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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마 Jan 20. 2024

우리 집에는 살아있는 거울 두 개가 있다.

거울 두 개가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다. 그 가운데에 내가 있다. 거울 두 개가 마음대로 움직이며 춤을 추 듯 자유롭게 나를 비춘다. 그러다가 어느 각도에 다다르면 거울 속에 수많은 나의 이미지가 생긴다. 거울 속의 거울, 또 그 거울 속의 거울이 계속 빛을 반사시키며 나의 이미지는 무한대로 증식한다. 어린아이 두 명과 함께 하는 삶은 마치 거울 두 개를 항상 지니고 다니는 것과 같다. 아이들은 투명하게 나의 말과 행동을 보고 배우고, 서로의 모습을 배우고, 나에게서 배운 서로의 모습을 또 반사해 가며 나도 모르고 있었던 내 모습을 나에게 비춘다.


"이거 봐!" 15개월 된 딸이 처음으로 문장으로 내뱉은 말이다. 아이는 돌이 지나고 나서 부쩍 말이 늘었다. 처음에는 내 말에 고개를 가로젓거나 끄덕였다. 그러다가 그 강도를 달리 해서 자신의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했다. 엄마, 아빠, 오빠, 물, 이거, 저거와 같은 단어를 말하더니 이제는 문장으로 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 문장이 참 생소했다. 이거 보라니. 내가 자주 쓰는 말이 아니었다. 어디서 이 말을 배웠나 생각해 보니 7살 된 첫째 아들이 평소에 자주 쓰는 말이었다. 아들은 동생이 생기기 전까지 양가의 첫 손자이자, 외동아들로 자랐다. 온통 자신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아들은 동생이 생기자 관심 나누는 것을 참 힘들어했다. 그림을 그리거나 레고를 완성했거나 밥을 다 먹었을 때도 '엄마, 이거 봐 바'라고 소리를 치며 관심을 받고 싶어 했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했다. 첫째 아들의 말을 둘째가 다 듣고 배우고 있었다니. 말은 다 어른인 부모에게서 배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첫째 아들의 영향력을 간과했었다. 최근 첫째 아들은 나쁜 말버릇 때문에 나를 놀라게 했었다. 한글학교에서 '찢어버리겠다'라는 선생님께 한 것이다. 사실 그 말은 내가 화가 났을 때 아들에게 했던 것이다. "아들, 계속 연습장 정리 안 하고 두고 다 찢어서 버린다!" 아들은 그 말을 가슴속 앙금으로 품고 있다가 밖에서 했다. 나는 아들에게 나쁜 말을 나도 모르게 가르쳤었다.  


교차반사원리. 두 개 이상의 거울로 여러 상이 생기는 것은 거울의 반사와 교차반사원리 때문이다. 첫 번째 거울에 어떤 물체를 비추면, 그 거울에서 반사된 빛이 두 번째 거울에 도달하고, 두 번째 거울에서 반사된 빛이 다시 첫 번째 거울에 도달한다. 이런 식으로 여러 번의 반사가 이루어지면서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패턴 이미지가 생성된다. 아이가 한명일 때는 거울 하나만 보는 것도 굉장히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문득 화장실 거울에 비친 너무 늙어버린 내 얼굴이나, 불뚝 튀어나온 뱃살, 이미 주름으로 자리 잡은 듯한 이마의 인상 같은 것들이 무겁게 나를 비추었다. 이제는 거울이 하나 더 생긴 것뿐인데, 내 모습은 두 개가 아니라 무한대가 된다. 내가 아들에게 무심결에 가르친 것은 이미 내 손을 떠나버려 손 쓸 세도 없이 둘째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오는 빛이 교차되면서 거울 속에 비치는 수많은 내 이미지는 더 이상 내가 아는 나 자신이 아니다.


둘째는 다음에 또 어떤 말을 배우게 될까? 동생이 자신의 말을 따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첫째 아들은 신이 났다. 아들은 심각하게 이거 봐 다음에 무슨 말을 동생에게 가르칠지 고민했다. 나는 아들 옆에 가서 급한 내 마음을 최대한 숨기고 '사랑해', '고마워'와 같은 말이 어때하고 떠보기도 했다. 장난칠 생각 밖에 없는 아들은 당연히 아니라고 했다. 내가 어떤 말을 가르치겠다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그대로 아이들에게 반영될 리 없다.  둘째 딸이 다음에 내뱉을 말은 또 우리의 일상을 적나라하게 비출 것이다.


다만, 거울이 많다는 것은 빛 또한 많이 모이는 것이라는 과학적 사실에 희망을 가져본다. 거울 두 개에 비친 내 모습이 가끔 기괴하게 느껴질 때가 있더라도 그것은 빛이 비친 것이니 어둡게 그려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못난 모습마저 투명하게 비춰줄 그 밝은 빛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싶다. 수많은 이미지들을 계속 바라보며 상들의 미로에 빠지기보다는 눈을 감고 나를 비추는 빛을 느껴보자. 빛 덕분에 조금은 따뜻하지 않을까? 나는 그 온기에 살포시 기대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나는 오늘도 살아있는 거울 두 개를 반짝이게 닦아낸다.


샌프란시스코 MOMA 미술관에 갔던 어느 날, 작품으로 전시된 깨진 거울에 비친 조각난 내 모습. 우리 아이들은 맑고 깨끗할 수 있게 나를 비출 수 있도록 소중히 여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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