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팠고, 고맙고, 살아 간다
‘내가? 지금?? 왜???’
대장암 2기 진단을 받았던 날부터 꽤 오랫동안 내 머릿속을 맴돈 의문들이었다. 초조하게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리던 날에도, 수많은 ‘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무한대로 증식해 갔다. 건강하게 잘 살아온 줄 알았는데, 술도 담배도 가까이하지 않았는데. 누군가는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통증이 내겐 암이었다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병이라는 건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그저 삶이 흘러가는 방식 중 하나라는 걸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처음엔 그게 너무 억울했다. 하필 내가, 젊은 나인데, 그것도 대장‘암’이라니!
그러면서도 ‘환자’라는 정체성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아주 조용히, 아주 느리게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항암 한 사이클을 마친 나에게 바다를 선물하기 위해 홀연히 버스와 비행기를 탔다. 투병이라는 이름의 치열한 전쟁터에서 버티기 위해, 비싸고 진귀한 음식들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그게 전부였다. 나를 위해, 아주 작고 소박한 것들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들은 병을 이기는 데 필요한 백신 같은 것들이었다. 직접 병을 고치진 못해도, 마음의 항체를 만들었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프다. 슬프지만 사실이다. 통증은 단순히 신체적인 고통에 그치지 않는다. 병원에서 듣는 한 마디 한 마디는 내 자아를 지우고 '환자'라는 존재로만 남게 했다. 그때 느끼는 외로움이란…. 참…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가족이 옆에 있어도, 친구와 통화를 해도, 누군가가 위로의 말을 건네줄 때도. 내 마음 안쪽은 공허하고, 씁쓸했다. 몸의 통증보다도, 마음의 고독함이 더 견디기 힘들 때가 많았다.
힘들었던 시기에 내 마음을 다독여준 건, 다름 아닌 사람의 손 편지였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희연 누나가 건넨 전복죽 한 그릇, 그리고 따뜻한 쪽지 한 장. 병문안 온 김현정 장학사님이 건네준 편지 한 장. 치료도, 약도 아닌 한 끼 식사와 종이 조각이었지만, 내 마음을 단단하게 받쳐주는 커다란 버팀목이 됐다.
큰일을 겪고 나면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진다. 예전의 나는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는 사람, 일 잘하는 사람, 어디서든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병을 겪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진짜 되고 싶었던 건, 그저 따뜻한 사람이었다는 걸. 말보다 마음이 먼저 가는 사람. 다름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타인과 자신에게 관대한 사람.
아픈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나는 조금은 느린 사람이 되었다. 달리는 대신 걷게 되었고, 참는 대신 말하게 되었다. 묻어두는 대신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지금도 완전히 회복된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회복 중인 사람일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아팠고, 그 아픔을 통과했고,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 아픔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다. ‘하필 왜 나일까?’라는 질문에 정답은 없지만 “나도 그랬어.”라고 공감해 줄 사람은 분명 있다는걸. 그리고 언젠가 그 아픔조차 당신을 단단하게 만드는 경험으로 남게 된다는 걸. 그 하루하루가 모여, 언젠가 당신만의 이야기가 된다는 걸.
오늘은 그 이야기에 한 줄을 덧붙이는 하루다. 그거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