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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디자이너

책의 얼굴, 디자인의 온도

by 행복의 진수

곽재식 작가님의 『삶에 지칠 때 작가가 버티는 법』에는, 내가 만든 『곽재식 단편선』의 탄생 비화가 실려 있다. 곽 작가님 특유의 맛깔스러운 필력으로 내가 한 표지 디자인을 “국립공원공단 같은 곳에서 지리산 반달곰들 체중을 기록해 제출하는 보고서 표지 같은 느낌”이라 표현했다. 그 한마디에 등줄기가 싸해졌다. 아, 뭔가 크게 잘못됐구나.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디자인은 단순한 겉 포장이 아니라, 독자에게 가장 먼저 다가가는 ‘책의 얼굴’이라는 것을. 다행히 『곽재식 단편선』은 듀나 게시판에서 훌륭한 디자이너님을 만나 멋진 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그 이후, 내 책을 처음 만들 때 디자이너를 물색했다. 그리고 친구의 소개로 아주 특별한 사람을 만나게 됐다. 내 마음속에서 디자이너님은 하나의 ‘버튼’ 같은 존재다.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스위치이자, 요청만 하면 ‘짜라란~’ 하고 마법처럼 결과물을 구현한다.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책의 의도와 분위기를 정확하게 읽어내고, 시각적으로 구현해 내는 능력. 처음에는 ‘어떻게 이렇게 잘하지?’ 놀랐고, 이제는 ‘이 사람 없이 책 못 만들겠다.’라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도널드 트럼프가 자랑하던 핵 버튼처럼 강력하고, 리처드 버튼처럼 다재다능하며, 팀 버튼처럼 자신만의 세계가 뚜렷한 디자이너. 그 버튼을 통해 우리 책은 언제나 아름답게 완성됐다.

나도 디자이너 버튼 있다

디자인을 부탁드릴 때마다 늘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왔다. 기한이 촉박할 때도, 내가 너무 추상적인 설명을 늘어놓았을 때도, 심지어 원고를 늦게 줬을 때조차도. 디자이너님은 수면시간을 줄여가며 새벽까지 묵묵히 최고의 결과물을 완성했다. 때로는 내가 책의 분위기를 설명한 것보다, 그분이 만들어낸 디자인이 책의 본질을 더 잘 표현했다. 나보다 우리 책을 더 잘 아는 것처럼.

『행복의 진수』 작업도 그랬다. 글보다는 사진이 중심이 되는 책이었기에 디자인의 힘이 더 중요했다.

이랬던 책 표지가 이렇게 변했습니다!

디자이너님은 각 주제에 어울리는 색감과 타이포그래피를 제안했다. “‘진수’ 글자가 웃는 모양으로 해주세요!”라는 요청은, 디자이너님의 마우스를 거쳐 생명력을 가진 제목으로 탄생했다.

수많은 습작 끝에 탄생한 글자체!

지금까지 나온 9종의 미니북 시리즈도, 책마다 서로 다른 결을 가진 표지를 완성해 냈다. 그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감각은 단순히 능력이 아니라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이 책은 어떤 사람에게 닿기를 원하는가?’를 고민하는 마음, ‘이 사진에는 어떤 느낌이 어울릴까?’를 생각하는 눈. 디자이너님에게는 그런 섬세한 시선이 있다.


디자이너님과 함께 작업하면서 처음으로 느꼈다. 디자인은 기술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 특히 덕양중 졸업앨범 작업이 그랬다. “작가님도 3년 추억을 마무리하는 앨범이니까, 저도 아쉽지 않게 도와드리고 싶어요.” 그 말을 듣고 순간 울컥했다. 단순히 사진만 모아놓는 게 아니라, 아이들의 학창 시절과 성장을 한 권의 책으로 담아내는 일.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학생들이 직접 디자인하고 구성한 표지와 내지, 반별로 다른 색감, 사진 배열의 순서까지. 그런 디자인 관심과 애정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러고 보면 내 책의 표지뿐 아니라, 덕양중 체육관 개관식 팸플렛, S Family의 로고와 명함까지 모두 디자이너님의 손을 거쳤다. 나는 단지 ‘가족, 출판, 연결’이라는 단어들을 드렸을 뿐인데, 그걸 '다정함과 꿈들이 차곡차곡 눈처럼 조용하게 쌓이는 느낌'으로 시각화해 줬다. 처음 그 시안을 봤을 때,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말보다 감탄이 앞섰던 순간이었다.


나는 운이 좋다. 우리 출판사와 디자이너님이 함께 한다는 건, 내가 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를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세상에 꺼내놓을 수 있다는 뜻이니까. 디자이너님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더디고 조심스럽게 책을 만들었을 거고, 수정을 훨씬 많이 반복하며 끝내 만족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확실히 안다. 좋은 디자이너를 만난 건, 우리 출판사의 운명을 바꿔준 일이라는 것을.


디자인이라는 건 결국 ‘관계’라고 생각한다. 디자이너와 의뢰인의 관계, 책과 독자의 관계, 문장과 이미지의 관계. 그 모든 것을 조율하고 이어주는 사람. 그 관계의 중심에 디자이너님이 있다. 내가 만든 책 중 어떤 것들은 내가 아이디어를 내서 좋아졌고, 어떤 것들은 디자이너님이 손길로 완성됐다.


이제는 내가 클라이언트로 디자인을 ‘의뢰’하는 게 아니라, 함께 작업하는 ‘동료’로 느낀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채고, 내가 놓친 부분을 채워주며, 책이 독자에게 더 잘 다가갈 수 있도록 길을 잡아주는 사람. 단순한 외주 작업이 아니라, 함께 만든 공동체적 결과물이다.


책을 만든다는 건 단지 종이 뭉치를 엮는 일이 아니다. 내용과 형식이 어울려야 하며, 그 분위기를 한 장의 표지가 드러내 줘야 한다. 그리고 그게 바로 디자인의 영역이다. 내 첫 디자이너이자, 계속해서 우리 책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존재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당신의 손끝을 통해, 우리 이야기들을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고 세상에 선보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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