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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주 Apr 12. 2024

가식과 영원

김성중, 『개그맨』

  “저는 인간으로서의 매력은 없나 봐요.”


  최근에 지인들과의 자리에서 내가 뱉었던 말이었다. 그 당시에 나는 스스로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매력을 갖는다는 건 뭘까. 나는 타인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인가. 아름다운 풍광 앞에 서면, 늘 그 중심에 있으려 하는 것이 때로 누군가에는 함께 어우러지는 데에 있어 그 사람의 색을 뺏는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딜가서든 내가 채도 높은 사람으로 보이길 원했다. 어쩌면 이것은 타고난 성정인지도 모른다. 예술가적 기질.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는 외향성.


  그렇지만 나는 결코 혼자서 무엇을 해내고 싶진 않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과제를 달성해 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혼자일 때보다 함께일 때가 즐겁다. 함께하기 위해 나는 부족한 나의 세심함을 채우려 노력한다. 내가 아무런 의미 없는 MBTI에 관심을 두는 것도, F 성향의 친구들로부터 배울 점을 기억하고 카피하는 것도 그 이유에 있다. 나는 내가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나아가는 방향이 옳은지, 아닌지 명확히 구분 지을 수 있는 길을 걷고 있는 건 아니지만 나아가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그런데 정강이까지 몹시 힘을 주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명확한 “틀림”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을 빼며 살아간다는 것. 요즘 나는 그것에 대해 골몰한다. 힘을 빼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내가 될 수 있을까. 손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오글거림. 그렇게 사는 건 가식을 떠는 게 아닐까. 무채색의 인간. 나에 대해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 것. 휘발성이 짙은 사람이 되어보는 것. 그것은 나다울 수 없고, 나를 잃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또다시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어른되어 ‘나다움’을 잃는 것에 대한 소설을 떠올리면 나는 몸이 투명해지다 증발해 버리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바로 김성중 작가의 <개그맨>이라는 소설집이다.


  그중에 단편 <허공의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가족은 물론, 이웃과 지구 반대편의 생명체까지 모두 투명하게 증발해 버린 듯한 도시. 그 도시엔 소년과 소녀 두 사람만이 살고 있다. 두 사람은 비어 있는 대형마트에서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기도 하고, 보고 싶었던 책을 읽거나 게임을 즐기며 시간을 보낸다. 처음엔 그 자유 앞에 시간을 속수무책으로 쓰다 어느 날 소녀의 집이 조금씩 허공으로 들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소녀의 몸은 이미 증발해 버린 다른 사람들처럼 조금씩 투명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년과 소녀는 점점 떠오르는 집에 머물기로 한다. 대지는 계속해서 갈라지고, 오래 머무르다가는 산불이나 홍수를 피하기도 어려운 환경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식량을 비축하고, 집에서 반복되는 일상을 견디는 법을 수련한다. 퍼즐 조각을 맞추기도 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함께 잠을 자고, 안부를 물으며 벽면에는 저들이 함께 보낸 시간을 기록해두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언제고 의미를 상실해 간다. 소년은 무력감 앞에 공격성을 보이고, 소녀는 점점 무기력해진다. 서로 다투기도 한다. “소리를 지르며 격렬하게 싸우기”도 한다. 그 사이 아이들은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식사량을 줄여도 소년의 키는 멈추지 않고 자라며, 소녀는 생리를 멈추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무용지물인 세계임에도 말이다.


   소년은 점점 투명해지는 소녀를 보며 두 가지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첫째로는 홀로 이 세계에 남겨져야 한다는 두려움과 허공을 가르며 끊임없이 떠도는 이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지 위로 뛰어들어 스스로 추락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추락의 끝에 죽음이 있을지, 또 다른 세계가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아, 너무 싫다. 자존감 떨어지는 그 태도. 너무 별로야.”


  그날 내가 “매력이 없나 보다”라는 말을 뱉자마자 한 치의 틈도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들었던 말이었다. (지겹겠지만) 나와 비슷한 MBTI를 가진 사람이 해주었던 말이기도 했다. 그 사람은 아마도 모르겠지만 그때 나는 속으로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역시나 같은 의도는 아니겠지만 ‘나’를 조금 더 믿어보라는 말로 나는 멋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나는 내가 충분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리숙하고, 미숙하고, 때로는 안타까운 선택이나 행동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런 시간들을 모두 거쳐 언젠가는 투명해지는 저 너머 세계 속 아이들처럼 나의 몸체가 점점 투명해지듯 허공을 유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더 나은 사람으로 비춰지기 위해, 더 괜찮은 선택을 하기 위해 신중해지고 조심스러워지다 보면 나의 색을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자란 뼈를 매만지며 때로는 어른으로서 성장한다는 것 자체를 원망하며 울적한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역시나 나는 언제나 세상의 중심에 서 있고 싶다. 나를 둘러싼 투명한 세계에 붓을 들고 색을 칠하며, 그 윤곽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내가 보고 느낀 것, 듣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떠들고 싶다. 남다름을 원하고 있음을 이젠 인정하기로 했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들을 찾아 헤매어 보고 싶다. 계속계속 떠들어도 질리지 않는 이야기를 찾을 것이다. 그리하여 내 이야기를 듣고 투명해져 가던 사람들의 그림자를 주워다 또다시 알록달록 색을 칠할 것이다. 세상을 물들일 것이다. 뼈가 자라는 소리. 내 소리는 아마도 결코 투명해지지 않을 때 선명하게 공명하는 모양이다. 그것이 지금의 나다. 그리고 이것이 누군가는 발견하지 못했을 나의 진짜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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