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개인택시
동분과 송일영, 두 사람 인생엔 두어 번 상승 곡선이 있었다. 그 첫 번째가 1991년 6월, 송일영이 ‘개인택시운송사업 면허’ 취득한 거다. 동분 표현 빌리자면 개인택시 받고 나니까 모든 일이 거짓말처럼 풀리기 시작했단다.
송일영이 처음 회사택시 몰기 시작한 건 1980년이다. 그러니 꼭 10년(1982~1983, 대한생명 충북지사장 수행비서로 1년 근무한 것 제외) 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여기서 잠시 송일영 말을 들어보자.
“10년 만이었으니까 엄청 빨리 개인택시 받은 겨. 그때 아빠가 37살이었는데, 30대 개인택시 기사는 거의 없었어~~! 보통 40대, 늦는 사람은 50대에도 받고 그랬지. 아빠 주변에 회사택시 평생 굴리고도 끝끝내 개인택시 못 받은 사람이 태반이여. 말이 쉬워 7년 무사고지, 운전이라는 게 어디 내 뜻대로만 되겄냐?”
개인택시운송사업 면허란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제4조(면허 등) 및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시행규칙」 제19조(개인택시운송사업의 면허기준 등) 등을 충족해 국토교통부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특별시장‧광역시장‧특별자치시장‧도지사‧특별자치도지사에게 받는 면허를 말한다. 쉽게 말해 개인택시를 끌 수 있는 면허증이다. 1991년 당시엔 법인택시 무사고 운전경력 7년(현 5년)을 충족해야 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찾기쉬운 생활법령정보> 참조.)
이점에 있어서, 송일영 자부심은 대단하다. 벌써 30년이 넘은 일인데도 이렇듯 개인택시 얘기만 나오면 목소리가 한껏 높아지면서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아마도, 송일영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어릴 적 꿈을 이뤘으니 말이다.
1955년에 태어난 송일영은 3살 터울 형 송갑영과 함께 학교에 걸어다녔다. 자그마치 10리(약 4km) 길이었다. 끝도 안 보이는 비포장도로를 걷고 또 걸었다. 학교 오갈 때, 아주 가끔이지만 검은색 개인택시가 뿌연 먼지 일으키며 옆으로 지나가곤 했다. 당시 기사들은 꼭 ‘라이방’ 선글라스에 하얀 면장갑을 꼈다. 10살 남짓 송일영 어린이 눈엔, 그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하여, 먼지 뒤집어써 가며 택시를 쫓곤 했다. 물론, 얼마 못 가 숨을 헐떡거려야 했지만. 그때 송일영 어린이는 그런 결심을 했더랬다. 나중에 크면 택시 기사가 되어야겠다고. 그냥 택시 말고, 멋지고 근사한 ‘개인택시’ 기사.
송일영은 기어코 꿈을 이뤄냈다. 그리고 여기엔 동분의 절대적인 역할이 있었다. 이야기는 다시 1988년으로 간다. 지긋지긋한 시집살이 끝내고 분가하던 시점이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엄마가 마지막으로 마음을 내려놓고 다시 시댁에 들어갔을 때, 니네 아빠랑 얘기했던 건 큰아빠 감옥에서 출소할 때까지였어. 그때까지만 시댁에서 살기로. 그러다 1988년에 니네 큰아빠가 출소했고, 얼마 안 있어서 가출했던 큰엄마도 집으로 돌어왔단 말여. 그러니까 이제 우리 가족은 분가해도 되잖어. 니가 생각해 봐라. 시골집이라 아무리 방이 많다고 해도 니네 할머니, 삼촌, 엄마, 아빠, 주성이, 너, 큰아빠, 큰엄마, 영희, 철수까지. 뭐 한다고 그 많은 식구가 다 같이 사냐고. 그래가지고 니네 할머니 몰래 신탄진에 집 얻어놓고, 이제 돌 지난 너를 업고, 6살이었던 주성이 손을 잡고, 니네 할머니한테 폭탄선언을 한 거지. 이제 그만 나가서 따로 살겠다고. 물론, 니네 아빠랑은 얘기가 끝난 상태였지. 그랬더니 니네 할머니가 난리, 난리가 난 겨.”
시어머니 입장에서 성질머리 대단한 큰아들 송갑영이나 큰며느리나 불편하긴 마찬가지였을 터. 그나마 상대적으로 편한 둘째 부부가 있어, 모진 세월 견뎠다. 그랬는데 갑자기 분가하겠다고 하니 탐탁지 않았던 것.
