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에서 시작된 소중한 인연
“태풍은 좋겠다. 진로도 정해져 있고.”
나 역시 반도에 흔한 꿈 없는 고등학생이었다.
“아버지, 저 사진학과 가겠습니다.”
“사진학과는 무슨!”
“4년 전액 장학금 준대요.”
“그래 사진 좋지! 잘 한번 해봐라.”
그나마 관심 있던 사진학과에 성적우수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졸업 때쯤, 대한민국의 평범한 대학생들처럼 취업 걱정을 하던 어느 날.
평소에 자주 듣던 얘기가 문득 떠올랐다.
“너는 그냥 공무원이나 해라”
그래서 됐다. 대한민국 9급 공무원이.
검찰사무직과 국가직 7급, 2관왕으로 합격한 기사가 남원 신문에 실리고 그걸로 엄마한테 프러포즈했던 아버지, 남원 보절 면사무소에서 간호직으로 계셨던 어머니, 세무고등학교 나와서 국세청에 들어갔지만, 도박에 빠져서 잘 다니던 철밥통을 제 발로 차버리고 나온 작은아버지, 농촌지도사였던 외삼촌, 서울시 공무원인 사촌 누나, 남원시청에 다니는 외사촌 누나,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주변에 다 나랏밥 먹는 사람들밖에 없다 보니 제 앞길도 뻔했다. 공시생으로 5년간 열렙해서 경기도지방교육행정직 9급에 합격했다.
첫 발령지는 ‘여주’
“(멀리 발령났다고) 그만두시면 안 돼요.”
인사 담당자가 간곡히 당부했다.
“그럼요~ (어떻게 붙은 시험인데) 열심히 다니겠습니다!”
친구들한테 ‘여주’라고 하니 돌아오는 반응은
“뭐? 여수?”
“아니... 경기도 여주...”
하긴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 촌놈인 나도 여주가 어디 있는지는 발령받고 처음 알게 됐다. 인구 10만의 소도시 낯선 여주에서의 일주일간 근무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금요일 저녁. 서울에 올라오니 고속터미널역에 사람이 너무나도 많았다. 지하철 한 칸에 있는 사람이 여주교육지원청 전체 직원 수보다 많았다. 30년 넘게 살았던 서울이지만 일주일 만에 여(주에 스)며든 걸 보니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 맞나보다.
발령받자마자 고속버스를 타고 여주로 무작정 달려갔다. 교육청 근처에 원룸을 계약하고 친구 차로 간소한 짐도 옮겼다. 의무소방원 군복무 시절을 제외하고는 첫 자취였다. 업무에 적응하고 직장 사람들과도 친해질 무렵. 배가 아파서 화장실을 갔는데 변기에서 피가 보였다. 동네 내과에 갔다가 내시경을 하고 조직검사를 했다. 검사 결과 대장암 2기 소견.
서른한 살의 나이에 대장암 진단을 받고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던 시기. 가족과 떨어져 여주에서 혼자 생활하던 시절. 인생에서 가장 절망적이었던 순간. 먼저 손 내밀어 주고 마음이 어수선한 때 곁에서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준, 내 마음속 평생 은인 두 분이 있다.
교육행정직 선배로 업무 요령부터 사회생활 비결까지 업무의 A to Z를 차근차근 친절하게 알려준 희연 누나. 수술 전에 먹고 힘내라고 남편에게도 안 해준 전복죽을 정성껏 끓여줬다. 심리상담사로 민주시민생활인권팀에서 동고동락한 동갑인 혜영 쌤. 발령 첫날 “오! 친구 왔네!” 하면서 반갑게 맞이해줄 때부터 친해질 거 같다는 강력한 예감을 받았다. 여주는 퇴근하고 갈 데가 이마트와 도서관밖에 없다. 그때마다 같이 밥도 먹고 혜영 쌤이 사는 원주로 놀러도 다니면서 크나큰 의지가 되어준 두 사람.
지금은 고양, 용인, 여주로 각자 근무하는 곳은 다르지만, 매달 5만 원씩 모아서 주말마다 – 땀나는 계절에는 애플망고빙수를 맛보러 ‘호텔 신라’로, 찬바람이 서늘할 땐 즉석떡볶이가 유명한 은광여고 앞 ‘작은공간’으로 -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고, 성수, 익선동, 가로수길, 도산공원, 롯데타워 등 핫하다는 데는 다 찾아다녔다. 화랑미술제, 영국 내셔널 갤러리 명화전 전시, 블록버스터 드라마 & 영화 음악 콘서트, 디즈니 인 콘서트 공연을 보며 문화생활도 함께 즐긴다. 여름에는 한강에 가서 피맥을 먹고 요트를 탔다. 힘들게 예매에 성공한 엘림동산에서 공동육아 체험도 해보며, 한 달에 한 번씩 재밌게 놀러 다니고 있다. 로또 1등 되면 해보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모셔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칸노 요코 음악과 영화 음악들을 콘서트로 듣는 거였다. 로또 4등 이상 당첨된 적은 없지만 단돈 4만 9천 원으로 - 제일 저렴한 시야 방해석이었지만 - 두 분과 나란히 롯데타워 콘서트홀에서 영화 음악 콘서트를 보며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했다. 역시 꿈☆은 이루어진다.
서은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에 나온 것처럼 ‘행복은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밥을 함께 먹는 것’이 아닐까? ‘내가 먹는 것이 바로 나(I am what I eat.)’라는 말처럼,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내 삶’이다. 첫 직장에서 건강상의 이유로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평생 고맙게 여길 소중한 인연을 만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