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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꿈

행정실에서 학교도서관으로 한 걸음

by 행복의 진수
주호민 「무한동력」 中

“죽기 직전에... 못 먹은 밥이 생각나겠는가, 아니면 못 이룬 꿈이 생각나겠는가?”

주호민 작가의 「무한동력」에 나오는 대사. 물론 못 먹은 밥들도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가겠지만, 못 이룬 꿈이 선명하게 눈에 밟힐 것 같다.


대한민국의 여느 평범한 학생들처럼 별다른 꿈이 없었다. 성적과 취향에 맞춰 사진학과 진학을 했다. 운이 좋게 4년간 전액 장학금을 받았지만 그뿐이었다. 대학생 활의 낭만과 학점을 교환하고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었다. 어렸을 때부터 라디오 듣는 걸 좋아하는 ‘라디오 키드’라 한 때는 라디오 PD를 꿈꾸기도 했다. 뮤직비디오 감독과 영화 포스터 사진작가를 바랐던 적도 있다. 이런저런 현실적인 이유를 핑계로 ‘배운 게 도둑질’이라 공직에 있는 아빠와 친척들의 영향을 받아 공무원의 길을 걷게 됐다. 5년간의 수험기간을 거쳐 경기도교육청 교육행정직이 됐다. 지방교육행정서기보. 박봉에 연애도 못 하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살지만 만족했다. 영화 '올드 보이'의 오대수처럼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공무원으로서 복지부동하며 무사안일한 일상이었다.

그러던 중에 암 투병을 하고, 덕양중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게 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2021년 기준, 대장암 4기 남자의 관찰생존율은 18.3%. 심지어 15-34세군 조발생률은 남자 10만 명 중 7.3으로 우리나라에 470명, 30-34세 중엔 30명밖에 없는 희박한 확률을 뚫고(?) 암에 걸린 거다. 이를테면 ‘암 청년 급제’랄까? 이것도 얼리 어답터인가?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김영민 교수의 말처럼. 웹툰 「지옥」에서 “너는 몇 년 후에 죽는다.”라는 고지를 받은 정진수처럼. 날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 또 고민했다.


어쩐지 「죽기 전에 봐야 할 영화 1001」 같은 책들이 눈에 들어오더라니. 인생 영화도 시한부 사진사의 마지막을 다룬 ‘8월의 크리스마스’다. 삶의 끝자락에서 던지는 이루고 싶은 꿈과, 남기고 싶은 것들에 대한 질문이 와닿았다. 결론은 ‘어떻게 살 것인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거, 버킷리스트의 하나인 ‘책 쓰기’로 「행복의 진수」을 만들었다. 자식은커녕 결혼도 못 했는데 죽기 전에 이 세상에 뭐라도 남기는 심정으로. 내 보물, 내 삶의 이유인 조카들과 다시 꿈을 꾸게 해준 소중한 덕양중학교 학생들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책을 만들어보니 재미있어서 다른 지역 실장님의 책「오늘도 고행? 아니,교행」도 같이 만들었다. 내 꿈만큼 중요한, 타인의 꿈을 이루어주는 ‘드림 메이커’랄까? 꼬깜단 2기로 참여해서 사부작사부작 작은 책들을 만들고 있다. 해외 북페어에 나가보는 것도 목표였는데 꼬깜단의 일원으로 생애 첫 해외 여행도 가기도 했다. 역시 꿈☆은 이루어진다.


잊었던 꿈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생활기록부를 떼보니 고2때 까지 장래 희망이 ‘교사’였다.

심지어 사진학과 입학 후에도 네이버 지식인에 “도덕 교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남긴 적도 있다. 그래서인지 철학을 부전공했지만, 차마 교직 이수까진 생각 못했다. 그때 문헌정보를 복수전공하고 교직까지 들었으면 지금 이 고생을 안 할 텐데.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길지 않은 공직 생활이었지만 행정실에서만 있기엔 남은 시간이 너무 짧았다. 물론 교육행정직 공무원으로서의 삶도 의미 있지만, 학생들과 더욱 어울리고 지금과는 다른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30살이 넘어, 40이 가까운 나이가 돼서 학부 때도 안 들었던 계절학기까지 들으며 사서 자격증을 받기 위해 학점은행제를 듣고 있다. 1학기엔 동국대에서, 여름 계절학기는 명지전문대에서, 2학기는 숭의여대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라."라는 말처럼 사서교사가 되기 위해 초등학교 퇴근 후 다시 대학교로 등교하고 있다. 아프기 전에 그렸던 꿈은 60세에 정년퇴직하고 100살 넘게까지 건강히 작동하는 연금 기계였다. 지금도 큰 기조는 변하지 않았지만 이왕이면 사서교사가 되어 그 꿈을 이루고 싶다.


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한다. 그냥 ‘사서교사’가 아닌 ‘서사가 있는 사서교사가 되어 학생들과 함께 하고’ 싶다. 일반직 출신으로 사서 전문직 장학사를 거쳐 덕양중학교 공모 교장이 되는 꿈. 누군가는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비웃을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생각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나는 의미 있는 도전이다.


“자 이제 시작이야 내 꿈을 위한 여행” 포켓몬스터 오프닝곡처럼, 이 꿈의 여정 끝에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한번 즐겁게 가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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