시어머니는 동분 옷자락을 잡아끌며 절대 못 보낸다고 막았다. 나가겠다는 동분과 막으려는 시어머니 사이에 한차례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때였다. 등에 업혀있던 주홍이 울기 시작했다. 겨우 13개월 된 주홍은 알았던 걸까. 엄마가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니가 울기 시작하니까 니네 형도 따라 울고 아주 눈물 바다였어. 도저히 안 되겠어서, 우선 방으로 들어왔지. 그랬더니 니네 할머니가 내 신발이랑 니네 형 신발을 마당에 막 집어 던지면서 악다구니 쓰는데, 아휴 무섭더라니까? 저녁에 니네 아빠 와가지고 겨우 탈출한 거여. 그때 니네 큰아빠가 그동안 고생했다고 쌀 반 가마니 사주더라고. 그게 엄마가 시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거여. 쌀 반 가마니.”
1988년 6월, 마침내 분가해서 들어간 집이 바로 ‘공주슈퍼 집’(당시 동분이 살던 집은 상가건물 2층이었다. 1층에 슈퍼가 있었다. 슈퍼 이름이 ‘공주슈퍼’였다. 하여 동분은 이후에도 그 집을 ‘공주슈퍼 집’이라고 표현했다.)이다. 친정아버지 정명식과 마지막 추억을 나눴던 바로 그 집 말이다. 동분 가족은 이 집에서 1988년 6월부터 1991년 6월까지 3년 살았다. 그 3년을 떠올릴 때마다 동분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도대체 어떻게 먹고살았나 싶다.
“니네 아빠가 1991년 6월에 개인택시 받았잖어. 그러니까 1990년부터 개인택시 받을 때까지 거의 1년 반은 우리 집이 완전 개털이었어. 너도 운전 오래 했으니까 잘 알겄지만, 7년 무사고가 쉬운 일이 아니잖어. 내가 운전 잘해도 남이 와서 박을 수도 있는 거고. 그래가지고 니네 아빠가 무사고 6년 차부터는 운전을 아주 소극적으로 하더라고. 이게 뭔 말이냐면 회사택시 끌고 나가서도 영업을 제대로 안 했단 얘기여. 아차 하는 순간 사고 나면 도로 아미타불인데, 평소처럼 죽자 살자 손님 태우고 쌩쌩 달릴 수 있겄냐? 그러니 뭐, 사납금을 제대로 채웠겄어, 월급을 제대로 받았겄어. 굶어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지.”
동분은 그때부터 갖가지 부업을 시작했다. 이제 초등학교 들어간 주성과 4살밖에 안 된 주홍 놔두고 직장에 다닐 순 없었다. 제일 많이 한 부업은 신발 밑창 붙이는 일이었다.
“엄마가 제화공장에 3년 정도 다녔잖어. 아 왜 있잖어~!! 고순화 만난 게 제화공장 아녀~!! 그래가지고 신발을 좀 만질 줄 안단 말여. 집에 쪼만한 수레가 하나 있었어. 너를 업고, 수레를 끌고 한 30분 걸어가면 신탄진역 너머로 신발공장이 있었어. 거기서 신발 밑창을 한 수레 받아다가 본드칠 해서 붙이는 겨. 다 붙이면 다시 실어다 주고, 또 받아오고. 그러다 집에 불난 거 아녀.”
때는 1990년 늦가을이었다. 일찌감치 주성과 주홍 재우고 부엌에서 신발 밑창을 붙였다. 잘 자던 4살 주홍이 똥 마렵다면서 부엌으로 나온 건 늦은 밤. 공주슈퍼 집은 단칸방이어서 화장실이 외부에 있었다. 동분은 주홍이 똥 마렵다고 할 때마다 부엌 한쪽에 신문지를 깔아줬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한쪽에 신문지 깔아주고 신발 밑창 붙이는데 연탄불에서 갑자기 불길이 솟아 나오더라는 것.
“원래 본드가 굉장히 독한 거여. 그래가지고 평소엔 현관문 열어놓고 작업한단 말여. 근데 하필 그때 니가 똥 싼다고 하는 바람에……. 추울까 봐서 잠깐 현관문을 닫았지. 그랬더니 금방 본드가 공기 중에 꽉 찼나 봐. 그게 둥둥 떠다니다가 연탄불로 들어간 겨. 갑자기 불길이 솟아 나와서 쭈그려 앉아있던 너를 덮치는데 엄마가 얼마나 놀랬게. 주성 아빠~~!!! 불났어~~~!! 빨리 나와봐~~!! 막 소리치면서 너를 얼른 안아가지고 밖으로 나왔지. 니네 아빠가 후다닥 나와서 불은 금방 껐는데, 그 잠깐 찰나에 니가 화상을 입은 겨.”
