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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홍 Aug 22. 2023

베트남 며느리와의 갈등

#9 큰아들 주성 ②

자, 지금부터는 주성이 동분에게 들려줬던 ‘6박 7일 베트남 여정기’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그 당시 주성은, 베트남 국제결혼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베트남 여성은 한국 남성이라면 무조건 OK’라는 기대 말이다. 물론, 아예 근거 없는 기대는 아니었다. 이하는 형수님, 그러니까 주성의 아내에게 전해들은 내용과 통계자료 및 기사를 참조한 내용이다. 사실과 다소 다를 수 있다.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과 베트남 전쟁(1960~1975) 등을 겪었다. 이 전쟁으로 무수히 많은 베트남 남성이 사망했다. 최소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200만 명 이상이 부상당했다고 추정한다. 전쟁 후, 베트남엔 남성 자체가 귀해졌다. <머니투데이> ‘이재은의 그 나라, 베트남 그리고 국제결혼’ 시리즈 기사에 따르면 베트남은 2004년까지도 결혼 적령기인 여성의 성비가 더 높았다.(여성 100명당 남성 96.7명) 

여기에 그릇된 유교 문화까지 더해져 남성은 놀고먹고, 여성이 농사와 집안일까지 도맡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됐다. 참고로 베트남은 기원전 111년부터 930년까지 약 1000년 간 중국 지배를 받았으며, 지금도 중국 충쭤시와 국경을 맞댄다. 그만큼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오랜 세월 중국 영향을 받은 나라다. 

그런 한편, 한국은 ‘한강의 기적’으로 대표되는 초고도 성장기를 거쳤다. 이에 따라 한국 남성은 부지런하고 성실하다는 인식이 베트남에 퍼진 거다. 이에 과거 언제까지는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한국 남성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고 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 남성-베트남 여성 간 국제결혼은 2000년 61건을 시작으로 조금씩 증가해 2007년 7,685건으로 정점을 찍었다. 이후 점차 감소해 주성이 베트남에 갔던 2016년엔 3,798건이었다. 

물론, 세월이 흐르며 베트남 남성들도 예전처럼 놀고먹지 않는다. 뿐더러, 국제결혼 초창기에 주로 ‘나이 많은 시골 농부’가 베트남 여성과 결혼했다. <농촌여성신문> ‘농촌의 미래, 결혼이민여성 역할에 달렸다’ 기사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우리나라 전체 혼인자 중 국제결혼 비중은 9.9%인데 반해, 농촌지역 남성의 국제결혼 비중은 20.9%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른 여러 갈등과 부작용이 있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한국 남성이면 무조건 OK’ 하던 환상도 점차 없어졌다고 한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베트남으로 떠난 주성. 헛된 희망은 첫날부터 박살났다. 바닥에 패대기친 와인 잔처럼. 베트남 여성은 자신을 무조건 좋아해 주고, 그 가운데 마음에 드는 여성을 선택하면 되는 줄 알았다. 더군다나 그때 주성 나이 겨우 34살이었다. 한국 기준으로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국제결혼 희망하는 한국 남성치고는 상당히 젊은 축이었다. 밥벌이도 나쁘지 않았다.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7년 국제결혼중개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중개업체 이용자의 평균 연령은 43.6세였다.(<동아일보> ‘CNN, 한국 농촌 매매혼 집중 조명…지방정부가 장려’ 기사 참조.)      

그런 주성은 첫날, 베트남 여성 40명에게 퇴짜 맞고 나서야 현실로 돌아왔다. 물론, 전부 퇴짜 맞은 건 아니었다. 주성이 마음에 들면 상대방이 싫다 하고, 상대방이 주성을 마음에 들어 하면 주성이 탐탁지 않았다. 여하간 무려 40명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여기서 잠시, 베트남 국제결혼 과정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한국에 베트남 국제결혼 중개업체가 있다. 이곳에서 한국 남성들에게 수수료 받고 모든 과정을 진행한다. 이 중개업체 경쟁력은, 얼마나 많은 현지 ‘마담’(실제 마담이라고 부른다.)과 네트워크가 있느냐다. 이들이 말하자면 중매인이다. 베트남 현지에서 국제결혼 희망하는 베트남 여성들을 모집한다. 

한국 중개업체와 현지 마담이 맞선 일정을 조율한다. 확정되면 한국 남성(1명에서 많게는 3~4명. 주성은 혼자 갔다.)이 베트남으로 간다. 도착한 날부터 하루나 이틀간, 베트남 여성 수십 명과 짧게는 5분, 길면 30분가량 맞선을 본다. 통역사가 동석한다. 서로 마음을 확인하면 그 당일이나 다음날 예비 처가 가서 인사드린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약혼식하고, 곧바로 2박 3일 신혼여행을 떠난다. 이 모든 일정을 6박 7일 안에 소화해야 한다. 그러니 실제로는 베트남 도착 후 최대 이틀 안에, 결혼 상대를 결정해야 하는 거다. 

