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피랑 언덕길
라멘집을 시작한 이후 첫 휴가였다.
룸메이트와 시간이 맞지 않아 혼자서 떠나기로 했다. 8월 말 통영, 피서객들이 빠져나간 골목은 이제야 본래의 모습을 찾은 듯했다. 손님이 추천해 준 동피랑 벽화 마을에 올라 강구항을 내려다보니, 시원한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바다 너머로 부서지는 햇빛이 물 위에 얹힌 듯 반짝였고, 파도는 소리 없이 항구의 낡은 배들을 흔들고 있었다. 마치 내가 어릴 적 살던 해남과 같았다. 아홉 살 무렵 서울로 떠나오기 전, 그곳에서 보낸 시간들이 떠올랐다. 참 오랜만에 만나는 풍경. 나는 이 익숙하고도 낯선 바다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였다. 삼십 대 중반이 된 아저씨 혼자서 여행이라는 사실을 잊은 듯.
"저기, 실례합니다. 사진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뒤를 돌아보니 40대로 보이는 남녀였다. 남자는 테리어 로고가 박힌 흰색 카라 셔츠에 민트색 반바지 리조트 룩을, 여자는 크리스찬 디올 반팔 니트와 리바이스 하얀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두 사람의 차림새는 세련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배경에 자리한 강구항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그 순간이 그들만을 위한 것처럼 보여 나는 조용히 그 자리를 피해 주었다. 나는 동피랑 골목을 따라 걸었다. 골목에 새겨진 그림들은 화려했지만 내 마음에는 아무 감흥도 남기지 못했다. 그저 지나가는 것처럼, 서둘러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내리막길 구석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얼굴과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있었고, 숨을 고르며 초조한 눈빛으로 땅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를 도와줄지 그냥 지나칠지 잠시 고민했지만 도와주지 않기로 했다. 그때 한 남자가 뒤에서 다가오며 거칠게 소리쳤다.
"대체 어디에 흘린 거야."
여자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잃어버린 것 같아... 어떡해."
남자의 성난 말투에,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기로 마음먹었다. 무언가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린 듯했다. 남자는 계속해서 여자를 몰아세웠다.
"너 그게 얼마나 비싼 건 줄 알아?"
반지를 잃어버린 여자의 미안한 표정과 달리, 남자는 화를 내며 그 반지의 가격을 강조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 상황을 지켜보다가 문득 은하가 떠올랐다. 은하는 매달 14일마다 초콜릿을 주며 나를 위로해 주곤 했다. "점장님, 여자친구 없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힘내세요." 나는 그 말을 듣고, 9년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진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결혼까지 생각했지만 그녀 부모님의 반대가 있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헤어졌다. 그 긴 시간 동안 아프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그 상처는 깊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가격표가 없던 은하의 말들이 그 시간을 조금씩 치유해 주었을 것이다. 동피랑 입구에 다다르자 배수로에 끼어 있는 반지를 발견했다. 직감적으로 그들이 찾던 반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반지를 주워 오르막길을 뛰어올랐다. 그러나 남자는 이미 사라졌고, 여자는 그 자리에 홀로 울고 있었다. 무언가 말을 걸어야 할 것 같았지만, 그녀의 흐느낌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다음에 반지를 돌려주기로 하고 자리를 떠났다.
저녁이 되어 룸메이트에게 전화가 왔다.
그가 통영에 와 있다는 소식에 나도 깜짝 놀랐다. 핀란드 업체와의 미팅이 취소되면서 갑작스러운 휴가를 얻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함께 펜션으로 향했다. 펜션은 프라이빗하게 설계된 공간으로 다섯 팀만을 수용하는 곳이었다. 숙소는 화려한 조경과 자갈길, 은은하게 비치는 팬던트 조명으로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밤이 되자 바람은 더 시원해졌고 공기는 맑았다. 그날 밤, 로비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낮에 동피랑에서 본 젊은 여성이었다. 선글라스를 벗은 그녀의 얼굴은 더욱 정갈해 보였고 어려보였다. 조명 아래에서 피부는 부드럽고 매끄러워 보였다. 그녀의 입술은 짙게 붉은 빛을 띠며, 미소 짓는 얼굴에 어딘가 지적인 품격이 깃들어 있었다.
"다시 만나니 반가워요. 박현주입니다."
그녀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김지훈입니다. 직업은 셰프예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명함을 건넸다. 그녀의 손끝이 내 손가락을 살짝 스쳤을 때, 짧은 전율이 느껴졌다. 그 순간이 길게 이어질 것만 같았지만, 룸메가 다가와 내 명함을 대신 건넸다. "저는 김지훈 셰프의 로드 매니저 김성종입니다." 룸메는 내 매니저인 척하는 것을 즐겼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남자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남자는 나를 쳐다봤지만, 나를 기억하지 못한 듯 했다. 그들이 사라진 후, 나는 그녀의 명함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힐든 케이프 홀딩스 박현주 이사'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그녀는 나에게 묘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와의 짧은 만남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문득 은하가 준 작은 위로들이 떠올랐고, 그녀와의 지난 시간들이 마음속을 스쳐 지나갔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참을 고민하다가도 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날 밤, 룸메와 함께 밤바다를 보며 술을 마셨다. 통영의 바다는 깊고 고요했다. 밤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바닷물은 잔잔한 파도를 그리며 철썩였다. 사랑은, 그리고 그리움은, 이렇게 파도처럼 다가왔다가 이내 멀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리움이 사라질 때쯤, 또다시 한 줄기 파도가 내게 밀려올 것을 알기에, 나는 그저 조용히 기다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