곧바로 응급실로 간 주홍은 오른쪽 다리 전체와 엉덩이, 오른쪽 손가락 일부까지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응급처치하는 내내 동분은 차라리 악몽이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응급처치 끝내고 병실로 온 주홍은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이제 겨우 4살밖에 안 된 꼬마였다. 동분은 그 자리에서 졸도했다.
“지금 와서야 웃으며 얘기하지만 아휴, 그때는 진짜 가슴이 찢어질 것 같더라고.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낫지, 자식 아픈 거 보는 부모 마음이 성하겄냐. 근데 또 웃긴 게 뭔 줄 아냐? 그때도 니가 참 독하다고 생각했는데, 호호호. 그 어린놈이 아빠가 장난감 사준다는 말 한마디에 울음을 뚝 그치더라고.”
그럼에도 부업을 안 할 수 없었다. 부업해야 겨우 굶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도 안 될 때, 동분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친정으로 갔다. 김치와 밑반찬은 물론이고, 참기름이며 고추장, 고춧가루까지 얻어다 먹었다. 그러고도 부족할 땐 언니 정동순에게 전화해 돈을 빌리기도 했다. 동분은 그렇게 버텨냈다. 그리고 기어이 그날이 왔다.
매끄러운 이야기 진행을 위해 개인택시 관련 몇 가지 오해와 진실부터 얘기해야겠다. 회사택시 무사고 7년으로 개인택시 받았다고 하면, 보통은 택시회사에서 포상금 명목으로 개인택시 한 대를 ‘턱’ 하고 주는 거라고 오해한다. 전~혀 아니다. 무사고 운전경력 7년 충족하면 개인택시 몰 수 있는 ‘운송사업면허증’을, 택시회사가 아닌 해당 지자체에서 주는 거다. 고로, 송일영은 대전직할시장(1995년 1월 1일자로 직할시를 광역시로 일괄 개칭.) 직인이 박힌 면허증을 받은 거다. 그럼 자동차는? 매우 당연하게도 면허증 취득한 본인이 사야 한다. 하여, 1991년 6월 송일영은 3년 할부로 1,200만 원짜리 로열프린스를 샀다.
그러면 왜 그렇게들 개인택시에 목매느냐. 벌이가 다르다. 기사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회사택시보다 개인택시가 통상 1.5~2배 정도 번다. 회사택시는 말하자면 ‘기본금+인센티브’ 받는 영업직이다. 송일영이 회사택시 열심히 몰던 1989년, 월급이 약 40만 원이었다. 매일 사납금(회사택시 기사가 회사에 납부하는 당일 소득의 일부. 당시엔 3~4만 원이었다.) 채우고 집에 가져오는 초과금이라고 해봐야 5천 원~1만 원이었다. 그러니 한 달에 20일 이상 일해야 겨우 50~60만 원(월급 40만 원+초과금 10~20만 원) 정도 벌었다.
그럼 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아무리 회사택시라지만 사납금 포함 하루에 약 4만 원(시대 물가 감안하더라도) 밖에 못 번다고? 구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회사택시는 기본적으로 2인 1조다. 택시 한 대로 1명은 새벽부터 오후까지, 다른 1명은 오후부터 밤까지 맞교대하는 거다. 그러니 동분 표현이 딱 맞다. 회사택시 기사는 “매일매일 푼돈 찔떡찔떡 갖다주는” 직업인 거다. 그에 반면, 송일영이 개인택시 몰기 시작하고부터는 한 달 평균 110~120만 원, 많을 땐 130만 원까지 벌어왔다. 여기서 동분 얘길 들어보자.
