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또 다시 파도가 쳤다.
엄마와 나란히 침대에 누워 쉬고 있었다. 엄마가 넌지시 가슴에 몽우리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깜짝 놀라서 엄마를 병원에 데려갔다.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유방암일 확률이 90프로라고.
그저 얼떨떨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는 벙찐 표정으로 병원을 나와 신호를 기다리며 엄마에게 말했다.
나 :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엄마 : 그러게..
나 : 아니 아빠에 이어 엄마까지 왜 그러는 거야? 다들 나한테 왜 그래 진짜..
엄마 : 너한테 미안해서 어떡하니..
사태 파악이 덜 되어서인지 엄마에게 큰일이 났다는 걱정보다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던 아빠가 3년 만에 건강을 회복해서 이제야 좀 살겠다 했더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엄마가 어떤 심경일지 헤아리지도 않은 채, 나는 그렇게 나의 당황스러움을 달래기에 급급했다.
우리는 집에 오고 나서도 평소와 같이 행동했다. 정확한 검사를 하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소처럼 우스갯소리를 주고받고, 맛있게 식사를 하고, 함께 수다를 떨며 티브이를 봤다. 엄마도 나도 실감이 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는 울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고, 평소처럼 평범하게, 하지만 어딘가 찜찜한 상태로 하루를 보냈다.
엄마는 집을 떠나기로 했다.
대학병원 근처에 살고 계신 이모 집으로 내려가 통원치료를 받기로 했다. 유방암으로 진단받은 이상 수술도 받아야 하고, 항암을 해야 할지도 모르니 강원도 산골에 있는 것보다는 대학병원 근처가 낫다는 가족들의 판단이었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엄마를 떠나보내야 하는 게 당황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를 위한 최선이었다.
엄마가 떠나는 날,
엄마와 함께 3차 병원에 제출할 소견서와, 초음파와 엑스레이 영상을 받으러 진료받은 병원에 갔다. 엄마 앞에서 눈물을 참으려고 너무 신경 쓴 탓인지 소견서를 까먹어버렸다. 기차시간 전에 병원에 들르려면 시간이 빠듯했고, 결국 아픈 엄마를 점심도 못 먹이고 기차를 태워 보내야했다. 떠나기 전 가족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식사였는데 내 멍청한 실수탓에 망쳐버렸다.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담담한 모습으로 엄마를 배웅하고 돌아와 차를 갓길에 세우고 한참을 목놓아 울었다.
3일 동안은 내내 가슴이 메였다.
밥을 먹다가도, 빨래를 개다가도, 물을 마시다도 가슴은 예고 없이 찌르르 울렸고, 그 뒤엔 어김없이 눈물이 차올랐다. 어딜 가나 엄마가 있었다. 부엌에서는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는 엄마가 있었다. 세탁실에는 작은 키로 통돌이 세탁기 안 빨래를 힘겹게 꺼내고 있는 엄마가 있었다. 펜션 앞마당에 가면 텃밭의 꽃들을 사랑스러운 손길로 어루만지는 엄마가 쪼그리고 앉아있었고, 로비 데스크에는 엄마가 믹스커피를 타마셨던 빈 컵이, 예약 문의 내용을 적은 메모들이 수북했다. 하늘도 내 마음을 아는지, 주룩주룩 비를 내렸다.
언제나 그렇다. 후회가 밀려올 때는 이미 늦은 법이었다. 엄마의 흔적들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크게 몰려왔다. 엄마가 하던 일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무책임하게 건성으로 일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늘 '내 일'을 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엄마 일을 돕는다고 생각하면서 불평하고, 생색만 냈다. 엄마는 수많은 일들을 홀로 책임지고 맡아하면서도 군소리 한 번이 없었다.
아빠와 나, 우리에게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며, 아빠와 나는 사무치는 후회로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다.
인생은 참 바다 같다. 어떤 날은 물결이 잔잔하니 평화롭고, 어떤 날은 거센 폭풍우와 함께 집채만 한 파도가 친다. 지금 나의 인생에는 큰 파도가 몰아친 것 같다. 3년 전에도 예고 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잘 넘었으니, 이번에도 잘 넘을 수 있을 것이다. 몰려오는 파도를 피할 길은 없으니, 집어삼켜지지 않도록, 파도를 잘 타봐야지. 그렇게 또 언젠가 고요한 바다가 내 앞에 펼쳐지기를 기대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