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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사리 Dec 01. 2022

허리 잘린 플라타너스

타지에 심어진 인생


 그곳에 살아야 해서 살았고, 그 일을 해야 해서 했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학창 시절쯤인가. 학교에서는 알 수 없는 용어로 알기 힘든 지식을 가르쳤다. 얼뚱 멀뚱하다가 시험을 보면 시험을 잘 보는 사람은 칭찬받고 못 보면 혼나는 분위기에서 그냥 열심히 외우고 또 외웠다. 그러다 대학교에 가야 한다고 해서 대학교에 갔고 대학교에서는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졸업했다. 사회에 나오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적당히 말귀를 알아들으면 할 수 있고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찾아다녔다. 이유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 달맞이꽃이 홀로 밤에 피는 건 화려하지도 않고 매혹적인 향도 없는 꽃으로 장미 같은 경쟁자들을 이길 수, 아니 그냥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인 것처럼.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찾아 생판 모르는 곳에 방을 구했다. 살고 싶은 곳은 선택할 여유도, 특별한 기술도 없었기에 나를 써주겠다는 곳을 찾아갔다. 다행히 밥 한 끼 사 먹고 가끔 고향에 다녀올 정도는 됐다. 원래 크게 욕심이 없었던지라 풍족하지는 않아도 지낼만했다.


  그러다 몸을 다쳤다. 원래 건강한 몸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쉽게 몸이 무너질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말 그대로 몸이 주저앉았다. 한쪽 다리의 감각이 무뎌지면서 먼지 가득한 바지를 움켜쥐고 질질 끌며 집으로 돌아왔다. 한 시간 반은 걸리는 거리를 버스를 갈아타며 아프다는 생각보다는 이제 나는 뭘 하며 살아남아야 하나 걱정했다. 아니 걱정을 넘어서니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생각했다. 어릴 적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사랑해준 가족들을 떠나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다 고꾸라진 내 모습이 불쌍해서 밤새 절절거리는 몸뚱이를 붙잡고 울었다.


  회사? 라기엔 너무 작은 직장에서도 이제 그만 나와도 좋겠다고 얘기했다. 퇴직금 같은 위로금을 좀 주겠다고 했다. 싸울 힘도 없었지만 싸운 들 내가 갑자기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기에 알겠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수술을 권했지만 통증이 좀 가시고 그냥 퇴원했다. 돈도 돈이지만 수술이 무서웠다. 수술대에 누우면 정말 예전의 나로 다시 깨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주섬주섬 챙겨서 방에 돌아왔다. 그렇게 갑자기 타지에, 골방에, 빈 손으로 남겨져 하루 종일 천장만 보고 눈을 껌벅이기를 며칠, 먹을 것도 떨어지고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동네를 걸었다.


그저 심어졌고 뿌리를 내렸고 가지를 뻗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주택들이 있는 동네에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다. 적어도 50년은 넘은 나무들이다. 옛 관료들이 살던 동네의 입구를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려고 심었는지 얼마 안 되는 거리에 빼곡하게 심어져 있다. 본디 하늘로 뻗어 올라가는 곧은 기질의 나무는 아니지만 스무 그루 남짓한 이 나무들은 굽어도 심하게 굽어있고 흉한 모습이다. 사람 키부터 시작한 옹이는 그 위에 옹이, 또 옹이가 있다. 여름이 되기 전에 베버리고 이듬해 또 잘라버리기를 반복하면서 잘린 가지마다 상처가 아물어 굳어서 흉한 모양이 됐다. 가을에는 그래도 나뭇잎에 가려 괜찮지만 봄이 되면 주먹을 하늘로 뻗은 모양의 나무통이 길을 따라서 박힌 모양이다. 그나마 잔가지들이 여름 내내 좀 올라오면 어김없이 베어버렸다. 난 그 길을 걸을 때마다 관리하기 힘들다고 나무의 허리를 베어버리는 무자비한 사람들을 욕하면서, 우두커니 한참을 어루만지고 왔다.


    플라타너스. 플라타너스는 병들지 않고 잘 자라는 성질인 데다 옆으로 펑퍼짐하게 자라는 수형에 특유의 넓은 잎으로 한여름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준다. 내가 다닌 시골의 작은 초등학교에도 나 혼자서는 안을 수 없는 커다란 플라타너스 서너 그루가 운동장에 있었다. 방과 후에 그 나무 밑에서 많이도 놀았다. 그리고 내가 유난히 나무를 좋아했는지 어릴 적 사진에도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나무를 껴안고 있고, 그 플라타너스를 두 팔로 감싸 안은 기억이 생생하다. 플라타너스 잎은 여름 비에 정수리나 바듯 가릴 용도로 쓰기도 하고, 가을이 되면 털 뭉치가 박힌 열매를 떨궜다. 가지고 놀기 참 좋은 크기였다. 겨울이면 껍데기를 죽 뜯으며 놀았다. 밑동 껍질을 벗기고 나면 나오는 보들보들한 감촉도 좋았다. 수분도 많이 머금고 공기정화도 되는 성질로 도시에도 많이 심겼다. 스무 살 한여름, 청주의 플라타너스로 만들어진 숲 터널을 덜덜거리는 친구 차를 타고 한참 달린 기억이 난다.


  오래된 플라타너스가 옆으로 숱하게 뻗는 가지로 건물과 간판을 가리고 두툼해진 밑동과 뿌리가 도로를 훼손한다고 베어진다. 플라타너스는 그저 어딘가에서 묘목으로 자랐고, 느닷없이 도시로 불려 와 심겼다. 도시의 소음과 척박한 땅은 스트레스지만 참고 가지를 뻗고 잎을 틔우며 일상을 살았다. 그냥 생긴 대로, 하늘이 준 성질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또 나름 결실을 맺으며 수십 년을 살아온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차를 타고 지나가며 잠깐 보이는 나무였겠지만, 플라타너스는 메마른 타지에서 목에 핏줄을 세워 물을 빨아들여가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비옥한 땅에 살아볼 기회도 선택권도 없었다. 생판 모르는 누군가가 모르는 동네로 불러들여 모래땅에 심었다. 그리고 그냥 이게 내 자리구나.. 하고 부지런히 살았다. 수십 년을 그렇게 살면서 그늘로 쓰이다. 필요 없어지자 하루아침에 허리를 잘렸다. 도망갈 수도 거부할 수도 없었다. 몇 분 만에 애써 건사해온 몸뚱이는 땅에 나뒹굴었다.


오래된 이 동네에는 플라타너스 그루터기가 많다. 잘린 플라타너스 사이를 간신히 걷는 게 그 당시 내 유일한 활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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