“그 당시에 회사택시 한창 굴리다가 개인택시 받은 기사들이 과로사로 많이들 죽었어. 왜 그런가 하니 개인택시는 버는 족족 내 돈이잖어. 버는 재미가 쏠쏠하거든? 더군다나 회사택시 굴릴 땐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눠서 반나절씩만 일하잖어. 그랬던 기사들이 개인택시 받고 나서는 돈 버는 재미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택시를 굴리는 거여. 그러다 쓰러지는 거지. 아휴~ 왜 아니여. 니네 아빠도 새벽 6시면 택시 몰고 나갔어. 나가서 출근하는 사람들 한 바퀴 태워주고, 9시쯤 집 와서 아침 먹는 겨. 그러고 바로 또 나가서 오후 2시쯤 들어와서 점심 먹고 1~2시간 자. 피곤하겄지. 새벽부터 나가는데. 그렇게 한숨 자고 또 나가. 그러고 저녁 7~8시쯤 들어와. 와서 저녁 먹고 또 나가. 엄마가 그때는 니네 아빠 삼시세끼를 다 차려줬다는 거 아니냐. 호호호. 근데 진짜, 그때는 니네 아빠가 열~심히 했어. 안쓰럽기도 하고, 대단해 보이기도 했지. 그래가지고 엄마도 끼니마다 신경 써서 밥 차려 주고, 보약 챙겨 먹이고 그랬지.”
송일영은 늘 자정이 다 돼서야 귀가했다. 그때마다 만 원짜리 몇 장과 천 원짜리를 수북하게 내놓았다. 동분은 그 돈 받아서 한 장 한 장 세보는 재미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보통 6~7만 원, 장거리 뛰고 온 날은 10만 원도 넘게 가져왔다. 그렇게 한 달 20일을 꼬박 채웠다.(참고로 개인택시는 공급 과잉을 제한하기 위해 통상적으로 ‘3부제’를 실시한다. 이틀 일하면 하루는 강제로 쉬어야 한다.)
형편은 금세 좋아졌다. 돈 모이는 게 눈이 보였다. 물론, 개인택시 굴린다고 금방 부자 되는 건 아니었다. 2023년 기준, 개인택시 기사 하루 평균 수입은 15만2천 원, 월 평균 근무일은 18.7일, 월 평균 수입은 약 280만 원이다. 회사택시 굴릴 때와 비교해 좋아졌단 얘기다.
“시골 촌년이 무슨 돈이 있어서 은행에 가봤겄어. 그때 엄마가 31살이었는데, 태어나 처~음으로 은행 가서 적금이라는 걸 만들었다는 거 아니냐. 20만 원짜리 적금 통장이랑 5만 원짜리 청약통장 만들어 나오는데, 진짜루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더라고. 그 통장 두 개를 가슴팍에 소중히 안고 집에 오는데 괜히 눈물이 왈칵 쏟아지데? 왜 아니겄어. 1982년에 부랄 두 짝 밖에 없는 니네 아빠랑 결혼해가지고 시댁 들어가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겨우 분가했더니만, 개인택시 받는다고 또 형편 어려워져가지고 친정에 반찬 얻으러 다니고, 여기저기 돈 빌리러 다니고. 아휴, 그렇게 꼬박 10년 고생하는 바람에 100원 한 푼을 못 모은 거 아녀. 남들은 부모한테 재산 물려받아가지고 전셋집부터 시작해서 금방 내 집 마련하는데, 우리는 그때까지도 네 식구가 단칸방(공주슈퍼 집)에 살고 있었으니……. 겨우 10년 세월을 보상받는 느낌이 들더라고.”
동분 가족은 신탄진 공주슈퍼 집도 탈출할 수 있었다. 동분 가족이 이사한 곳은 신탄진에서 대청댐 방향으로 좀 더 들어가면 나오는 미호동. 마찬가지로 단칸방이었지만, 공주슈퍼 집보다는 좀 더 넓고 화장실도 실내에 있었다. 집 환경도 좋아졌지만, 결정적으로 이사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리 가족이 시댁에서 분가하고, 니네 큰아빠랑 큰엄마가 할머니 모시면서 1년이나 살았나? 그 집 식구도 못 버티고 나가버린 겨. 왜긴? 니네 할머니랑 큰엄마가 상극 아니냐. 니네 할머니도 대단한 성깔이지만, 큰엄마도 보통이 아니잖어. 큰아빠 가족이 나가는 바람에 그 넓은 시골집에 할머니랑 삼촌만 남은 거 아녀. 집 관리도 안 되고 하니까 니네 할머니가 1989년에 시골집 팔고 신탄진 시내로 이사를 온 거여. 하필이면 우리 집 근처로. 그때부터 또 수시로 우리 집 찾아와서 나를 들들 볶더라고. 왜 찾아왔겄어. 니네 삼촌이 맨날 술 먹고 사고만 치고 다니니까 돈이 없어서 찾아오는 거지. 돈 달라고. 근데 뭐, 우리 집은 퍽이나 돈이 있었냐? 그때 나도 친정에서 반찬 얻어다 먹고 돈 빌리러 다니던 시절인데. 그래가지고 개인택시 받자마자 미호동으로 이사한 겨. 좀 멀어지면 덜 찾아올까 싶어서. 신탄진 시내에서 미호동까지 들어오려면 버스 타고 한 20분은 와야 했거든. 반대로 우리 집은 이제 차가 한 대 생겼으니까 신탄진에 볼일 있어도 금방 왔다 갔다 할 수 있잖어. 호호호. 내가 머리를 쓴 거지.”