그런 마당에 첫날 40명과 맞선 보고도 결론이 안 났다. 아침에 베트남 도착하자마자 짐도 못 풀고 맞선 보기 시작했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했던 얘기 또 하고 했던 질문 또 했다. 그러는 사이 해가 어스름 떨어졌다. 허탈하게 숙소로 돌아온 주성. 어떤 심정이었을까. 당시 주성은 이런 생각을 했더란다.      

‘아, 이게 아닌데. 지금이라도 짐 싸서 한국으로 갈까. 그럼 수수료를 좀 돌려받을 수 있지 않을까? 어쩌지?’     

주성 딴엔 지금이라도 포기하면 다만 얼마라도 돌려받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그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하는 사이, 피로가 밀려와 설핏 잠이 들었단다. 그도 그럴게 전날 저녁 대전에서 인천으로 갔다. 공항에서 밤을 꼴딱 새우다시피 했다. 새벽 비행기에 올라 아침에 베트남 도착했다. 그때부터 숨 가쁜 하루였다. 까무룩, 30분이나 잤을까. 중개업체 직원한테 전화가 왔다.      

‘따르릉, 따르릉.’     

“마담 명단에 등록된 사람은 아니고, 마담 ‘사촌동생’이 한 명 있는데 자기도 한국 남자랑 맞선 한번 보고 싶다고 하네요. 이제 퇴근해서 지금 올 수 있다는데, 한번 보실래요? 보신다고 하면 숙소 로비로 오라고 할게요. 아니면 오늘은 그냥 쉬셔도 되고요.”     

수도승처럼 이미 반쯤 마음을 비운 상태였다. 굳이 숙소 로비로 오겠다고 하니, 얼굴이나 보자는 심정이었다. 얼마나 기대 안 했으면 잠들었다 일어났던 복장 그대로 내려갔다. 흰색 반팔 티에 반바지, 맨발에 슬리퍼 신은 채로 말이다. 거의 잠옷에 가까운 복장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성은 거기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던가. 무심한 듯, 숙소 로비에 서 있던 ‘사촌동생’에게 주성은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심장이 요동쳤지만,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이 먼저 물었다. ‘사촌동생’은 24살이라고 했다. 그것도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주성이 맞선 본 베트남 여성 중에선 가장 많았다. 사실, 주성이 베트남 여자 40명과 맞선 보며 가장 고려한 건 나이였다. 나이 차이가 너무 크면, 그만큼 결혼생활이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주성은 ‘24살’이라는 나이가 반갑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사촌동생’은 자신이 이 자리에 나온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촌동생’은 원래 국제결혼 같은 건 생각도 안 했던 사람이었다. 대학 졸업한 후, 열심히 직장 다녔다. 그러다 우연히 <태양의 후예>(2016년 2~4월 방영)라는 한국 드라마를 봤다. 뒤늦게 한류 열풍에 합류했던 것. 그런 찰나에, 그러니까 <태양의 후예>가 종영하고 두 달이 지난 2016년 6월, 마담으로 일하던 사촌 언니한테 전화가 왔단다.      

“너 요즘 한국에 푹 빠져 있잖아. 오늘, 허우대 멀쩡하고 젊은 한국 남자 한 명 왔는데, 맞선 한번 볼래?”      

그렇게 된 거다. 사촌 언니의 즉흥적인 제안에 즉흥적으로 응했던 것뿐. 그래서 퇴근하자마자 아무 생각 없이 불러준 주소로 왔고, 그곳에서 주성을 만났다. 이 또한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사촌동생’ 또한 주성을 보자마자 인상이 참 좋았단다. 뽀얀 피부에 하얀 티셔츠를 입어서인지, 사람이 더 깔끔하고 선해 보이더라는 것. 그것이 주성 입장에선 거의 잠옷에 가까운 복장인 줄도 모르고. 주성은 나중에 그 얘길 듣고, 헛웃음이 나왔다. 나름대로 맞선 본답시고 한국에서(정확하게는 대전에서 인천을 거쳐 베트남 하이퐁까지) 검은색 정장 고이 챙겨왔다. 땀 삐질삐질 흘리며 종일 입었다. 그 모든 게 헛수고였다. 이래서 사람 일 모른다고 하나 보다. 

‘사촌동생’이 주성에게 가장 먼저 물은 건 띠였다. 베트남 사람들은 대체로 띠를 굉장히 중시한다. ‘사촌동생’ 또한 마찬가지였다. 예전부터 돼지띠와 결혼해야 행복하게 살 거라는 얘길 들었단다. 하여, 다른 모든 조건이 맞아도 돼지띠가 아니면 절대 결혼 안 할 거라고 다짐했었다. 마침 주성이 돼지띠였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술 담배 안 하는 사람. 술이야 송일영에게 물려받은 핏줄이니 말할 것도 없다. 주성이나 주홍이나 술은 입에도 못 댄다. 다만, 담배는 송일영이 하루 두 갑을 더 피운다. 그 핏줄 받아 주홍도 하루 두 갑은 꼭 피운다. 근데 이상하게도 주성만 담배도 안 피운다. 

