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누군가 알아봐 주기를 바랬어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가위의 칼날이 내 머릿결에 닿던 서늘한 촉감을 기억한다.
잘 어울려. 사람들은 내게 말했다. 그때마다 나는 반문하고 싶었다. 잘 어울리는 구나. 나답지 않은 행동들, 도저히 계산이 서지 않는 다음. 그때 나는 잘 어울린다는 말보단 괜찮을 거라며 나를 꽉 안아주기를, 다독여주기를, 누군가 나의 고통을 알아봐 주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여행을 하며 즐거워보이는 나의 모습의 뒷면엔 “고통을 전시하는 중”이라는 무언의 시위가 있었다.
좋아하던 일은 어쩌고? 멀쩡히 잘 다니고 있던 회사는 왜 그만둔 걸까? 다시 회사를 갈 생각은 없나? 회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 아니었어? 그런 질문을 너무나도 받고 싶었다. 내게 누군가 질문해 준다면 일일이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누구라도 붙잡고 사실을 꺼내고 싶었다. 이 시점이면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이젠 나도 나를 예측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그것은 종료되었고, 그 일들은 상처가 되어 버린 듯하다. 오직 나만이 나는 흉터가 될 것 같다.
나를 오래 보고 지내온 사람들은 내게 묻지 않았다. 그저 잘했다는 말만 했다. ‘잘 나왔어.’ 친구들도, 가족도,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저 잘했다고만 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민주 너는 타인을 함부로 이해하지 말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네가 사람들의 편의를 봐주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하니까 그렇게 속이 썩는 거야. 사람들은 그걸 이용해. 제도를 이용하고, 권력을 이용해서 네가 세계에, 사회에 굴복하고 순종하게 만드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니?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얼마간 나는 심통이 나 있었다. 사람들을 이해하지 않으면, 이 세계는 혼란스러울 거야. 각자 타고난 시간들이 모두 달랐잖아. 나라도 이해하지 않으면 세계는 의사소통이 절대로 될 수 없어. 나는 다수와 나의 생각이 다른 것이 나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가진 패러다임을 부수는 사고를 하는 것이 내가 가진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가진 건 겨우 ’금기‘를 깨겠다는 욕심뿐이었던 것 같다.
베를린을 여행하는 동안 ‘금기’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평소 ‘금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고, 세계의 틀을 부수는 관점을 두고 토론하기를 즐겼다. ‘금기‘란 본디 고작 인간이 만들어낸 수학적인 계산에 불과하지 않던가. 그러니 금기를 반드시 지켜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소설 수업을 듣는 동안에도 나는 그런 이유로 사회적으로 이해받지 못하는 인물을 세상에 설득하는 작업을 할 때마다 퇴짜를 맞고, 쓴소리를 들었다. 그때에는 내게 어떻게 ‘금기’를 깨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되려 그들이 꽉 막힌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관념을 나는 베를린에서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세상에 ‘금기’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것이 ‘금기‘이기 때문이란 걸 이제는 알겠다. 지나온 역사를 반복할 이유도, 필요도 없기 때문에 ’금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겠다. 그리하여 ‘금기’를 어기려는 사람, 금기의 패러다임을 부수려는 어떤 사람들은 절대로 이해받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던 것 같다. 모든 사람은 이해받을 수 있되, 모든 공통의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나는 베를린에서 배웠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선한 사람, 양심적인 사람, 못된 사람, 못난 사람. 좋은 사람일 순 있으나 양심적이지 못할 수 있고, 못난 사람일 수 있으나 선한 사람일 수 있다. 그런 걸 보면 인간은 한 가지로 말할 수 없고, 때로는 ‘제도’와 ‘권력’을 이용해 좋은 사람인 척 꾸며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끝내 진실을 가린 채, 작은 호의를 베풀었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겠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이었는지도 이제 알겠다.
여행을 시작한 지 이제 절반 정도 지나왔다. 앞으로 여행은 3주 정도가 너 남아 있다. 여행을 할 때마다, 도시를 이동할 때마다 나라의 정서와 분위기, 역사를 피부로 와닿게끔 배운다. 그리고 내게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그리고 내가 없는 서울의 사건들을 가만히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