동분은 미호동 살면서부터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송일영이 쉬는 날이면 근교로 드라이브도 갔다. 주성과 주홍이 각각 학교와 유치원에 간 사이, 맛있는 점심 한 끼 사 먹고 왔다. 돌이켜보면 실로 오랜만이었다. 아니, 오랜만도 아니다. 결혼하기 전, 그러니까 송일영이 대한생명 충북지사장 수행비서로 일하며 포니 끌고 다니던 시절과 청주에서 신혼 살림할 때 몇 번 했던 데이트가 전부였다. 시집살이 시작하고 나서 데이트는커녕 단둘이 마음 편하게 외식 한 번을 못 했다. 그렇게나 무뚝뚝하던 송일영이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돈가스를 썰어서 입에 넣어줄 때, 동분은 이게 행복이구나 싶었다. 통장에 돈이 쌓이고, 생활이 안정되면서 동분은 진작부터 마음먹었던 일을 추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결혼식 말이다.
동분 말마따나 결혼할 당시 송일영은 “부랄 두 짝 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1982년 청주에 신혼집 차릴 때 세간 살림 마련한 것도 동분이었다. 형편 좀 나아지면 바로 결혼식 올리자고 했던 세월이 벌써 10년이나 흐른 거다.
“우리가 혼인신고만 하고 바로 살림 합쳤잖어. 당장 먹고살기 급급한데 결혼식을 어떻게 올리냐. 차일피일 미뤄왔던 거지. 근데 엄마도 여자잖어. 웨딩드레스 한 번은 입어봐야 할 거 아녀~! 니네 형이랑 너는 하루가 다르게 크지, 엄마랑 아빠는 점점 나이 먹어 가는데 더 미루면 안 되겠더라고. 통장에 돈도 좀 모였겠다, 1992년에 니네 아빠한테 얘기했지. 우리 이제는 결혼식 해야 하지 않겠냐고. 그랬더니, 니네 아빠가 진작 올렸어야 하는데 미안하다고 하더라고.”
동분과 송일영은 1992년 11월, 살림 합친 지 꼭 10년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동분 32살, 송일영 38살이었다. 양가 모두 무언가 해줄 형편은 아니었다. 송일영이 비상금 털어 순금 10돈으로 금반지와 금목걸이를 맞춰 동분에게 선물했다. 동분은 차곡차곡 모았던 적금을 깨 결혼식 비용을 충당했다. 어르신들 말씀 따라 주성과 주홍은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결혼식이라는 게 꼭 웨딩드레스를 입어서라기보다도 친척 어른들이랑 주변 지인한테 ‘우리 결혼합니다’ 하고 알리는 거잖어. 그때 벌써 니네 형이 10살이었는데 결혼식도 안 올리고 쭉 살아왔으니, 명절 같은 때 어른들 보기가 민망했지. 결혼식은 당연히 신탄진에서 했고. 니네 아빠나 엄마나 다 신탄진 사람인데 대전에서 할 수 있냐? 아휴 근데, 시골 예식장이라 그런가 신부 화장을 아주 촌스럽게 해준 거여. 엄마는 원래 화장을 진하게 하면 안 어울리는데 화장도 새빨갛게 하고, 머리도 이상 요란하게 해놔가지고, 얼마나 속상했나 몰라. 그래도 집에다가 결혼식 사진 크게 걸어놓으니까 이제 좀 정식 부부 같고 좋더라고. 호호호.”
신혼여행은 부산 태종대로 다녀왔다. 예식 끝나고, 동분과 송일영 친구들이 다함께 모여 뒤풀이 자리를 가졌다. 예상보다 자리가 길어졌다. 부산으로 출발한 건 저녁 8시. 스마트폰은커녕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이었다. 송일영은 오직 도로 안내판에 의지해 부산까지 갔다. 송일영의 유일한 자랑, 로열프린스를 끌고 말이다. 도착하고 보니 밤 12시였다. 부산까지 어떻게 오긴 왔는데, 이때부터 또 문제였다. 풍문으로만 듣던 태종대가 도대체 어딘지 알 수 없었던 것.