고로, 주성은 모든 조건을 통과했다. 선한 인상과 돼지띠, 술 담배 안 하는 사람. ‘사촌동생’은 다 좋으니, 결혼하자고 하더란다.      

“그래도 부모님 허락은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부모님은 저만 좋으면 무조건 허락하실 거예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전화라도 한 번 해보시죠?”     

그렇게 얼떨결에 예비 장모와 통화한 주성. 예비 장모는 주성에게 돼지띠가 확실하냐고 물었고, 그렇담 딸이 좋다고 하니 자신도 ‘오케이’라고 하더란다. 주성이야 이미 첫눈에 반한 터였고, 시원시원한 성격과 당당한 태도에 더 볼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모든 일이 일사천리였다. 2017년 봄 동분과 송일영, 주성이 함께 베트남으로 건너가 전통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주성의 아내가 한국에 왔다. 그해 가을, 한국에서 다시 한번 결혼식을 올렸다. 

19살 때부터 여러 공장과 회사, 심지어 직업군인까지. 주성은 20대 내내 수차례 직장을 옮겼다. 부침이 많았다. 동분은, 그 모든 게 자기 탓처럼 느껴졌다. 부모 잘못 만난 탓에 큰아들이 고생하는 거 같았다. 주성이 가발 쓰고 외출할 때, 동분은 시선을 돌렸다. 동분이 비로소 마음을 놓은 건 주성이 택배기사를 시작한 2011년부터다. 





베트남 국제결혼 


“결과적으로 니네 형한텐 택배기사가 딱 적성이었던 거 같어. 니네 형이 책상에 앉아있을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군대처럼 여러 사람 모인 집단에서 위아래 눈치 보고 스트레스받으며 일할 스타일도 아니고. 택배기사는 하루 죙일 혼자 왔다 갔다 하는 거잖어. 누구 눈치 볼 필요도 없고, 자기한테 할당된 물량만 묵묵하게 소화하면 되니까. 어쨌거나 29살에 시작해서 벌써 15년 가까이 하는 거니까 니네 형도 만족한다는 얘기 아녀? 벌이도 괜찮은 거 같고.”     


그때부터 착실하게 돈도 모으고, 가끔 연애도 하는 것 같던 주성이 폭탄 선언한 건 2016년. 주성 나이 34살 때다. 여간해선 속 얘기 잘 안 하는 주성이 동분과 송일영에게 긴히 할 말이 있다며 부르더라는 것. 한참 뜸 들이던 주성은, 베트남에 가겠다고 했다.      


“이것도 참~ 특이한 건데, 니네 형 꿈이 대가족이었잖어. 평생 엄마, 아빠 모시면서 자식도 한 서너 명 낳아가지고 복작복작하게 살고 싶다고, 옛날부터 그랬잖어. 근데 니가 한번 생각해봐라. 요즘 세상에 누가 시부모 모시면서 자식을 서너 명씩 낳으려고 하냐고. 니네 형 한다는 말이 나름대로 연애도 하고 결혼까지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는 겨. 근데 대가족 얘기만 하면 다들 도망갔나 봐. 당연한 거 아니냐? 호호호. 그러다가 유튜브에서 우연히 베트남 국제결혼 영상을 봤던 모양이더라고.”      


그게 34살 주성이 내린 결론이었다. 베트남 여성과의 국제결혼. 대답 기다리는 주성에게 동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장 반대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한 번도 염두에 두지 않은 가능성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먼저 침묵 깬 건 송일영이었다. 주성 얘길 듣자마자 안 된다고, 딱 잘랐다. 당시 62살이었던 송일영은 ‘다문화’보다는 ‘혼혈’이라는 단어가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엔 주성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마도 자기 인생 전체가 걸린 문제라고 생각했으리라.     


“니네 형이 그러는 겨. 이날 이때까지 자기가 단 한 번이라도 엄마, 아빠 말 안 들은 적 있냐고. 이번 한 번만 자기 뜻대로 하게 해달라고.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니네 아빠가 할 말 있냐? 주성이 말대로 34살 먹을 때까지 아빠 뜻대로 살아왔잖어. 더군다나 우리가 니네 형 도움을 얼마나 많이 받았냐. 아닌 말로, 엄마나 아빠나 이래라저래라 말할 자격도 없지, 뭐.”     


결국, 주성은 택배기사 하며 모았던 돈으로 베트남 비행기에 올랐다. 베트남 국제결혼 중개업체 수수료는 그 당시에도 대략 1,000~1,500만 원 정도였다. 예비 신랑의 왕복 항공료와 베트남 체류비, 예식 및 신혼여행 경비, 통역가이드비와 중개업체 수수료 등을 포함한 가격이다.       


    




번외: 주성의 결혼 원정기 



2017년 큰아들 주성 결혼식 때 찍은 사진. 


