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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주 Apr 05. 2024

그 남자의 결혼 생활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광주에는 “웨딩의 거리”로 불리는 동네가 있다.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을 비롯한 예물과 테일러샵이 줄지어 있는 곳이다. 언제부터 그곳이 웨딩의 거리였는지, 어떤 이유로 웨딩의 거리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주말을 낀 채로 방문했으므로 이른 아침부터 신혼을 맞이할 커플이 손을 맞잡은 채 이곳저곳에 시선을 두었다. 그 거리를 지나는 동안 나는 웨딩드레스와 티아라를 바라보았다. 만일 결혼을 하게 된다면 거창한 예식을 올리기보다는 차라리 실속 있게 가구나 집에 투자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었으나 그걸 보는 순간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역시나 아름다운 것들은 사람의 마음을 매혹시킨다. 동시에 생각했다. 결혼은 필요해서가 아니라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매혹되어 저지르는 것이 아닐까 하고.


  나 역시 결혼을 원한다. 가능하다면 아이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결혼에 대한 마음의 준비, 부양가족에 대한 책임감, 경제적 능력, 양육에 대한 지식. 모두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혼에는 조금 더 본질적인 성장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성인”으로서의 내면을 더 단단하게 다져놓는 것. 결혼은 마치 리볼빙을 이용하는 것만 같다. 할 때는 빚인 줄 모르고 신청했다가 잘못하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신용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나’를 위해서도, ‘상대’를 위해서도. 사랑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내’가 얼마나 상대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지, ‘상대’는 얼마나 나의 정서를 안정되게 감싸줄 수 있는지가 가장 기본적인 토대라면 인생에 있어서 가치관이나 생활습관 같은 것도 비슷해야 할 것이다. 저 너머 쇼룸 뒤 웨딩드레스를 보고 마음을 빼앗기듯 화려함에 속아 섣불리 결정했다가는 시간과 자본만 들이고 돌이킬 수 없는 실패담을 만들어낼 테니 말이다.


  최근에 나는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를 읽으며 제법 오래 웃고, 난감해했다. 동양의 카프카라 불리는 아베 코보의 작품은 맛깔스러운 문체가 특징이라고 생각했다. 담고 있는 사유나 세계를 다루는 방식 등은 카프카와 유사성이 돋보였으나 카프카가 피쉬 앤 칩스를 썰어 먹는 예의 바른 신사라면, 아베 코보는 뒷돈을 받고 거벽이나 필사를 이어 가는 생계형 양반 같다. 그만큼 단어 사용이나 문장 배치 등 그가 부리는 문장의 기교가 거침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의외로 양귀자의 소설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초현실주의적인 세계관 속에서 나는 그가 그려낸 세계가 마치 ‘남성의 결혼생활 성장기’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남자는 곤충 채집을 인생의 유일한 낙으로 아는 평범한 학교 교사다. 삼십 대에 접어들어도 곤충에 핀을 꽂아 박제를 하는 것을 취미로 여기는 것은 사람들에게는 공공연하게 밝히지 않는 비밀이기도 하다. 학부모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취미를 들킨다는 것은 곧 평범함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것. ‘성인’으로서 인정받지 못한 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갇힌 어린아이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세계의 속도에 발을 맞추어 걷기 위해서는 남자 역시 눈치껏 자신의 본질을 속여야 한다.


  그러다 모래 구덩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희귀한 곤충을 채집하겠다는 호기심이 그를 사구로 이끌게 만든다. 여자에게 남자를 데려다준 노인은 처음부터 사구를 벗어날 만한 굳건한 사다리 대신 언제든 거둬들일 수 있는 새끼줄 사다리만을 내려보낸다. 사구까지 걸어 들어가는 일은 쉽고 간단하다. 그러나 모래 구덩이 속에서 빠져나오는 일, 그곳을 살아내는 일은 그저 난감함의 연속일 뿐이다. 남자가 빠진 구덩이는 하필이면 그 마을의 중심 역할을 한다. 집 안으로 스며오는 모래를 파내지 않으면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이 죽고, 더 나아가서는 마을 전체가 폭삭 내려앉는다. 남자는 끝내 자신이 왜 노동을 떠안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들 듯 여자를 대신하여 모래를 파내기 시작한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모래의 속성에 대해 생각했다. 모래는 물이나 흙과 다르다. 작용은 있되, 반작용이 없는 물성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모래다. 모래에게 가한 힘은 그만큼 되돌아오지 않고, 흔적이 남지 않는다.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뛰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해대는 것이다. 나는 어쩌면 이렇게 사구 속에 갇히는 것이 작가가 표현하고 싶었던 ‘결혼생활’이 아닐까 싶었다. 처음부터 작정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저 ‘희귀한 곤충’ 하나만을 손에 얻고 싶었던 것뿐인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빠져나올 수 없는 구덩이에 갇힌 채로 평생 ‘여자’와 밥을 지어먹거나, (화자의 입장에서는) 삽질하는 노동을 해야만 한다. 잠깐의 탈출기를 그려보기도 했지만 마을의 어른, 즉 연장자로 인해 진압당한다. 그리고 끝내 주체성을 부여받은 채 구덩이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될 무렵에는 되려 무기력하게 기회를 흘려보낸다.  


  '도주 수단은, 그다음 날 생각해도 무방하다'(p.224)


  모래 구덩이 밖으로 나가지 않던 남자의 모습은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닌, 구덩이 밖의 세계를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걸로 보였다. 안팎이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실존하는 세계의 폭이 얼마나 너른지, 얼마나 다양한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갈 수 있는, 내게 허용된 풍광이 가늠되지 않을 때가 있다. 애를 써서 구덩이 밖으로 나왔건만 그 밖이 불덩이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은 비로소 어른이 되어서야 생겨나는 불안이다. 나이가 들수록 불안이 짙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신중해진다는 것이고, 그만큼 흔들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건 긍정적으로만 볼 수도 없는 것 같다.    


   지금껏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아이 같았다. 그건 나이나 시간과는, 그리고 그들이 겪은 세월의 깊이와는 무방했다. 누구나 제 마음속에 연을 날리며 언덕을 뛰 노는 소년이 있는 것이다. 결혼 이전의 삶이 우리 모두에게 자유로운 '연'과 같은 시절을 보내는 것이라면 결혼 이유의 생활은 한 곳에 뿌리를 내린 채 양분을 흡수하고 타인을 위한 그늘을 만들어내는 '근'의 시절이 아닐까 싶다. 호기심과 통과의례 매혹되어 선택한 결혼생활에는 아무리 좋은 환경과 조건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군데군데 염증이 생길 것이다. 작용했지만 반작용 없는 시절을 보내기도 할 것이다. 모래로부터 탈출하고 싶지만 마을 전체가 무너질까 두려움에, 책임감에 '하루만 더, 하루만 더'를 외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탈출하더라도 손톱 사이에, 머리카락 사이에 잔흔처럼 남게 되는 것이 결혼이다.


   그리하여 이 책의 제목처럼 화자인 '나'가 중심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모래의 여자'라는 조연배우가 작품의 제목이 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끝내 '나'의 주체성을 찾기 위해, 나만의 세계를 갖기 위해 떠났으나 정작 '나'의 이름을 채집당하고 마는, 실종신고가 된 채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는 것. 그러니 이 소설이 얼마나 무서운가. 얼마나 절묘하고 불완전한가. 다시금 웨딩의 거리 속 부부들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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