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상, 『당신의 브랜드는 브랜드가 아닐 수 있다』
또 그만두기로 했다. 이번엔 달리기다. 작년 봄에 시작한 이래로 1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오프 때마다 꾸준히 한강을 찾았다. 동호대교에서 잠수교까지 여섯번 반복. 퇴근 후에 매일, 주말엔 반나절을 한강 위에 있었다. 처음엔 걷는 것도 힘들어 걷다 쉬다를 반복했고, 나중엔 ‘런데이’ 앱을 다운로드 받고는 다정한 스앵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인터벌 달리기를 시작했다. 1분 달리고, 2분 30초 쉬고. 그렇게 5분을 연속으로 달리게 되었다.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지금은 한 번에 30분 동안 5초대로 달리는 정도까지 체력을 키웠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왜 그렇게 오래, 많이 달리느냐고. 나는 대답한다. 책상 앞에 앉아 있지 않기 위해 밖으로 나왔던 거라고. 그렇지만 실상은 살을 빼기 위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람이 게을러 살이 찐 게 아니라, 내 살의 팔 할은 오랜기간 꿈을 증량했던 흔적이라고. 아랫배는 물론이요, 윗배까지 불룩. 팔과 다리까지 내 모습은 마치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등장하는 블루베리 껌을 먹다 원치 않게 둥글게 부푼 바이올렛 같았다.
어른이 되면 자유로운 줄 알았더니 어른이야 말로 통제의 시대를 살아가는 직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도 사랑도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다달이 납부하는 보험료와 생활요금에 탈탈 털리는데다 물가는 치솟다 못해 치사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오직 ‘내 몸’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내가 달리기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기 시작한 건 그것 때문이었던 것 같다. 돈이 많이 들지 않고, 노력에 배신 없이 이를 악물기만 하면 하루에 10킬로미터는 거뜬히 달릴 수 있으니까. 달리기를 하다 보면 가끔은 두 손을 활짝 벌린 채 마주하는 바람에 손가락으로 깍지를 끼우거나 몽글몽글 부풀어 있는 구름을 보고 입을 헤 벌린 채 웃기도 한다. 사는 건 하나도 유머러스하지 않은데 나는 내 모습을 자주 우습다고 생각한다. 사실 언젠가부터는 유쾌하지 않아서 달렸던 것 같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속도를 높였다. 속도를 높이고 나면 멈추는 게 자존심이 상해서 (겨울에는) 러닝머신과 대결하듯 달렸다. ‘30분 달리는 동안 멈추면 공모전에서 떨어질 거다.’, ‘목표하던 시간에서 멈춰 버리면 잘 쌓아둔 썸이 와장창 깨져 버릴 거다.’ 마음 속으로 그런 조건을 매번 걸었다. 고백하자면 그래서 나는 한 번도 달리는 도중에 멈춘 적이 없다. 징크스가 깨지는 것이 두려워서. 그러니까 내 꾸준함의 비결은 좋아함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던 거다. 덕분에 종아리 근육이 똘똘 뭉쳤고, 이른 아침 기지개를 켤 때마다 ‘악’소리를 내며 종아리를 부여잡았다. 열 개의 발톱 중 엄지발톱을 제외한 여덟 개의 발톱에 피가 고였고, 부서지기 시작했다.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어린 쑥 같은 ‘독기’가, 역시나 나답다고 자부했던 오만함에 대한 후유증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근상의 <당신의 브랜드는 브랜드가 아닐 수 있다>를 읽기 전부터 나는 내내 고민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일이 많았던 작년 한 해 동안 나를 표현할 수 잇는 키워드는 명확하게 존재했다. ‘비’, ‘달리기’, ‘안티히어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켜야 할 때마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내가 생각해 오던, 내가 지향하고 좋아한다(고 믿었던)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 해가 지난 후 나는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 ‘달리기‘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나? 사람들이 그걸 인정해줄까? 내 몸은 러너의 몸이 아니었다. 뛰는 데 들인 시간에 비해 근육은 탄탄하지 않았고, 여기저기 부상에 뛰는 즐거움에 대해 질문 받을 때면 딱히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3가지가 곧 나를 수식하는 키워드라고 생각했고, 얼마 동안은 이것들을 빼면 나를 구성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세상에는 생각보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 비를 좋아하는 사람, 안티히어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달리기’는 나만의 특장점이 아닌 요즘 세대에 떠오르는 운동 중 하나였다. 한강에 나가면 러닝크루가 게임 속 길드처럼 우르르 몰려다녔고,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ASMR을 틀어놓는 사람들로 어마어마했다. 안티히어로를 뛰어 넘어 마블과 DC세계관에 진심인 덕후들은 저들끼리 커뮤니티를 만들어 코스프레는 기본이요, 굿즈를 생산하기까지 했다. 심지어는 비 오는 날 달리기를 시전하며 쓰레기를 줍는 초광각 히어로급인재들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에 나는? 나는 그들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그냥 나일 뿐이었다. 취미로 달리기를 좋아하는 척하고, 외향적이지만 내향성도 짙어 비를 좋아한다고 했으며, 착하면 당하고 산다는 세계의 무논리에 질려 안티히어로가 좋다고 말하고 다닐 뿐이라고.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나는 나를 잘 알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뒤통수가 저릿하고 아파왔다.
