도 마음이 흔들리고,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자책하면서도 계속 손을 내미는지.


그 이유는 우리 각자가 ‘엄마’라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어주는 일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나는 내 삶의 자리가 전업맘의 자리일 수도, 다시 일터의 자리일 수도 있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어디에 있든, 어떤 선택을 하든,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누군가를 지탱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지금, 나는 나 역시 이 구조 속에서 누군가의 하루를 떠받치는 한 사람으로서, 다른 엄마들과 조용히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길 위에 서 있지만, 그 길은 서로에게 이어져 있고, 어떤 선택이든 그 안에는 누구도 쉽게 보지 못하는 노력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비교하지 않는다. 나의 오늘을 부끄러워하지도, 다른 엄마의 선택을 가볍게 판단하지도 않는다. 그저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모두, 정말 잘 버티고 있다고. 그리고 그 버팀의 방식이 달라 보일 뿐, 그 마음의 무게는 서로를 깊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비슷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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