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뻔펀한 홍사장 Jul 21. 2024

너에게 나를 보낸다

(과거로 띄우는 편지)

<2015년 10월 8일 목요일의 나에게,

2024년 7월 18일 목요일의 내가 보내는 편지>


힘든 오전이었지?


넌 두렵고 서글프고 황망하며 분노도 치밀었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고, 사람들 얼굴은 어떻게 볼까, 출근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지?

부모에게 상의를 했어야 하나 머리도 지끈거리고, k-장녀 컴플렉스 견고한 너는 동생들을 생각하며 미안한 마음이 올라왔을 거야.

아린 가슴을 쓰다듬으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갔겠지. 분명해, 내가 이미 봤으니까.


입맛도 없고, 잠도 제대로 들 수 없는 그런 시간을 한 달 가까이 갖게 돼. 결국 11월의 어느 날, 출근하는 아침에 이불 위에 쓰러져 심한 이석증을 경험하게 되지.

그렇게 또 한 달여를 고생하게 될 거야. 괜찮아, 큰 병 아니다. 잘 먹고, 많이 자면 쉬이 사그라지는 정도였으니.


아득히 어두운 동굴 안에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지?

그 기분 잘 알지. 더듬더듬 다른 감각들을 이용해서 길을 찾으려고 해도 끝이 보이지 않아 힘들었을 거야.

근데, 멈추거나 포기하면 결코 빛을 찾을 수 없어. 그저 매일을 살고, 시시한 시간을 보내고, 밥 먹고, 잠자고, 똥 싸고 하다 보면 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가 있더라고.


마음 나눴던 사람들의 비난으로 몇 번이고 심장을 부여잡았을 거야.

근데 있잖아, 소수의 사람들 때문에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위로와 온기와 돌봄으로 네 일상을 감싸줄 테니.

기꺼이 자신들의 상처와 흉터를 꺼내 보여주면서 ‘괜찮다’, ‘다시 살아갈 수 있어’라고 따뜻하게 얘기해 줄 거야.


앞서의 잔소리는 여기까지.

너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부터야.


1983년도에 태어나 2022년에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하는 허준이 교수님이란 분이 계시거든.

그분이 국민 mc 유재석 씨가 진행하는(2018년부터 시작될) 프로그램에서 인터뷰한 내용의 일부를 지금쯤, 집에 누워 있을 오후의 너에게 꼭 전해주고 싶다(2024. 6. 19 방영분).


(유재석)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허준이) “(…)어느 정도 자신의 직관을 믿어주고, 일단 잘해야 된다는 생각을 안 하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좀 순수한 마음으로요.
뭐든지 그렇잖아요. 잘해야 된다는 생각이 모든 걸 망치는 것 같아요.

시행착오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그 시행착오라는 게 사실은 정말 중요한 한 단계였는지, 아니면 내가 여기를 가는데 불필요한 과정이었는지 그것을 그 당시에 판단하는 건 너무 섣부른 일이거든요.

지금 겪고 계시는 시행착오가 사실은 시행착오가 아니라 나중에 굉장히 멋진 곳에 가기 위한 중요한 단계일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시행착오… 알지 넌? 골똘히 생각하기 전에 국어사전을 먼저 찾아보곤 하는 습관.

이번에도 찾아봤어.

* 시행 + 착오: (…) 학습자가 목표에 도달하는 확실한 방법을 모르는 채 본능, 습관 따위에 의하여 시행과 착오를 되풀이하다가 우연히 성공한 동작을 계속함으로써 점차 시간을 절약하여 목표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는 원리

라고 하네.


그렇게 생각하기 매우 힘들 걸 알지만, 지나간 네 선택이 헛된 시행착오가 아니었다고 여겨줬으면 좋겠어.

허교수님의 ‘나중에 굉장히 멋진 곳에 가기 위한 중요한 단계일 수도 있다’는 말이… 네게 손바닥만 한 비구름처럼, 조그만 용기와 조그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네겐 정말 작은 조각의 힘도 소중한 시기잖아.


십여 년 가까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니 정말 그래.

일상은 시행 → 착오 → 또 시행 → 또 착오 → 또 넘어짐 → 다시 일어남…, 이렇게 수많은 시행+착오의 과정이더라구. 그 일상이 모여 일생이 되어가는 거고.


집도 직장도 한동안은 엉망진창이겠지만, 너는 다시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무언가를 시작하고 도전하게 될 거야.

용기를 내서 열린 문으로 들어가면, 동굴이 아닌 터널을 지나온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 거야.


일상이 무너져도, 일생은 흐르더라.


그러니 오늘의 나야. 사변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 믿어봐, 십 년 더 살아보고 하는 얘기니까 믿어도 되겠지?

착오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해 보고, 실행해 보고 그렇게 살아도 돼.


새로운 기회와 새로운 만남과 새로운 시공간이 너를 기다리고 있어. 기대해도 좋아.

너 혼밥 좋아하잖아. 맛난 곳 찾아서 오늘 저녁도 챙겨 먹고 tv보다 뒹굴며 잠도 좀 자고 그래.


더 하고 싶은 시시콜콜한 잔소리, 미리 귀띔해 주면 놀랄 이야기가 많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쓸게.


하지만…, 이 편지는 보내지 않을 반전.

타임캡슐처럼 2024년 7월 18일까지 봉해두려 해.


마치 예언을 미리 들은 자가 미래에 대한 나태함에 빠져, 예언보다 못한 삶으로 전락해 버리는 구약의 백성처럼 되지 않길 바라기에.

나의 힘으로 해결했다고 한없이 높아지거나, 참회를 모르는 자가 되지 않기 원하니까.


더 많은 시행 → 착오 → 또 시행 → 또 착오 → 또 넘어짐 → 다시 일어남을 온몸으로 뒹굴어 봐야 하는 너인 걸 알기에 이런 수를 써 봤어.

매콤하고 알싸한 맛 좀 더 보게 될 거야. 타임캡슐인 거, 지금 미리 사과할게.

그래야, 그나마, 그 정도라도 겸허해지고 스스로의 모습과 존재를 인정할 수 있게 될 거거든. 그 시간, 네게 꼭 필요함을 알아주면 좋겠다.


네가 더 밝아지고, 당당해지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도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길 바라.

사랑해, 나 자신.

‘사.랑.해.’라고 타이핑하는 이 순간, 예고 없이 눈물이 핑 고인다.

이 말을, 오늘의 너에게(그때의 나에게) 해 주고 싶었던 건 가봐.


“사랑해, sb야. 지금 그대로도 괜찮아.”


매거진의 이전글 오래 한 생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