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화
재미없는 사람. 언젠가 내게 붙었던 수식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재미있다는 평을 들었던 적이 많지 않았던 듯하다. 장난스러운 면보단 진지한 면이 앞서고, 알고 싶은 것들이 생겼을 땐 그것 하나에만 몰두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이니까. 내게 어떤 질문을 해도 특별히 굴곡 있는 사건이 없어 대답하는 것도 재미가 없지 않았을까 싶다.
학부 시절, 연극 동아리를 하며 술자리에서 한 선배가 ”민주, 재미없지?“ 하는 이야길 나누는 걸 목격한 적이 있다. 그때조차도 선배들은 내가 옆에 앉아 있는지도 몰랐어서 내가 술을 따라주며 ”그래요?“하고 되물었을 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 역력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내게는 여러 개의 자아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자아는 혼합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했는데 대체로 낯을 가리는 상황 앞에서 복작거리듯 활발해지기도, 친밀한 관계일수록 유영하듯 느릿하게 천진함을 보여주었던 것 같기도. 결과적으로는 선배들의 말이 맞았다. 나는 어떻게 해도 끝내 ‘재미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으니까.
여행을 하며 재미있는 도시가 있고, 영 재미가 없어 숙소에만 머물고 싶은 도시도 있었다. 그때의 느낌이나 상황, 감정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대체로 도시의 분위기가 그런 곳이 있었다. 내게는 런던이 그랬고, 베를린이 그랬고, 비엔나가 그랬던 듯하다. 어떻게 노력을 해도 재미가 없는 도시. 화려하지 않고, 요란하지 않은 도시들. 가장 환상을 품고 있는 도시들이 재미가 없으니 나중에는 시간이 아깝고 후회가 되었다. 재미없는 도시들. 별로인 도시들. 나는 내내 화려한 것들, 자극점만 추구하는 사람이니까. 나아가고, 성장하고, 방랑하는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니까 이런 도시들은 나와는 영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베를린에 있을 땐 일정을 옮겨 이곳을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재미없는 도시에 온 것이 후회가 되었다. 동시에 며칠에 한 번씩 여행지가 바뀌며 새로운 자극을 느낄 때마다 내가 재미없게 살아온 것이 내내 후회가 되었다. 올해를 보내며 계속해서 나를 추궁했다. 왜 이렇게 시간을 보냈던 거야? 잘못 살아온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비엔나에서의 첫날, 12시도 되기 전에 도착해 충분히 관광지를 돌고도 남을 시간이 주어져 있었지만 그날 나는 러닝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려 했다. 눈앞에 벨베데레로 가는 트램이 몇 번이고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런 것보다는 예전처럼 규칙적인 생활을, 운동을 하고, 회사를 다니고,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날은 그저 내 몸에 집중하며 러닝을 했던 듯하다. 동시에 생각했다. 나는 운동하는 걸 정말 좋아하는구나. 루트도 정하지 않고 무작정 달리는 길. 호흡은 빨라지고, 발목은 불안정하고, 가슴 한쪽이 저릿하게 아파오는데 오히려 숨이 탁 트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엔 관광보다는 카페에서 미뤄둔 글을 쓰고 싶어 무작정 궁전 근처의 카페에 앉아 차를 두 잔 마시며 글을 썼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베를린에서도, 런던에서도 대체로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날마다 이벤트로 가득한 하루를 보내는 것보단 익숙하고, 내게 주어진 일을 수행하는 시간이 더 흥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걱정도 되었다. 내가 지금 그런 상태에 빠져 있어도 될까? 지금 이것을 안정감이라 여겨도 될까? 혹시 내가 너무 재미없는 사람으로 다시 돌아가려 하는 것은 아닐까.
여행을 하며 세계의 유명하다는 명화는 다 보고 온 듯하다. 기록형 전시였던 신화와 초상화를 가장 많이 접했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반고흐의 <아몬드나무>였는데 그 그림에 담긴 의미도 좋았지만 대체로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그림, 작가가 기쁘거나 편안할 때 한가한 마음으로 표현한 것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가 좋았다. 이를테면 봄 볕에 놓인 과일바구니 같은 것들.
풍요로움. 한낮에 놓인 과일 주변으로 빛이 새어 들어오던 순간. 그림을 볼 때마다 동적인 움직임이 느껴졌다. 평화롭다. 풍요롭다. 신화는 대체로 화려하고, 요란하고, 처절하고, 자극적이었지만 정물화는 그렇지 않다. 대체로 여유롭고, 한가하다. 빈에서 깨달았던 것 같다. 내가 지금 그것을 인상적으로 여기는 이유는, 내가 지금 추구하는 것이 ’안식‘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두려웠다. ’안식‘은 반대로 ’죽음’을 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혼의 죽음, 안식.‘ 결국 재미없는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미술사 박물관을 돌아보는 동안 마음이 불안해지고 자꾸만 눈물이 났다. 내가 한 시절을 통과해 버린 것만 같아서. 그 시절에만 나오던 정서를, 순수함을 이제는 표현해 낼 수 없음이 슬퍼서. 빈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나의 시절들을 애도하고 있었던 듯하다.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깨달은 점이 있다면 안정적인 도시일수록 여행하는 일이 재미가 없다는 것을 이다. 그림도 마찬가지. 화려한 그림일수록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다. 동시에 삶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날마다 이벤트인 삶이 가능할 수 있을까? 그 삶의 만족도는 얼마나 높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정적일수록 재미가 없는 것이구나. 특별한 것이 많을 필요가 없을 테니까. 나 그동안 잘 살아왔던 거구나, 나를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자극적인 사람이 되려 노력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는 그대로, 그저 나를 그대로 노출하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매 순간 특별한 순간을 기록하거나 내게 날마다 이벤트를 선물할 수 있는 삶보단 가만가만 ‘안식’을 추구할 수 있는 여유로운 삶이 좋다. 이제 그것을 원하는 사람이 되었고, 그래서 많이 서글펐지만 지금은 괜찮다. 다 괜찮아졌다.
이십 대를 보내며 나는 적당히 사람들 속에서 가면을 채울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활기찬 모습은 진짜 내가 아니고, 말없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책장을 넘기는 모습만이 나라고.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나뉘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자극점을 추구하니까. 재미있는 내게서 더 흥미를 보일 뿐이니까. 튀어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나. 자극적이기 위해 노력하는 나. 그것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하는 나. 지금은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어찌됐건, 그 모든 게 ’나‘라는 사실을 말이다.
12월의 절반을 보내며 지금의 내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아마도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선 사랑하고 싶은 것들만을 챙겨 가볍게 돌아올 듯하다. 그리고 작년 생일에 시작해, 1년 동안 <사랑하는 시대에게>를 연재하며 내 글의 결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장의 기교를 부리는데 몰두해 있었던 첫 글과 가장 솔직한 목소리를 내고 싶어하는 지금의 나는 여러모로 많이 달라져 있지. 그런 것들을 촘촘히 되짚어보는 시간을 보내는 오늘이 이제 나는 좋다. 이 시대를, 비로소 사랑할 수 있게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