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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의 유골함을 껴안고 맞선을 본 여인

독립운동가 이병희를 기억하며

by 꼬마거인 Mar 01. 2025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_이육사, 광야



본명 이원록 대신
형무소에서의 수감번호 264로 불리길 택하고
필명에 도륙할 육(戮)을 새겼던 사람.

의열단에 입단하여
무장투쟁을 위한 폭탄 제조 훈련을 받고
조선독립군의 무기 밀반입을 시도했던 사람.

39년의 짧은 생애 동안 17번의 옥살이를 거쳐
끝내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사람.

퇴계 이황의 14대손.


이육사.

그는 시인이기 전에 투사였다.

그리고 그가 남긴 유작
청포도와 광야 뒤에는 한 여인이 있었다.

3.1 절을 기념하여
내게 깊은 인상으로 남았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짧게 남긴다.
(해당 글에는 화자의 주관이 개입되었음을 밝힙니다.)


이육사 시인의 6형제는
청년시절부터 모두 독립운동에 관여하여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1942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넘어간 그는
의열단에 가입해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1943년 일본의 도발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

변절과 합리화의 시대였다.

친일을 거부하던 이름난 문인들까지도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전쟁의 당위성을 선동하던 때였다.

하지만 그에게 타협은 없었다.
옳다고 믿는 신념을 끝까지 지키며 항일 투쟁을 계속한다.

그러나 이듬해 모친과 맏형의 제사 참석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경성에서 일제에 체포되어 북경으로 이송된다.

"옥비야 아버지 다녀오마."

용수를 쓰고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던 모습이
그의 어린 딸이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북경의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 투옥된 그는
그곳에서 익숙한 얼굴을 만나게 된다.

그의 이름은 이병희.
그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의열단 동지였다.



이병희는 1918년,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이원식은 만주에 동창학교를 설립하여
항일동립운동을 이끈 민족운동 1세대였다.

아버지 이경식은 대구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암살단 단원으로 활동하였고,
대구 조선은행 폭탄투척 의거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뒤,
만주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그 외에도 큰아버지 이원근, 조카 이효정 역시 독립운동가였다.

그의 또 다른 친척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는데,
그가 바로 이육사였다.

이병희와 이육사는 같은 진성이 씨 10촌 친척이었다.

진성이 씨 문중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로 인해 가문 자체가 와해되거나 멸절한 경우도 많았다.
당시 진성이 씨 종가가 일제 헌병에 의해 불타버리기도 했다.

안동시가 전국 시군 단위에서 가장 많은, 수백의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진성이 씨가 있었다.

그들의 집안에는 독립투사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라를 팔아먹으면은
대대로 우리 집안에 역적이 된다.

우리 집안의 구호가 뭔지 알어?
‘죽으면 너만 죽어라’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너를 매장시키겠다'

우리는 후회 안 해. 왜 후회가 없느냐,
제 국민 즈희나라 찾자는 게 국민이지,
나라가 읍는 백성이 그거 산다고 헐 게 뭐 있어?

우리는 어떻게 똑똑질 못해서
제대로 못했다는 거 뿐이지.
그거 후회허면 못해.

암만 아픈 거 생각혀도
...그 병이 들어노면 못 고쳐.

_여성신문, 이병희 선생 인터뷰 중




그런 집안의 가르침은 이병희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자랐다.

일제는 그의 집안을 불순분자로 여기고 감시했고
그의 어머니는 우울증에 걸려 실어증을 앓았다.

그는 15살에 동덕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여상에 입학한다.

그러나 한 살이라도 더 나이 먹기 전에 일제와 직접 싸워야 한다는 집안 어른들의 말에
1년 만에 학교를 자퇴하고
방직공장(실을 제조함)에 여공으로 위장취업한다.

그가 들어간 공장, 종연방적주식회사는
일제의 미쓰라 기업의 계열사로,
여공들은 저임금과 장시간의 노동에 고통받고 있었다.

그는 1936년 열여섯의 나이에 여공 500여 명을 규합해
노동자 조직을 결성하고 노동 운동을 전개했다.

그 일로 체포된 그는 일본 정부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된다.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하지만 그 후에도 삿포로 맥주, 기린 맥주회사 등

여러 공장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하며 여러 번 체포 및 고문을 받았다.


노동운동에 함께했던 그의 조카 이효정과 같이

성고문을 포함한 각종 고문을 받았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이들의 묵비권 행사로 수사에 진척이 없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이병희는 후에,

자궁에 쇠꼬챙이를 넣는 고문을 받았을 때는

"차라리 죽여달라고 했을 정도로 참혹하고 참아내기 힘든 고통이었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2년 4개월 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그의 어머니는 그가 투옥 중일 때 돌아가신다.

