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대다 보니 나 되었다
울산의 한 남자고등학교로 강연하러 간 적이 있다.
입구에서 담당 선생님을 만났고,
교장 선생님께 인사드리기 위해 담당 선생님과 함께 교장실로 갔다.
교장 선생님은 대화 중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우리 아이들이 집중력이 좀 안 좋을 겁니다.
그래도 재밌는 강연은 잘 들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이 말은 학교에 강연하러 갈 때마다 교장 선생님께 들었던 말로,
강연에는 나름의 자신이 있었기에 “재밌게 잘해보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시간이 다 되어 강연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연장의 도착했을 때 하나씩 사건이 터지기 시작했다.
학교로 미리 보내준 PPT 자료는 강연 때 쓸 컴퓨터에 옮겨져 있지 않았다.
다행히 노트북을 챙겨 와서 PPT 자료는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USB를 가지고 오지 않았기에
급하게 담당 선생님께서 USB를 가지고 와주셨고,
그 USB에 PPT 자료를 옮겨서 사용해야 할 컴퓨터로 PPT를 옮겼다.
이제 문제가 해결되었을까?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더 큰 사건이 터져버렸다.
그건 바로 컴퓨터에 파워포인트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
내 노트북과 빔프로젝터를 연결하고 싶었지만,
연결하는 선이 달라서 연결도 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히터가 켜진 따뜻한 강연장에서 강연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1학년 전교생 중 50% 이상은 이미 깊은 수면 상태에 빠져있었다.
잠이 들지 않고 깨어 있던 학생 하나가
“오늘 강연 언제 시작해요? 망한 거 같은데?”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급하게 연결되는 노트북을 가지고 왔다.
다행히(?) 그 노트북은 PPT도 잘 켜졌고, 빔프로젝터랑도 연결이 잘되었다.
심호흡 한 번 할 여유도 없이 무대로 올라갔고,
마이크를 잡고 내 소개를 시작했다.
마이크가 안 나오는 것일까?
아니다. 분명 스피커를 통해 내 목소리는 강연장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정말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혼자 있을 때 보다 더 고요해서
정말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혼자 있는 듯했다.
내가 느꼈던 고요함 중에서 최고의 고요함이었다.
아무리 혼자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도
실제로는 혼자가 아니었으니 정신을 겨우 부여잡고 강연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저는 8권의 책을 쓴 작가이기도 합니다.”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는 아니었지만, 이 멘트를 던지면
100% ‘우와’ 하는 반응과 커진 눈동자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날은 이것마저 허락해주지 않았다.
‘어쩔’이라는 반응이라고 보여줬다면 오히려 감사했을 것이다.
학생들은 어떤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정말 멘붕이었다.
10년 넘게 강연하면서 거의 처음 느껴보는 상황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강연 중 김창옥 교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중학교 남자애들은 진짜 제일 (강연) 하기 어렵죠.
일단 표정이 별로예요.
이게 강연자가 (서면 입을 버리고 관심 없음을 표현한다.)
그리고 자기들이 이렇게 한다는 걸 보여주면 웃더라고요.
저한테 대개 "재미없네 " 이렇게는 안 하죠.
옆에 친구한테 저 들으라고 “나이 먹고 고생한다.”
저 들으라고 크게"
‘김창옥 교수님! 그래도 중학생들은 반응이라도 해주잖아요!
남고는 진짜 벽 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라고 속으로 외쳤다.
어렵지만 다시 멘탈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왕 벽 보고 이야기하는 거, ‘나라도 나의 이야기에 집중하자’라는 마음을 먹었다.
처음으로 무대에서 청중을 위한 강연이 아닌
나를 위한 강연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리고 다시 학생들을 바라보기 시작하자,
표현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 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을 바라보며 1:1로 대화하듯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살짝 고개를 돌려 다른 학생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듣는 학생이 또 있었구나!’
그렇게 천천히 고개를 조금 더 돌려보니
수백 개의 눈동자 반짝거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그 눈빛 속에는 ‘나도 나대고 싶어요. 나도 나답게 살고 싶어요’라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김창옥 교수님이 말하길
“50대가 넘으면 그때는 소리도 내주세요.
‘제가 뭐 그런 거죠’ 하면, 아하~ 아하~(온몸으로 든든한 리액션을 해준다)
그러면 그때는 작두 타듯이 잘 돼요.”
강연을 해봤다면 100%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때는 뮤지컬 배우가 된 듯 무대 위에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청소년들도 50대들처럼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지 않았을까?
50대처럼 마음껏 자신의 강점을 표출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성적이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다른 친구들과 비교당하게 되면서
자신을 초라하게 바라보게 되었을 것이고,
초라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걸 부끄럽게 생각하게 된 게 아닐까?
내가 이때까지 했던 강연을 돌아보면,
나도 청중들이 ‘우와’ 해주는 반응에 신나서 강연이 잘 되었던 게 아닐까?
그랬기에 아무런 반응이 없는 모습에 멘붕이 왔다고 본다.
남고의 친구들을 통해 내가 깨달은 사실은
나의 수식어가 나를 빛내주는 게 아니었다는 것,
나라는 존재로 세상이 만들어 준 수식어가 빛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을 바꾸니, 오히려 반응과 상관없이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결과, 강연은 망했을까?
강연 후 많은 남학생이 찾아왔고, 친구들 앞에서는 부끄러워서 차마 하지 못했던,
질문들을 나에게 던지기 시작했고
그 질문에 답을 해주다 보니 20분이 넘는 시간이 소요됐다.
성적과 직업에 자신을 맞추지 않을 것.
집중했던 일이 아니라, 몰입했던 일을 생각해 볼걸.
노래는 잘한다면 가수라는 직업만 생각하지 말고,
노래에 어떤 부분이 좋은지 파악해서, 다양하게 접근해 볼 것.
그래서 노래를 통해 가수가 될 수 있지만, 작곡가, 작사가, 음향감독, 뮤지컬 배우,
음악 평론가, 유튜버 등 자신의 성향에 맞는 방향을 선택할 것.
그리고 이 질문을 타인에게 하지 않고, 하루 중 시간을 내어 자신에게 물어볼 것!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