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하 시인의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1. 낮은 곳으로 中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2.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새를 사랑한다는 말은
새장을 마련해
그 새를 붙들어 놓겠다는 뜻이 아니다.
하늘 높이 훨훨 날려 보내겠다는 뜻이다.
3. 사랑의 우화
내 사랑은 소나기였으나
당신의 사랑은 가랑비였습니다.
내 사랑은 폭풍이었으나
당신의 사랑은 산들바람이였습니다.
그땐 몰랐었지요,
한때의 소나긴 피하면 되나
가랑비는 피해 갈 수 없음을.
한때의 폭풍이야 비켜 가면 그뿐
산들바람은 비켜 갈 수 없음을.
4. 눈 오는 날
눈 오는 날엔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는 게 아니라
마음과 마음끼리 만난다.
그래서 눈 오는 날엔
사람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딴 데 가 있는 경우가 많다.
눈 오는 날엔 그래서
마음이 아픈 사람이 많다.
5. 판화
너를 새긴다.
더 팔 것도 없는 가슴이지만
시퍼렇게 날이 선 조각칼로
너를 새긴다.
너를 새기며,
날마다 나는 피 흘린다.
6. 욕심 中
삶은 나에게 일러 주었네.
나에게 없는 것을 욕심내기보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소중히 하고
감사히 여기라는 것을.
삶은 내게 또 일러 주었네.
갖고 있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기를.
그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다 보면
외려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7. 나무와 잎새
떨어지는 잎새에게
손 한 번 흔들어 주지 않았다.
나무는 아는 게다.
새로운 삶과 악수하자면
미련 없이 떨궈내야 하는 것도 있다는 것을.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길이었다'
- 나태주, 푸른 밤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