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느슨하게 살아간다는 것
완벽주의자의 기질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잘 해낸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걸, 나는 도쿄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내가 여행지의 즐거움을 누리기보다는 내가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급급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먹는 것도 나중, 잠시 머물러 시간을 즐기는 것도 나중의 일. 우선 나는 잘 모르는 세계를 정확히 도착해 있는 것만을 우선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 대부분의 투어는 네 시가 되기 이전에 끝났다. 시간에 쫓겨 늘상 서둘렀기 때문이다.
완벽주의자라는 말, 시간 약속에 철저하고, 세워놓은 목표를 정확히 달성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그만큼 자기주장이 강하고 고집이 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언젠가부터 완벽주의자의 기질을 지닌 사람들을 마주하면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 역시 그러한 성향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하기 때문이다. 완벽주의자라는 것은 언제나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니다. 성공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완벽주의자에게는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을 때 좌절하며 무력감을 느끼는 강도가 보통의 사람들보다 몇 배는 더 큰 이면이 있다.
통제 성향 100%에 머물러 있었던 나는 최근에 진행했던 테스트에서 70%까지 떨어지는 기적을 경험했다. 아마도 여행 덕분이지 않을까 싶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행을 거의 하지도 않았을뿐더러, 빽빽하고 정교한 계획이 필요했으나, 이번 여행은 어쩐지 시작부터 그럴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었다. 체력은 점점 떨어지고 있는데 밀린 일들과 해야 하는 일들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일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일들이 나를 유혹하고 있었고, '이것만 하고, 이것만 하고 쉬자'는 말을 반복하던 나는 결국 여행 계획을 하나도 세우지 못한 채, 그 나라의 중요 정보를 하나도 스터디하지 않은 채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파리에 와 있는 동안에는 모든 게 행복하게 느껴졌다. 처음 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거리의 사람들, 골목마다 보이던 유적들. 미술품. 나무. 흐르는 강물. 심지어는 버려진 쓰레기까지도 어찌나 신기하던지. 그래서 조금씩 일을 미루거나 시차를 핑계로 모르쇠의 태도를 가지기도 했다. 나답지 않게 마감을 지키지 않는 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받아놓은 일이 많아 이틀 연속 두 시간만 수면하고 파리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조금씩 마감일을 놓치게 되면서, 이 시기에는 꼭 이걸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하기 시작한 것 같다. 파리의 마지막 여행날에는 '다음에 오자'라는 말을 연신 반복하며 지치거나 힘이 들 때 잠시 멈춰서 쉬어가곤 했다.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거나 계획에 없었던 곳에서 오래 시간을 보내며 말이다.
어제는 파리에서 런던행 유로스타를 타는 동안 혹시나 기차를 놓치게 될까 체크인 시각보다 4시간이나 앞서 역 앞에 와 있었다. 벤치에 앉아 있으면 혹여 위험할까 내게 얼리 체크인이 안된다며 홀에서 기다리라는 역무원의 말에 그의 옆에 딱 붙어서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 동안 급하게 진행해야 했던 일을 마무리했으므로 (일을 다 마치지도 못한 채) 금방 시간이 흘렀다. 태블릿을 들여다보며 열심히 일을 했으므로 파리에서 출국심사와 런던행 입국심사가 동시에 이뤄졌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그저 직원들이 하라는 대로 멍하니 따라가다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제야 런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첫날에는 숙소에 도착해 손톱깎이를 구매하겠다며 나선 대형마트에서 시간을 보내고, 파스타가 먹고 싶(지만 식당에 가기는 귀찮아서_정확히는 조용히 혼자 있고 싶었다)어 소스와 면을 사와 요리를 해 먹었다. 그러다 함께 방을 쓰는 룸메와 오래 반가운 이야기를 나누다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 그리고 새벽에 눈이 떠져 투어 시작 2시간 전에 예약을 하고 주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다시 일을 하고 있는 지금. 아마도 이번 런던 여행에서도 나의 P 성향이 조금 더 올라가지 않을까 싶다. 가끔 생각한다. ENTJ인 내가 회사를 그만둔 뒤로 ISFP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고. 완전히 반대 성향이지 않은가. 아니다.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너무 완벽히 동경하는 성향에 나를 맞추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