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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첫사랑이 생각나는 밤

by 행복의 진수 Jan 01. 2025

 『곽재식 단편선』은 내 첫사랑에게 주기 위해 만든 책이다. 어떤 시장은 서울도 봉헌했다는데, 내가 좋아하는 작가 책을 내 첫사랑에게 못 바칠쏘냐? 곽재식 작가의 초기 단편을 관통하는 주제는 ‘사랑’이다. 평범하지만 너드미가 넘치는 남자 주인공이 여자에게 고백하는 이야기. 곽재식 단편선 뒤에 실린 독자평을 써준 분과 곽 작가님이 결혼했다. 이것도 되게 곽재식답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녀는 내 영혼을 애틋한 심정의 저 드넓은 대양에 빠트려 버렸다. 아. 나는 그녀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곽재식 작가의 「사랑의 묘약」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사랑의 묘약을 만들어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려다가 ‘이게 무슨 짓이지?’ ‘약 빨고 한 사랑이 진짜 사랑인가?’하는 현타가 와서 주저하는 주인공. 왠지 연애도 책으로 배웠을 거 같은 곽재식 작가와 그런 너드미에 공감하는 나.


 의무소방원으로 근무할 때 모니터로 본 「월척」이라는 단편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꼭 이 작가님의 글을 책으로 만들겠어!’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텀블벅이나 크라우드 펀딩 개념도 없었던 2009년 작가님께 허락받고 초기 단편들을 모아 『곽재식 단편선』을 만들었다. 이 책을 위해 작가님이 「그녀를 만나다」라는 단편도 써주셨다. 「그녀를 만나다」가 실린 『곽재식 단편선』을 가지고 첫사랑 그녀를 만나러 갔다. 곽재식 작품은 보통 해피엔딩으로 끝나는데 내 이야기의 결말은 아니었다. 첫사랑 그녀는 어느 인디 뮤지션과 결혼을 했고 그 후로 나는 그녀의 인스타 팔로우를 끊었다. 그렇게 그녀는 가고 책 만들기를 시작한 나만 남았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2003년 대학교 새내기 시절. 싸이월드가 전성기고 네이트온과 MSN으로 소통하던 그때. 강의실 건너편에서 메롱을 하던 그 모습에 내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쳤다. 휘성의 노래처럼, 나를 향한 미소가 아니었는데 마치 내 맘 알아주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동기와 CC였다. 내 마음과 같던 노래들을 CD에 구워서 주기도 했는데 들어나 봤을지 모르겠다. 임창정의 <운명>도 그 CD에 내 심정과 같이 실었다.      


 권상우는 “사랑은 돌아오는 거야!”며 텅 빈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에서 부메랑을 던졌지만, 온 적도 없는 내 사랑이 돌아올 리는 만무했다.


 내가 생각해도 낮은 확률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 일어났다!

 고고스타를 보러 간 EBS 공감 공연. 거기에서 운명처럼 졸업 후 7년 만에 그녀와 재회했다. 서로 홍대 음악을 좋아하던 터라 이야기도 제법 통했고 몇 번의 만남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 내가 좋다며 들려준 곡은 하필 다윗의 막장의 <세상에 너를 좋아하는 여자는 없다>. 이 무슨 자기 고백적, 아니 스티그마 효과를 가진 자기 파괴적인 노래던가. 어쩌면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처럼 멀지 않은 날의 파멸적 미래를 예언하는 장송곡이었을지도 모른다.     


 정녕 엄마 말고는 나를 좋아하는 여자는 없었던 걸까?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갔던 삼청동에서 우연히 만났던 다른 동기가 신경 쓰였던 걸까? 그 새끼한테 말을 걸지 않고 모른 척 그냥 지나쳤어야 되는데.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게 그렇게 좋았고 자랑하고 싶었나 보다. 그때의 나는. 그날 먹었던 쉬림프 크림 스파게티에서 그녀가 까줬던 새우의 맛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으로.

 초등학교 때 나에게 고백했던 여학생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리즈시절이고 모테키였다. 근데 이 철없는 초딩 소진수 새끼는 ‘설레발은 필패’라는 걸 알기에는 너무나 어린 나이였다.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고 있었더라면…. ‘나 고백받았다’라고 동네방네 온갖 군데 다 소문을 내고 다녔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 여학생은 고백을 철회했다.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되는데요. 그렇게 삼일천하도 아닌 3시간짜리 촌극은 어처구니없이 마무리됐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 전인지 후인지 초딩 때 내게 고백해서 사귀었던 K라는 친구도 있었다. 40대 넘어서 첫사랑 얘기해 달라고 하면 “그런 게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는 말을 듣고 ‘에바 쎄바 참치 꽁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 K와의 일들이 실제로 있었는지, 아니면 어느 날 꿨던 아련했던 꿈의 편린인지. 그때 주고받았던 편지를 확인하지 않으면 기억을 확신할 수 없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사람은 기억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내가 사랑했던, 나를 사랑했던 그녀들 모두 결혼해서 애도 낳고 잘살고 있겠지? 물론 그중에서 나를 가장 사랑했던 우리 엄마 안병임 여사도 저 방에서 아빠와 곤히 잠자고 있다. 첫사랑이 생각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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