자, 지금부터는 주성이 동분에게 들려줬던 ‘6박 7일 베트남 여정기’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그 당시 주성은, 베트남 국제결혼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베트남 여성은 한국 남성이라면 무조건 OK’라는 기대 말이다. 물론, 아예 근거 없는 기대는 아니었다. 이하는 형수님, 그러니까 주성의 아내에게 전해들은 내용과 통계자료 및 기사를 참조한 내용이다. 사실과 다소 다를 수 있다.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과 베트남 전쟁(1960~1975) 등을 겪었다. 이 전쟁으로 무수히 많은 베트남 남성이 사망했다. 최소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200만 명 이상이 부상당했다고 추정한다. 전쟁 후, 베트남엔 남성 자체가 귀해졌다. <머니투데이> ‘이재은의 그 나라, 베트남 그리고 국제결혼’ 시리즈 기사에 따르면 베트남은 2004년까지도 결혼 적령기인 여성의 성비가 더 높았다.(여성 100명당 남성 96.7명) 


여기에 그릇된 유교 문화까지 더해져 남성은 놀고먹고, 여성이 농사와 집안일까지 도맡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됐다. 참고로 베트남은 기원전 111년부터 930년까지 약 1000년 간 중국 지배를 받았으며, 지금도 중국 충쭤시와 국경을 맞댄다. 그만큼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오랜 세월 중국 영향을 받은 나라다. 


그런 한편, 한국은 ‘한강의 기적’으로 대표되는 초고도 성장기를 거쳤다. 이에 따라 한국 남성은 부지런하고 성실하다는 인식이 베트남에 퍼진 거다. 이에 과거 언제까지는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한국 남성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고 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 남성-베트남 여성 간 국제결혼은 2000년 61건을 시작으로 조금씩 증가해 2007년 7,685건으로 정점을 찍었다. 이후 점차 감소해 주성이 베트남에 갔던 2016년엔 3,798건이었다. 


물론, 세월이 흐르며 베트남 남성들도 예전처럼 놀고먹지 않는다. 뿐더러, 국제결혼 초창기에 주로 ‘나이 많은 시골 농부’가 베트남 여성과 결혼했다. <농촌여성신문> ‘농촌의 미래, 결혼이민여성 역할에 달렸다’ 기사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우리나라 전체 혼인자 중 국제결혼 비중은 9.9%인데 반해, 농촌지역 남성의 국제결혼 비중은 20.9%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른 여러 갈등과 부작용이 있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한국 남성이면 무조건 OK’ 하던 환상도 점차 없어졌다고 한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베트남으로 떠난 주성. 헛된 희망은 첫날부터 박살났다. 바닥에 패대기친 와인 잔처럼. 베트남 여성은 자신을 무조건 좋아해 주고, 그 가운데 마음에 드는 여성을 선택하면 되는 줄 알았다. 더군다나 그때 주성 나이 겨우 34살이었다. 한국 기준으로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국제결혼 희망하는 한국 남성치고는 상당히 젊은 축이었다. 밥벌이도 나쁘지 않았다.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7년 국제결혼중개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중개업체 이용자의 평균 연령은 43.6세였다.(<동아일보> ‘CNN, 한국 농촌 매매혼 집중 조명…지방정부가 장려’ 기사 참조.)      


그런 주성은 첫날, 베트남 여성 40명에게 퇴짜 맞고 나서야 현실로 돌아왔다. 물론, 전부 퇴짜 맞은 건 아니었다. 주성이 마음에 들면 상대방이 싫다 하고, 상대방이 주성을 마음에 들어 하면 주성이 탐탁지 않았다. 여하간 무려 40명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여기서 잠시, 베트남 국제결혼 과정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한국에 베트남 국제결혼 중개업체가 있다. 이곳에서 한국 남성들에게 수수료 받고 모든 과정을 진행한다. 이 중개업체 경쟁력은, 얼마나 많은 현지 ‘마담’(실제 마담이라고 부른다.)과 네트워크가 있느냐다. 이들이 말하자면 중매인이다. 베트남 현지에서 국제결혼 희망하는 베트남 여성들을 모집한다. 


한국 중개업체와 현지 마담이 맞선 일정을 조율한다. 확정되면 한국 남성(1명에서 많게는 3~4명. 주성은 혼자 갔다.)이 베트남으로 간다. 도착한 날부터 하루나 이틀간, 베트남 여성 수십 명과 짧게는 5분, 길면 30분가량 맞선을 본다. 통역사가 동석한다. 서로 마음을 확인하면 그 당일이나 다음날 예비 처가 가서 인사드린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약혼식하고, 곧바로 2박 3일 신혼여행을 떠난다. 이 모든 일정을 6박 7일 안에 소화해야 한다. 그러니 실제로는 베트남 도착 후 최대 이틀 안에, 결혼 상대를 결정해야 하는 거다. 


그런 마당에 첫날 40명과 맞선 보고도 결론이 안 났다. 아침에 베트남 도착하자마자 짐도 못 풀고 맞선 보기 시작했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했던 얘기 또 하고 했던 질문 또 했다. 그러는 사이 해가 어스름 떨어졌다. 허탈하게 숙소로 돌아온 주성. 어떤 심정이었을까. 당시 주성은 이런 생각을 했더란다.      


