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명상
1.
우리는 무수한 분기 위를 살아간다
이거와 저거 중에 뭐 하지? 라는 의사결정의 분기, 그래서 하기로 한 '이거'를 얼마나 할지, 계속 할지 멈출지 고민하는 분기.
어떤 일을 하고 난 결과를 가지고 그 결과를 해석 가능한 다양한 방향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도 하나의 분기
그러다보면 그 분기들이 켜켜이 쌓이게 되고, 만약 각 분기에서의 선택지를 2개로만 놓는다고 쳐도 분기들의 조합 결과 발생하는 경우의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2의 n제곱)
2.
분기의 단위는 크게크게 볼 수도 있지만, 쪼개고 보면 얼마든지 작게 쪼갤수도 있다. 매분 매초를 하나의 분기로 생각하면(앞을 볼까? 옆을 볼까? 숨을 좀 크게 쉴까? 어깨를 한번 움직일까? 지금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한번 들어볼까?) 하루 동안 우리가 경험하는 매 분의 분기의 경우의 수는 2의 18(깨있는 시간)*60(분) 제곱이다.
사실 매일 매일의 의사결정 횟수를 2(혹은 3 혹은 4)의 1080승 개 라고 생각하면 이 말이 가지는 무게로부터 어마어마한 압박감 혹은 무력감이 느껴진다.. 그걸 다 챙기고 살라고? 그게 가능하기나 할까..?
3.
그래서 우리는 보통 이런 의사결정의 대부분을 무시(오토파일럿)하고 살고 있다. 그렇게 무시하고 살지 않으면 우리는 신경쇠약에 걸리고 말 것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면, 결국 우리는 무수한 분기와 오토파일럿 사이의 적당한 선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셀수도 없는 분초가 함께하니 소중함도 모르고 낭비해서도 안되고, 각분 각초에 집착하고 강박해서도 안되니 그 중간 어딘가 에서 자리를 잡고 앉지 않아야겠느냐 말이다.
4.
그런데 아마 내 예상이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무수한 분기 보다는 오토파일럿 쪽에 기울어져 있지 않나 싶다. 우리의 뇌는 무시와 망각, 자동화를 잘 하게끔 진화되어왔다는 것이 인지심리학에서 밝혀지기도 했고 말이다.
그 말은, <사람들이여, 좀 깰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내가 지금 어떤 순간에 있는지,지금 이 순간이라는 분기에 무슨 선택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 선택이 정말 작은 선택(아이고 다리 저려, 다리를 좀 움직여 볼까)이라도 그 선택을 좀 의식해보는 연습을 해 보자.
명상? 별거 아니다. 매 순간 의식적 주의를 기울이려는 것이고, 의식적 주의가 잘 기울여지지 않으면 더 잘 기울이려고 연습하는 것이다.
5.
버스를 타고 퇴근할 때면, 나는 크게 4가지 선택지에 놓이게 된다. 잠을 자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전자책을 보거나.
보통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유튜브를 보게 된다. 버스에서 내라고 나서야 뒤늦게 의식이 살아나며 '아, 전자책 볼걸 / 음악 들을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오늘은 갑자기, 브런치에 글을 쓴다는 선택을 해 보았다.
사실 엄연히 말하면 갑자기는 아니다. 출퇴근 길에 브런치 글을 쓰겠다는 로망은 사실 올해 초에 출퇴근 거리가 길어지면서 마음먹었던 것인데, 와. 그게 실제로 행동으로 이뤄지기까지 거진 1년이 걸렸다.
일년 동안의 매일 두번의 출퇴근길에서 발생했던 오분의 일 이라는 많은 분기동안 후회하는 결정을 남기며 말이다.
이렇게 순간을 챙기지 않으면 시간이 너무 빠르고 아쉽게 지나가 버린다. 오늘은 그 말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