“니네 아빠가 갑자기 택시 한 대를 불러 세우는 겨. 그러더니 대전에서 신혼여행 왔는데 태종대 가는 길을 모른다, 택시비 줄 테니까 태종대까지 앞장서 달라, 쫓아가겠다, 하더라고 호호호. 그래가지고 대전 택시가 부산 택시 뒤를 졸졸 따라서 태종대까지 간 겨. 그 기사 아저씨가 숙소도 직접 잡아주더라고. 숙소 들어갔더니 벌써 새벽 1시여. 둘 다 피곤해서 바로 곯아떨어졌지. 그게 엄마, 아빠의 신혼 첫날밤이었다는 거 아니냐. 호호호.”
그래도 동분은 마냥 행복했다. 대단할 거 없는 2박 3일 신혼여행이었지만, 사진도 많이 찍고 그만큼 추억도 많이 남겼다. 신혼여행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동분은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개인택시 받기 전, 당장 밥 한 끼가 걱정일 때마다 동분은 오직 하나만 생각했다. ‘개인택시 받으면 좀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불안했다. 개인택시 받는다고 형편이 금방 나아질까, 우리 네 식구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지난 10년의 고생이 딱지처럼 굳어, 만성 같은 불안이 있었던 거다.
근데, 개인택시 받고 나니까 정말이지 모든 일이 거짓말처럼 풀리기 시작했다. 적금도 들고, 이따금 드라이브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시어머니 구박에서도 벗어나고, 이렇게 결혼식도 올리고 신혼여행까지 다녀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마침내는 청약까지 당첨됐다.
“송 씨 집안사람 중에 대한주택공사(한국토지주택공사의 전신, 2009년 한국토지공사와 대한주택공사가 통합해 한국토지주택공사로 출범) 다니는 아저씨가 하나 있었어. 그 아저씨가 일단 무조건 청약통장 하나 만들어서 꼬박꼬박 돈을 넣으라는 겨. 무슨 일 있어도 청약통장은 건들지 말고. 때 되면 자기가 정보 알려주고 서류 작성하는 거 도와주겠다고. 그래가지고 개인택시 받자마자 청약통장 만든 거 아녀. 그러고 1년이나 지났나? 월평동에 주공아파트(국민임대아파트)가 하나 나왔는데, 어차피 집 살 형편은 안 되니까 그게 딱 적당하다고 청약 신청 해보라고 하더라? 바로 신청했지. 그때는 그거라도 안 될까 봐 얼마나 노심초사하면서 기다렸다고. 그러고 얼마 있다가 전화 왔는데 청약에 당첨이 됐다는 거여. 아휴~!! 니네 아빠랑 둘이 부둥켜안고 울고불고 한바탕 난리를 떨었다는 거 아니냐. 호호호.”
동분과 송일영은 그때부터 쉬는 날이면 한 번씩 월평동에 갔다. 공사 현장 맞은편에 로열프린스 세워두고, 한참을 서서 구경했다. 겨우 11평밖에 안 되는 국민임대아파트였지만, 동분에겐 그 어느 대궐집 부럽지 않았다.
“그때 우리 집이 10층이었잖어. 공사 현장에 한 번씩 갈 때마다 아파트 올라가는 게 보인단 말여. 그럼 니네 아빠랑 1층부터 한 층, 한 층 세는 겨. 호호호. 그럼 엄마가 ‘주성 아빠, 벌써 7층까지 올라갔네. 조금 있으면 우리 집 공사 시작하겄다.’ 하면서 구경하는 거지. 월평동으로 이사할 때는 진짜 결혼식 할 때보다도 좋더라고. 좁아터진 집이었어도 일단 아파트 아녀. 그때가 1993년이었으니까 신탄진엔 아파트가 아예 없었고, 대전에도 아파트가 흔치 않을 때였거든. 아파트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지. 웃긴 게 뭔 줄 아냐? 호호호. 이사하고 얼마 있다가, 그 좁은 집에서 집들이하겄다고 니네 아빠 계모임하는 아저씨들을 잔뜩 초대했다는 거 아니냐. 엄마가 작정하고 한 상 푸짐하게 대접을 해줬지. 아휴 참~ 옛날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