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기쁜 젊은 날
4호선 수유역 2번 출구 스타벅스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날도 쾌청한 바람이 불었다. 우리가 헤어진 날처럼.
나는 은하를 처음 만났던 그날이 떠올랐다. 일본 라멘집 점장으로 근무할 때, 그녀는 이제 막 대학생이 된 풋풋한 얼굴로 면접을 보러 왔다. 일곱 번째 면접자였던 은하는, 내가 기대하지 않은 대답에 깜짝 놀라며 "감사합니다"를 연신 외쳤다. 그날은 몇십 년 만에 내린 폭설 때문에 다들 불평을 했지만, 은하는 "길이 너무 미끄러워서요"라며 빨갛게 시린 콧등을 보였다. 그 모습이 예의 바른 것보다는 솔직해서 고맙게 느껴졌다. 고작 3분 늦었을 뿐인데. 은하는 바쁜 라멘집에 금방 적응했고, 일을 무척 잘했다. 퇴근할 때마다 라멘을 먹고 가는 그녀를 보며, 종종 다른 음식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그저 '수고했어' 한 마디로 대신했다. 어색한 감정이 번지지 않도록 애써 거리를 유지했다.
한 번은 그녀가 물었다.
"점장님, 언제 퇴근하세요?"
그 질문이 어쩐지 오래 남았다.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그녀의 말투 속에 무엇인가 더 담겨 있었던 것 같았다. 집으로 가는 전철 속에서도 그 말이 맴돌았다. 그날, 그녀의 짐을 기숙사로 옮기는 날이었다. 무거운 짐을 들고 나서 은하는 말했다.
"이번 주 일요일에 밥 살게요."
그 말에 나는 머뭇거렸다. 은하와 나, 서른한 살과 스무 살의 어울림이 자연스러운가를 고민했다. 나이 차이가 부담스러웠지만, 그날 입을 옷을 벌써부터 고민하는 나를 보고 스스로가 우스웠다. 은하는 그저 고마워서였겠지만, 나는 벌써 그날을 상상하며 착각병에 빠져 있었다. 짐을 옮기고 헤어진 후, 집으로 가는 전철은 이미 끊겨 있었다. 차가운 북한산 자락의 밤바람 속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152번 버스를 기다렸다. 막차는 끊겼고, 택시도 잡히지 않았다. 나는 편의점에 들어가 가장 뜨거운 캔커피를 두 개 집어 들고 무작정 걸었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은하에게서 문자가 왔다.
"점장님, 잘 도착하셨어요? 저 때문에 많이 늦으셨죠?" 손이 얼어버릴 것 같았지만, 은하가 걱정할까 봐 답장을 보냈다. "괜찮아, 잘 도착했으니까. 걱정 말고 얼른 자." 그 문자를 보내고 나서도, 마음속 어딘가에서 미묘한 감정이 떠올랐다. 나와 그녀의 관계, 그 사이에 흐르는 이 애매한 감정이 뭐였을까. 그러나 한강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동대문까지 걸어왔으니 아직 멀었다. 그때 룸메이트에게서 문자가 왔다.
"어디야? 왜 안 와?"
"나? 충무로 근처야."
"미친놈, 이 새벽에 뭐 하는 거야! 기다려, 갈 테니까."
편의점은 도심 속의 알베르게 같았다. 잠시 충전을 맡기고 캔커피를 하나 더 마셨다.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이 웃고 있었다. ‘너 설마 일요일 데이트 생각에 신난 거야?’ 남자들의 착각병이 도지고 있었다. 마음이 따뜻해지면, 몸도 덜 시린 법이었다.
일요일, 은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점장님, 아빠 생신이라 본가에 가야 해요. 죄송해요." 괜찮다고 답장을 보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기대하고 있었던 그 작은 만남이, 마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것처럼 허전했다.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아쉬움이 가시지 않았다. 그 아쉬움은 맥주 캔 다섯 개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룸메이트는 나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대학생이 너 같은 아저씨랑 밥 먹는 게 두려운 거지. 네가 잡아먹을까 봐."
"아니야, 그런 거..."
말끝이 흐려졌다. 가볍게 웃으며 안주와 맥주를 더 사 왔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술에 취해 하얗게 질린 아저씨였다. 그런데 그때 알림이 떴다.
"점장님, 오늘 점심 약속 지키지 못해 정말 죄송해요."
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술이 더 당겼다. 룸메이트는 내 얼굴을 보며 물었다.
"뭐야, 술 사 오더니 얼굴이 좋아졌네?"
"추워서 그런 거야. 밖에서 하얗게 얼어버렸지."
실없는 말을 내뱉었지만, 그조차 우습게 들렸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맥주 아홉 캔을 마셨다. 술에 취한 룸메가 말했다.
"너 은하 좋아하지? 너 스타일이잖아."
"아니야, 그냥 밥 한 번 먹자고 한 거야."
"밥 먹는다고 좋아하는 게 아니야. 그냥 좋아하면 배부른 거지."
평소 말 없던 룸메는 술만 마시면 연애천재가 된다. 그는 항상 연애를 놓치는 남자였지만, 그날만큼은 그의 말이 이상하게 설득력 있어 보였다. 나는 그저 웃으며 말을 아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