‘아, 이게 아닌데. 지금이라도 짐 싸서 한국으로 갈까. 그럼 수수료를 좀 돌려받을 수 있지 않을까? 어쩌지?’   


주성 딴엔 지금이라도 포기하면 다만 얼마라도 돌려받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그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하는 사이, 피로가 밀려와 설핏 잠이 들었단다. 그도 그럴게 전날 저녁 대전에서 인천으로 갔다. 공항에서 밤을 꼴딱 새우다시피 했다. 새벽 비행기에 올라 아침에 베트남 도착했다. 그때부터 숨 가쁜 하루였다. 까무룩, 30분이나 잤을까. 중개업체 직원한테 전화가 왔다.      


‘따르릉, 따르릉.’     


“마담 명단에 등록된 사람은 아니고, 마담 ‘사촌동생’이 한 명 있는데 자기도 한국 남자랑 맞선 한번 보고 싶다고 하네요. 이제 퇴근해서 지금 올 수 있다는데, 한번 보실래요? 보신다고 하면 숙소 로비로 오라고 할게요. 아니면 오늘은 그냥 쉬셔도 되고요.”     


수도승처럼 이미 반쯤 마음을 비운 상태였다. 굳이 숙소 로비로 오겠다고 하니, 얼굴이나 보자는 심정이었다. 얼마나 기대 안 했으면 잠들었다 일어났던 복장 그대로 내려갔다. 흰색 반팔 티에 반바지, 맨발에 슬리퍼 신은 채로 말이다. 거의 잠옷에 가까운 복장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성은 거기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던가. 무심한 듯, 숙소 로비에 서 있던 ‘사촌동생’에게 주성은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심장이 요동쳤지만,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이 먼저 물었다. ‘사촌동생’은 24살이라고 했다. 그것도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주성이 맞선 본 베트남 여성 중에선 가장 많았다. 사실, 주성이 베트남 여자 40명과 맞선 보며 가장 고려한 건 나이였다. 나이 차이가 너무 크면, 그만큼 결혼생활이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주성은 ‘24살’이라는 나이가 반갑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사촌동생’은 자신이 이 자리에 나온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촌동생’은 원래 국제결혼 같은 건 생각도 안 했던 사람이었다. 대학 졸업한 후, 열심히 직장 다녔다. 그러다 우연히 <태양의 후예>(2016년 2~4월 방영)라는 한국 드라마를 봤다. 뒤늦게 한류 열풍에 합류했던 것. 그런 찰나에, 그러니까 <태양의 후예>가 종영하고 두 달이 지난 2016년 6월, 마담으로 일하던 사촌 언니한테 전화가 왔단다.      


“너 요즘 한국에 푹 빠져 있잖아. 오늘, 허우대 멀쩡하고 젊은 한국 남자 한 명 왔는데, 맞선 한번 볼래?”     

 

그렇게 된 거다. 사촌 언니의 즉흥적인 제안에 즉흥적으로 응했던 것뿐. 그래서 퇴근하자마자 아무 생각 없이 불러준 주소로 왔고, 그곳에서 주성을 만났다. 이 또한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사촌동생’ 또한 주성을 보자마자 인상이 참 좋았단다. 뽀얀 피부에 하얀 티셔츠를 입어서인지, 사람이 더 깔끔하고 선해 보이더라는 것. 그것이 주성 입장에선 거의 잠옷에 가까운 복장인 줄도 모르고. 주성은 나중에 그 얘길 듣고, 헛웃음이 나왔다. 나름대로 맞선 본답시고 한국에서(정확하게는 대전에서 인천을 거쳐 베트남 하이퐁까지) 검은색 정장 고이 챙겨왔다. 땀 삐질삐질 흘리며 종일 입었다. 그 모든 게 헛수고였다. 이래서 사람 일 모른다고 하나 보다. 


‘사촌동생’이 주성에게 가장 먼저 물은 건 띠였다. 베트남 사람들은 대체로 띠를 굉장히 중시한다. ‘사촌동생’ 또한 마찬가지였다. 예전부터 돼지띠와 결혼해야 행복하게 살 거라는 얘길 들었단다. 하여, 다른 모든 조건이 맞아도 돼지띠가 아니면 절대 결혼 안 할 거라고 다짐했었다. 마침 주성이 돼지띠였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술 담배 안 하는 사람. 술이야 송일영에게 물려받은 핏줄이니 말할 것도 없다. 주성이나 주홍이나 술은 입에도 못 댄다. 다만, 담배는 송일영이 하루 두 갑을 더 피운다. 그 핏줄 받아 주홍도 하루 두 갑은 꼭 피운다. 근데 이상하게도 주성만 담배도 안 피운다. 


고로, 주성은 모든 조건을 통과했다. 선한 인상과 돼지띠, 술 담배 안 하는 사람. ‘사촌동생’은 다 좋으니, 결혼하자고 하더란다.      


“그래도 부모님 허락은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부모님은 저만 좋으면 무조건 허락하실 거예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전화라도 한 번 해보시죠?”     