책을 읽는 동안 마음에 남았던 구절이 있다. ‘나라는 브랜드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형용사가 있나?’(p.22) 명사로써 나를 수식할 순 있었지만 형용사로서 나를 수기할 수 있는 단어를 찾는 것은 어려웠던 것 같다. 머리를 짜내어 생각해 낸 ‘멋진’, ‘여유로운’, ‘다정한’ 같은 형용사도 모호한데다 명확하게 ‘나’라는 사람에 대한 차별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랜드는 사람이다’라는 명제에 따르면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실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인식’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p.33)고 한다. 지난 시즌에는 나만의 인식을 만들기 위해 억지로 특정 키워드에 나를 끼워넣기 위해 무리하게 노력했던 것도 같다. 마치 피자 레스토랑의 사례처럼. ‘좋은 재료를 제대로 만든 피자’는 훌륭한 실체임에 틀림 없으나 ‘좋은 인성을 갖추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말은 너무 옳은 말(p.35)이어서 브랜드 자체에 대해 설명하기엔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A대신 B가아니라 A-1 대신 A-36을 왜 선택해야 하는지, 모두가 긍정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 긍정적인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러너라면 왜 많은 러너 중 나를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이제는 해봐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그래서 그만두기로 했다. 나는 이제 달리지 않는 ‘러너’가 되기로 했다. 달릴 수 있지만 달리지 않는 사람. 달리기를 배신해 버린 러너. 모두가 달릴 때 나는 이제 멈춰 서서 달리는 사람들로부터 배우고 관찰하는 ‘스토퍼(Stopper)’가 되어 보기로 했다.
요즘 나는 일요일마다 시간을 비우고 온전히 혼자 있는 시간을 갖고 있다. 전날 보고 싶은 영화를 한 편 보고, 눈이 떠질 때까지 휴대폰을 꺼둔다. 일어나면 좋아하는 음식인 그릭요거트와 두뇌회전을 위해 잘 구워진 베이글과 헤이즐넛 시럽이 듬뿍 뿌려진 아메리카노를 주문해 먹는다.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자리에 앉아 회사 밖의 두번째 자아, 내 콘텐츠를 생산해야 하는 업무를 본다. 긴 시간 앉아서 업무를 보거나 공부를 한다. 그런 게 싫은 날에는 다시 누워 낮잠을 잔다. 낮잠은 길어져 밤잠이 되기도 한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때까지 기다리다 또 다시 그릭요거트(?)를 주문한다. 억지로 내가 생각하고 노력한 키워드를 좋아하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분방’한 하루를 보내려 노력한다. 나에 대해 함부로 규정하려하지 않고, 무엇을 생각하려 하지 않고 그저 흐르는대로 흘러가는 물결처럼 달려 보려 한다. 멈춘 것 같기도, 달리는 것 같기도 한 상태. 사람도, 브랜드도 결국은 자신만의 ‘분위기’를 갖는 것이고, 그것은 인위적으로 노력해서 얻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책을 읽는 동안, 그리고 봄을 지나오는 동안 깨닫게 되었다. 어떤 이미지든 꾸준함이 필요하겠지만 그 이전에 꾸준하게 지향할 수 있는 가치를 진정으로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 입으로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사람들 사이에서 기억될 수 있도록. 어떤 프레임은 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지만, 또 어떤 것들은 자아가 아닌 타인에 의해 형성될 것이다. 언젠가 사람들 사이, 그 대화의 틈에 끼어들게 되는. 어느 날 불쑥 내가 없는 자리에서 ‘있잖아, 걔 말이야. 어? 걔? 응. 걔..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재밌어. 별 거 없는데. 좀 특이해. 재밌어. 호기심이 가. 자기 말로는 자기가 러너라는데, 달리기를 안 해. 왜냐면 아직 잘 모르겠대. 자기가 왜 달려야 하는지. 내가 보기엔 달리는 거 같은데 자긴 자꾸 달리는 게 아니래. 이상하지?’라고 겹겹이 지칭되게 되는. 팬덤은 브랜드가 원치 않아도 별칭이 붙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내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려 해. 네가 보기에 나는 어떤 사람 같아? 내 별명 한 번 붙여줘 볼래? 오늘과 내일이 다르더라도. 아마도 이것이 진정한 브랜드의 시발, 아니 시작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