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을 따라 여의도 LG 쌍둥이 빌딩에 갔다. 로봇이 미래의 내 모습을 초상화로 그려주는 과학 체험을 했다. 연신내로 돌아와서 낙지대학 떡볶이과에서 떡볶이와 볶음밥을 먹었다. 얼마나 맛있었는지 ‘류두현’이라는 친구는 숟가락으로 눌어붙은 볶음밥을 바닥까지 박박 긁어 먹었다. 지금도 손에 꼽는, 초등학생 시절 행복했던 추억이다.
중학생 때는 학교에서 단체로 롯데월드에 갔다. 나는 무서운 놀이 기구 타는 걸 전혀 선호하지 않는다. 왜 사람들은 돈을 내고 자신을 고난에 빠트릴까? 난기류 때 비행기를 타거나 울릉도행 쾌속선을 타면 공짜로 스릴을 느낄 수 있는데. 어트랙션은 안 타고 집에 있던 필름 자동카메라를 가져가서 친구들 노는 걸 찍어줬다. 지금이야 휴대전화에도 카메라 기능이 있지만, 그때는 디카가 나오기 전이었다. 36장의 필름을 아껴서 한 장 한 장 소중하게 찍었다. 인화한 사진을 친구들에게 나눠줄 때는 정말 뿌듯했다. 사진을 받고 좋아하는 얼굴을 보는 게 좋았다. 그 이후로도 놀러 갈 때마다 사진 촬영을 도맡았다. 이 경험은 나중에 사진학과로 진학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놀이공원에 가는 건 어느 학교나 학사일정에 포함된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근무한 덕양중학교에서는 학교 차원에서 놀이동산을 안 갔다. 학생들이 제일 가고 싶은 데는 롯데월드, 에버랜든데. 그럼 내가 데리고 가지 뭐. 학생들이 돈이 어디 있나. 사비를 써서 사진부 학생들과 갔다.
디데이 몇 주 전부터 롯데월드 가면 뭘 타고 어떤 걸 하고 얼마나 재밌게 놀지 점심시간마다 모여서 작전회의(?)를 했다. “9시에 롯데월드 앞에서 모여요. 아침 든든하게 드시고 옷 따뜻하게 입고 오셔요.”
아침부터 서둘러서 8시 반쯤 잠실역 도착했다. 이미 롯데월드 입구는 전국에서 모여든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10시 문이 열리고 혜성특급을 향해 오픈런했다. 최저기온 영하 15도의 강추위였다. 살을 에는 바람에 오돌뼈처럼 오돌오돌 떨었다. 그래도 함께여서 마냥 춥지만은 않았다.
에버랜드에서 T 익스프레스를 탄 적이 있다. 몸은 가만히 있는데 내장만 하늘로 훅! 솟구치는 느낌. 평생 놀이공원에 몇 번 안 갔지만 그 후로 다시는 어트랙션을 타지 않았다. 이번에도 무서운 놀이 기구는 안 탈 예정이었다. 하지만 어디 인생이 계획대로 되던가?
“쌤! 뻥 안치고 진짜 하나도 안 무서워요!” 학생의 말을 믿고 순진하게 혜성특급을 탔다.
... 완전 개뻥이었다.
“하나도 안 무섭다며여여~”
어둠 속에서 위아래로 휘달리며 뱅글뱅글 도는 롤러코스터. 내 영혼은 휭~하고 안드로메다로 탈출했다. 나는 앞으로 혜성특급을 ‘지옥행 특급 열차’라고 부를 거다. 신밧드의 모험은 진짜로 안 무섭다고 해서 믿고 탔다. 분명히 예전에 타봤는데. 역시 사람은 기억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시작하자마자 두 번 떨어지는 것도 진짜 정말 무서웠다.
롯데월드 입장료부터 식사, 간식까지 전부 사비로 해결했다. 추위에 벌벌 떨며 13시간 고난의 행군을 마치고, 귀가 전 잠실역에서 따끈한 오뎅을 국물과 함께 한 꼬치씩 먹었다. 한 학급의 1년 학급운영비 이상의 돈을 하루 만에 호기롭게 썼다. 오마카세 한 번 덜 먹지 뭐. 차비를 아껴서 동료들에게 풀빵을 사줬다는 전태일 정신으로. 이게 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여의도에 데려가 준 담임쌤 덕분이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처럼 내가 받은 사랑을 그대로 학생들에게 돌려주고 싶다.
졸업 기념으로 두 번째로 사진부 학생들을 데리고 서울랜드에 갔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이라, 일요일이었지만 사람이 없었다. 전세 낸 거 같고 오히려 좋았다. 완전 럭키비키잖아. 코끼리열차로 시작해서 바이킹부터 롤러코스터까지. 물론 난 안 타고 밖에서 학생들 사진을 많이 찍어 줬다. 내 생일날이라고 사진부 학생들이 몰래 케이크를 준비해서 깜짝 생일파티까지 해줬다. ‘교원 자격증도 없는 내가 이렇게 학생들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루 종일 즐겁게 놀았다.
마크 트웨인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날을 꼽았다. ‘당신이 태어난 날’과 ‘왜 태어났는지를 알게 되는 날’. 2024년 1월 21일. 잊지 못할 39번째 생일날이었다. 학생들과 함께하는 사서교사가 되겠다고 굳게 다짐한 날이기도 했다.
“쌤은 왜 다른 쌤들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하세요?”
“… 재밌잖아요.”
무더운 여름날. 점심시간에 사진동아리 간식 산다고 다른 쌤들 몰래 학교 앞 편의점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요즘엔 학교에 매점도 없는데 이 정도 추억은 괜찮지 않을까?
놀이공원 가는 게 교육적인 의미가 없다고? 그럼 어때. 어차피 난 아직 교사도 아닌걸? 학생들이 좋아하면 장땡이지. iKON의 ‘사랑을 했다’ 가사처럼. “그거면 됐다. 살아가면서 가끔씩 떠오를 기억. 그 안에 내가 있다면 그거면 충분”하다.
가끔 5학년 때 여의도가 생각나는 것처럼, 롯데월드와 서울랜드를 갔던 날이 사진부 학생들의 추억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