그렇게 얼떨결에 예비 장모와 통화한 주성. 예비 장모는 주성에게 돼지띠가 확실하냐고 물었고, 그렇담 딸이 좋다고 하니 자신도 ‘오케이’라고 하더란다. 주성이야 이미 첫눈에 반한 터였고, 시원시원한 성격과 당당한 태도에 더 볼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모든 일이 일사천리였다. 2017년 봄 동분과 송일영, 주성이 함께 베트남으로 건너가 전통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주성의 아내가 한국에 왔다. 그해 가을, 한국에서 다시 한번 결혼식을 올렸다. 




      




베트남 며느리와의 갈등 


줄곧 얘기했듯, 주성과 주홍은 같은 배에서 나온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성격, 성향, 취미, 식성 등 어느 것 하나 닮은 구석이 없다. 그 가운데서도 동분이 생각하는 가장 큰 차이는 독립 성향이다. 주홍은 어떻게든 집을 나가려는 아들이었고, 주성은 어떻게든 집에 있으려는 아들이었다.      


“너는 스물셋에 집 나가서 줄곧 혼자 살았잖어. 대학 졸업하고, 직장 다닐 때 집으로 다시 들어오라고 했더니 한 6개월 살다가 또 나가고. 서울로 이직했다가 다시 대전 내려올 때도 들어오라니까 따로 집 얻고. 이혼하고 대전 와서도 갈 때 없으면 와서 살라고 했는데도 곧 죽어도 혼자 살겠다고 안 들어오고.”     


그에 반해 주성은, 군대 가 있던 4년 제외하면 줄곧 동분, 송일영과 함께 살았다. 불과 3년 전, 그러니까 주성 나이 서른아홉까지 말이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주성 뜻이었다. 동분은 주성 20대 때, 슬쩍 물은 적도 있다. 다른 애들은 혼자 살고 싶어 안달이던데, 넌 독립할 생각 없느냐고. 주성이 그러더란다. 엄마가 해주는 밥이 제일 맛있는데, 뭐 하러 혼자 살면서 고생하느냐고. 주성 아내가 한국에 들어올 때도 동분은 재차 물었다. 그래도 신혼인데, 따로 나가 살 계획은 없는지.     


“니네 형 한다는 말이, 이미 베트남에서 맞선볼 때 니네 형수랑 ‘합의’를 했다는 거여. 부모님 모시고 같이 살기로. 니네 아빠야 맏아들이 먼저 나서서 모시고 산다니까 내심 좋았는지도 모르지. 근데, 엄마는 여러 가지로 걱정되더라고. 넌 잘 모르겄지만, 주방 살림이라는 게 원래 여러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렇다고 엄마가 한국 음식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니네 형수한테 주방 맡길 수 있냐? 그렇게 니네 형수가 요리한다고 한들, 입맛 까다로운 니네 아빠가 먹겠느냐고.”    

  

여기서 잠시, 주성과 아내가 베트남에서 맞선 보던 날로 시계를 돌려보자. 주성은 아내에게, 자신의 원대한 꿈을 얘기했다. 평생 부모님 모시며 애들 서넛 낳아 복작복작하게 살겠다는 꿈 말이다. 이에 아내는 ‘그런 걸 왜 묻지? 당연한 걸?’이라는 반응이었단다. 


이유인즉, 앞에서도 얘기했듯 베트남은 역사‧지리적으로 한국과 함께 중국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다. 하여, 정서적으로 보나 문화적으로 보나 ‘한중일’보다는 ‘한중베’로 묶는 게 마땅할 정도다. 


실제로 주성 아내 또한 베트남 살 때 친할머니, 큰아버지 내외, 엄마, 동생 셋까지 대식구가 함께 살았다.(아버지는 결혼 몇 해 전 돌아가셨다.) 뿐더러 바로 집 근처에 고모와 이모들이 살았단다. 그런 환경과 분위기에서 나고 자랐으니, 주성의 조심스러운 제안이 도리어 새삼스러울 수밖에. 그렇게 베트남에서 의기투합(?)한 주성 부부는 결혼식 올리고도 분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처럼 동분의 우려가 현실이 됐다.      


“니네 형수가 한국 오자마자 요섭이 임신했잖어. 근데 니가 생각해 봐라. 타지도 아니고, 타국에 와서 임신했으니, 얼마나 힘들겄냐. 말도 잘 안 통하지, 음식도 입에 안 맞지, 친정엄마도 보고 싶을 테고, 친구들도 만나고 싶을 테고. 그나마 마음 줄 사람은 남편뿐인데, 니네 형은 그때도 택배기사 했었으니까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나 들어왔잖어.”     


「출입국관리법 시행규칙」  제9조의5(결혼동거 목적의 사증 발급 기준 등) 제1항 제6호에 따라 피초청인은 ‘한국어능력시험 1급 이상 취득’ 등 기초 수준 이상의 한국어 구사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하여, 주성의 아내 또한 한국에 올 때 이미 기본적인 수준의 한국어는 구사했다. 그럼에도 원어민 같을 순 없었다. 지금은 한국 생활 7년 차로 한국 국적을 취득한 것은 물론, 한국어도 원어민 수준이다.      