1939년 출소한 그는 이듬해 북경으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이육사를 만난다.


이병희는 의열단에 가입하여

단원들에게 문서를 전달하는 연락책과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943년 9월 무기 밀반입을 계획하던 중

밀고로 체포되어 일본총영사관 감옥에 투옥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육사를 다시 만난다.


이육사는 그에게

"너는 목숨을 건져 더 큰 일을 도모해야 한다"

라며 위장 결혼을 통해 출옥하라고 그녀를 설득한다.


그는 이육사의 보증으로

'결혼 후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

는 조건 하에 풀려난다.


그가 풀려나고 5일이 지난 1944년 1월 16일,

이육사가 옥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감옥으로 달려갔다.

당시 일제는 고문했다는 사실을 덮기 위해 시신을 훼손하는 일이 많았고

그걸 막고자 그는 서둘러 그의 시신을 수습한다.


그리고 후에 그는

이육사 시인이 고문받았음을 증언하는 유일한 증인이 된다.




지하실에서 관을, 떡 뚜껑을 여니 깐 인제 얼굴이 새파래지면서 하--얘지더니,
코에서 뭐, 핏물이 촤르--륵 쏟아지대, 죽은 사람이.
그래 ‘뒷일은 내가 다 처리할게, 눈감고 곱게 가’이래 놓고, 신발두 없어, 안경두 없고,
있는 거라고는 그- 시집 한 권 빽에는 없어,
그리고 만년필 한 개하고, 그걸 날(나한테) 내주더라고.




이때 그가 수습한 이육사의 유품은
그가 감옥에서 마분지에 써내려간 시,
청포도와 광야였다.

그는 이육사의 유골함을 품에 안은 채
맞선을 본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의 결혼식이 있던 날에는
이육사의 유해를 조국으로 보낼 절차를 밟느라
파혼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그는 이육사의 유해를 그의 가족들에게 전할 때까지 유골함을 품에서 놓지 않았다.

이육사 시인은 1938년 조선일보에
'계절의 오행'이란 글을 한 편 기고한 적이 있다.


...
유언이라는 것을 쓴다는 것은
팔십을 살고도 가을을 경험하지 못한 속배들이 하는 일이오.
그래서 나는 이 가을에도 아예 유언을 쓰려고 하지 않소.
다만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_이육사, 계절의 오행 중



이 글은 이육사의 유언 아닌 유언이 되었다.
39년의 생애 동안 17번의 투옥을 했으니
그의 삶은 그가 말한 대로 행동의 연속이었다.

후에 그의 형제들은 이육사의 유작을 모아 시집을 낸다.
그리고 그 시집의 발문에 이런 글을 남긴다.


...
그가 이 세상을 왔다 간 자취라도 남겨보려 하니
실로 그 자취는 자욱 자욱이 피가 고일만큼
신산하고 불행한 것이었다.

_이원조, 이육사 시집 발문 중



이후 이병희는 그의 남편과 함께
몽골 등지에서 생활하다
해방 이후 월남하였다.

그는 광복 후에도
자식에게까지 자신의 독립운동 사실을 숨겼다.

그 까닭은 그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이다.

반공을 이념으로 삼았던 당시의 대한민국에서
그가 청춘을 바쳤던 독립운동은 철저히 숨겨야 할 과거였다.

그와 함께 노동운동을 펼쳤던 친척 이효정은 한국 정부에서 고문을 받았고 또 다른 친척은 총살당했다.

1996년에서야 그는 건국훈장을 받았고
2012년 사망 후 현충원에 이장된다.


이윤옥 시인은 그를 기리는 시를 지었다.



지금은 공부보다 나라 위해 일을 하라
아버지 말씀 따라 일본인 방적공장 들어가서
오백 명 종업원 일깨운 항일투쟁의 길
감옥을 안방처럼 드나들 때
고춧가루 코에 넣고
전기로 지져대어 살 태우던 천형(天刑)의 세월

잡혀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만 죽어라
동지를 팔아먹지 마라 결코 팔아먹지 마라
혼절 속에 들려오던 아버님 말씀 새기던 나날

먼데 불빛처럼 들려오는 첫 닭 우는 소리를
어찌 육사 혼자 들었으랴.

_이윤옥, 이육사 시신을 거두며 맹세한 독립의 불꽃 이병희






이육사가 남긴 청포도와 광야 뒤에는 한 여인이 있었다.

역사에 가려진 한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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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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