어쨌든, 당시 주성 아내를 제일 괴롭힌 건 담배였다. 시아버지 송일영의 실내 흡연 말이다. 송일영 딴엔 혼자 쓰는 방에서 방문 닫고 공기청정기 켜고, 방 안쪽의 작은 베란다에서 피운다지만, 주성의 아내가 누군가! 주성과 맞선볼 때 물었던 첫 번째가 돼지띠였고, 두 번째가 바로 술 담배였다. 그 정도로 담배 냄새에 예민한 사람이었다. 더욱이 임산부인데 말이다. 갈등은 여기서 시작했다.      


“평생 집 안에서 대놓고 담배 피우던 양반이 그나마 며느리 눈치 본다고 쪽방 베란다에서 공기청정기까지 돌려가며 피운 겨. 니네 아빠 성질 잘 알겄지만, 그 정도면 굉장히 양보한 거지. 근데 니네 형수도 성격이 시원시원한 스타일 아니냐. 뭐 꾹 참고, 속으로 삭이고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거든? 그러니까 니네 형만 중간에서 죽어나는 거지. 그러더니만 나중엔 니네 형수가 나한테까지 큰소리를 내기 시작하더라고. 나도 참고 참다가, 하루 날 잡아서 니네 형수랑 단둘이 대화를 나눴지. 차분하게.”     


주성의 아내가 한국에 온 지 꼭 1년 됐을 때다. 동분은 며느리 마음을 충분히 공감해 줬다. 갑작스러운 타국 생활과 임신, 출산, 육아, 거기에 꽉 막힌 시아버지까지. 그 모든 걸 스물여섯 여자가 감당하기엔 벅찰 수 있다는 걸, 동분은 너무나 잘 안다고 얘기해줬다. 자신도 시집살이 겪어봐서 이해한다는 말과 함께.      


“그러면서 얘기했지. 네가 한국 시어머니는 처음이듯, 나도 베트남 며느리는 처음이다. 너도 많이 힘들겠지만, 나도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다. 매일 새벽에 나가서 저녁까지 병원 청소하고, 집에 오자마자 너 잠깐이라도 쉬라고 요섭이 대신 봐주고, 너가 요섭이 밥 먹일 동안 나는 또 저녁 준비하고. 그렇게 힘들어도 이날 이때까지 너한테 싫은 소리 한 번 해본 적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족이니까. 피를 나누진 않았어도 우리는 한 가족 아니냐. 그러니까 우리 조금씩만 양보하고 이해하고 노력해 보자. 그런 얘길 차분하게 했더니 니네 형수가 ‘엄마 죄송해요.’ 하면서 나한테 안겨가지고 한참을 펑펑 울더라고. 그때 니네 형수가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연 거 같어. 호호호. 그날 이후로 니네 형수랑 얼굴 붉힌 적 한 번도 없어.”     


주성 부부는 2018년 큰아들 요섭과 2020년 둘째딸 민설을 낳았다. 동분 일상은 똑같았다. 새벽에 나가 종일 병원 청소하고, 집에 오면 곧바로 손주들을 봐줬다. 그 사이 며느리는 아이들 이유식을 만들었다. 며느리가 아이들 밥 먹이는 사이, 동분은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주성과 송일영이 퇴근해 돌아오면 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 며느리가 설거지와 뒷정리하는 사이, 동분은 다시 손주들과 놀아줬다. 그런 일상을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동분은 60살이 되고, 61살이 됐다.      


“손주들 얼굴만 보고 있어도 좋지, 좋은데. 엄마도 나이 먹으니까 힘이 딸리더라고. 엄마가 집에서 노는 사람 같으면 얼마든지 손주들이랑 놀아줄 수 있지. 근데, 그게 아니었잖어. 그런 상황에서 2021년 되자마자 니네 형수가 셋째 지섭이를 임신한 겨. 그 얘길 듣는데, 한편으론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아이고, 한숨이 절로 나오더라고. 호호호. 셋째까지 낳으면 또 한동안은 봐줘야 할 텐데, 덜컥 겁이 나는 겨. 안 되겄어. 셋째 낳기 전에 담판 지어야지. 그래가지고 니네 형 따로 불러서 얘기했지. 주성아, 우리 이제 그만 따로 살자. 엄마가 너무 힘들어서 안 되겄다. 5년이나 같이 살았으면 니 소원 실컷 이룬 거 아니냐. 니네도 이제는 따로 살아봐야 하지 않겠냐고 했지. 그랬더니, 니네 형이 ‘엄마 많이 힘들었어? 알았어. 얘기 한 번 해볼게.’ 하더라고. 의외로 니네 형수가 끝까지 반대했지. 호호호. 자기 딴에도 혼자 애 셋을 키워야 하는데 엄두가 안 났겄지. 근데 니네 형이 어떻게 설득을 했나 봐. 그래가지고 지섭이 태어나기 전에 후다닥 분가한 겨.”      


분가라고는 하지만, 주성은 멀리 가지 않았다. 차 끌고 겨우 5분 거리로 이사했다. 지금도 일주일이면 한두 번 동분이 주성 집으로 가고, 주성은 주말마다 아내와 애 셋을 데리고 동분 집으로 온다. 동분은 지금이 딱 좋다.  


“그래도 5년 같이 살 길 잘한 거 같어. 애초에 따로 살았으면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며느리는 며느리거든? 니네 형수 입장에서도 시어머니는 시어머니인 거고. 근데 쭉 같이 살다가 분가해서 그런가, 니네 형수나 나나 거리감이 없어. 니네 형수도 자기 집 드나들 듯이 우리 집에 불쑥불쑥 오고. 호호호. 엄마도 마찬가지여. 그래도 며느리 집이니까 가는 게 좀 조심스러워야 하잖아. 이상하게 그런 마음이 안 들더라? 어쨌든 간에 엄마는 지금이 딱 좋은 거 같어. 갈이 살 땐 진짜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어. 지금은 퇴근하고 집 와서 실컷 쉬다가, 니네 아빠랑 간단하게 저녁 먹으면 끝이니까, 훨씬 낫지. 그런 데다가 가까이 사니까 손주들 보고 싶으면 얼마든지 왔다 갔다하면서 볼 수 있고. 호호호.”     






2023년 2월, 베트남 가족 여행 가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동분, 지섭(주성의 셋째아들), 동분의 베트남 며느리, 요섭(주성의 첫째아들).


사실, 동분은 주성 부부가 분가할 때 조금 걱정했다. 얘기했듯, 함께 살 땐 동분이 주방 살림을 주도했다. 하여 며느리 솜씨를 잘 몰랐다. 셋째 임신한 며느리가 이삿짐 싸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휴, 저 어린 게(당시 주성 아내는 29살이었다.) 애 셋을 혼자 키우면서 살림이나 제대로 할까. 기우였다.      


“니네 형수도 엄마가 살림하니까 끼어들 틈이 없었던 것뿐이지, 원래가 살림꾼이었더라고. 하긴, 생각해 보면 베트남에서 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친정엄마가 줄곧 밥벌이했으니까, 니네 형수가 동생 셋을 다 키운 거 아녀. 그러니 뭐, 괜한 걱정이었던 거지. 가보면 애 셋 키우는 집 같지가 않어. 왜, 애들 많은 집은 아무리 정리해도 어수선할 수밖에 없잖어. 근데 얼마나 깔끔을 떠나, 집이 항상 깨끗햐. 호호호. 냉장고도 맨날 청소하나 봐.(소곤소곤) 한국 요리도 엄마보다 더 잘해. 요즘 애들이라 그런지 유튜브 같은 거 보면서 곧잘 따라 하더라고. 일주일이 멀다고 전화 와서 ‘엄마~ 갈비찜 해놨으니까 저녁 드시러 오세요.’ 그런다니까? 뭐 갈비찜, 잡채, 찌개 못 하는 게 없더라고. 그건 그렇고, 너는 니네 형수가 넷째 임신한 거 먼저 알았다면서??! 왜 엄마한테는 얘기 안 했냐, 치사하게. 아휴 근데 니네 형이나 형수나 대단들햐. 애 넷을 어떻게 다 키우려고. 호호호.”     


동분은 며느리가 차려준 밥 얻어먹고, 셋이나 되는 자식에게 둘러싸여 놀아주는 주성을 흐뭇하게 바라보곤 한다. 그러다 집으로 돌아올 때면 마음이 가득 차는 걸 느낀다. 돌이켜보면 주성은 뱃속에 있을 때부터 무엇 하나 해준 게 없는 아들이었다. 학교 다닐 때도 메이커 운동화 한 번을 마음 편히 못 사줬다. 주성이 사회생활 시작한 뒤로는 도리어 받기만 했다. 이래저래 쪼들릴 때마다 주성에게 받아 쓴 돈이 도대체 얼만지 모른다. 그랬는데도 반듯하게 자라, 어느덧 네 아이(해당 인터뷰 이후인 2023년 12월, 넷째 은섭 출산.) 아빠다. 고맙고, 또 미안한 마음뿐이다. 


동분은 요즘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평생 부모님 모시며 대가족으로 살고 싶다던 주성의 꿈이, 과연 진심이었을까. 맏아들로서 책임감이 만들어 낸 꿈은 아니었을까. 주성은 그러고도 남을 아들이니까. 그렇게나 부모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속 깊은 아들이니까.      


“엄마가 니네 형한테 바라는 게 뭐 있겄냐. 이제 니네 형도 41살 아녀. 올 12월에 넷째 태어나는데, 그거 생각하면 앞으로도 20년은 더 밥벌이해야 하잖어. 택배기사 일이 쉬운 것도 아니고. 아무쪼록 몸조리 잘하면서 행복하게 잘 살아주면 부모로서 더 바랄 게 없지. 엄마, 아빠는 이제 알아서 할 테니까, 우리 걱정은 그만 좀 해줬으면 좋겄어. 호호호.”



최근에 찍은 큰아들 주성의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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