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내 집 마련 분투기
동분은 현재 21평 아파트에서 송일영과 둘이 산다. 2021년 1억 6,800만 원에 매입했다. 매입 당시, 30년 만기로 1억 원을 대출받았다. 이자 포함 매달 43만 원씩 갚는다. 주성과 주홍이 조금씩 보탠다. 이 아파트는 완공한 지 20년도 넘은 옛날 아파트다. 동분이 매입하고 3년 지났지만, 집값이 크게 오르거나 내리지 않는다. 지금도 1억 6,000만 원 안팎으로 거래된다. 동분은 지금처럼 대출금 갚을 수 있을 때까지 갚아가며, 이 집에서 마지막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대한민국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내 집 마련’을 꿈꾼다. 동분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분과 송일영은 1982년, 보증금 없는 월세 2만 원짜리 단칸방에서 시작했다. 양가 부모의 지원은 없었다. 그야말로 밑바닥에서 시작한 신혼생활이었다.
그때부터 동분 가족은 무려 14번 이사 다녔다. 내 집 마련을 위한 고군분투였다. 한 번 이사할 때마다 딱 ‘반 보’씩 전진했다. 그렇게 40년이 흘러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부터 풀어낼 동분의 ‘내 집 마련 분투기’는 그 자체로 베이비부머가 겪은 보편적인 삶의 주기다.
1955~1963년 사이, 줄줄이 딸린 자식 가운데 하나로 태어난다. 보통 5남매, 많게는 9~10남매도 있다. 가난한 집안과 짧은 학업, 일찌감치 산업전선에 뛰어든다. 대한민국 산업화와 함께 20~30대를 보낸다. 40살 안팎, 그러니까 밀레니엄 전후로 처음 내 집을 마련한다. 그러다 1~2명밖에 안 되는 자식이 결혼할 때마다 집 평수 줄여 결혼 자금을 마련해준다. 그렇게 좁은 집에서 노년을 보내는 삶의 주기 말이다.
사실, 마지막까지 이 주제를 망설였다. 대체로 그러했듯, 동분 삶에도 두 번의 집값 상승이 있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다시 말해, 부동산 갭 투자는 아니었다. 차차 말하겠지만 동분과 송일영 두 사람 공히 그럴만한 기민함도, 재산도 없는 사람들이다. 살다 보니 집값이 올랐을 뿐이다. 그럼에도 두 번의 집값 상승은, 분명 동분 삶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걸 부정할 순 없다. 그래서 망설였다. 자칫 동분의 삶이 왜곡될까 봐. 그래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집값 상승과 하락 또한, 적어도 대한민국 현대사에선 보편적이라고 생각했다. 그 과정마다 마음 졸이고 대출금 갚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동분의 노력까지도.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들었다. 서울 평균 집값이 2023년 기준 13억 원에 육박했다는 기사를 봤다. 그런 마당에, 대출금 1억 원 깔린 지방의 1억 6,800만 원짜리 21평 아파트에 사는 동분 인생이 뭐 그리 대단할까 싶은 생각. 하여 모든 과정을, 심지어는 구체적인 금액까지도 가감 없이 기록하기로 했다.
거두절미하고, 동분의 ‘내 집 마련 분투기’ 시작한다. 시점은 1996년이다. 개인택시 받아 5년쯤 몰던 송일영이 5중 추돌 대형 교통사고로 로열프린스를 폐차했다. 석 달 만에 병원에서 퇴원한 송일영은 개인택시운송사업 면허(이른바 개인택시 번호판)를 3,950만 원에 팔아넘겼다.
대한운수면허협회 홈페이지 및 관련 기사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개인택시 면허의 평균 매매가는 9,150만 원이다. 다만, 지역마다 격차가 좀 크다. 시세가 가장 높은 곳은 세종특별시로 평균 2억 원이며, 시세가 가장 낮은 곳은 부산으로 평균 8,100만 원에 매매한다.
“얘기했던 것처럼 니네 큰아빠가 먼저 이불세일매장을 하고 있었잖어. 근데 니네 큰아빠 한다는 말이 3,950만 원을 전부 투자해서 커다란 창고 같은 걸 하나 얻어가지고 이불을 잔뜩 쌓아놓고 팔라는 겨. 창고 한쪽에 방 하나 만들어서 숙식 해결하고. 아휴, 그게 말이나 되냐? 내가 절대 안 된다고 펄쩍 뛰었지. 그때 니네 형이 14살, 너도 10살이었는데, 무슨 방 하나에서 다 같이 잠을 자고, 창고에서 밥은 또 어떻게 해서 먹고, 씻는 건 어뜩해 하냐고. 주방 살림은 생각도 안 하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겨.”
똑똑하고 잘난 형 송갑영 의견에 송일영은 흔들렸다. 어릴 때부터 형 말이라면 ‘꿈뻑’ 죽는 사람이었다. 동분은 단식투쟁하는 야당 정치인처럼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다행히도 며칠 고민하던 송일영이 동분 손을 들어줬다. 결국, 3,950만 원 가운데 2,500만 원을 동분이 따로 보관했다. 나머지 돈으로 1톤 탑차와 이불 사서 신탄진에 세일매장을 차렸다. 그때 2,500만 원 지키지 않았으면 여태 월세 살이 했을 거라며, 동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니들은 자꾸 크는데 11평 월평동 아파트에 살려니까 좁잖어. 말이 좋아 아파트지, 요즘은 어지간한 원룸도 10평은 넘는데 그런 집에서 네 식구가 살았으니. 그래가지고 엄마 생각에 일부는 이불가게 차리는 데 쓰고, 나머지 돈은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는 데 쓸려고 마음먹었던 겨. 그때 그 돈 이불 사는데 다 쓰고 창고에서 지냈어 봐라. 남는 거 아무것도 없지. 그나마 그 2,500만 원을 종잣돈 삼아서 우리가 여기까지 온 거여. 그 돈이라도 엄마가 안 지켰으면 완전 개털이었을 겨. 호호호.”
신탄진을 시작으로 대전 이곳저곳 다니며 이불세일매장을 차렸다. 보통 한 달, 길면 두어 달에 한 번 가게를 옮겼다. 그러다 새로 입주 시작한 아파트(이하 정림동 아파트) 상가에 가게가 하나 있다고 해 둘러보러 갔다. 동분은 그때 상상이나 했을까. 그 정림동 아파트에서 이후 23년이나 살 거라고 말이다.
“가게 자리가 괜찮아서 계약하고 장사를 시작했지. 그때가 신탄진에서 두 번인가 세 번째로 가게 옮겼을 때거든. 그러니까 2,500만 원이 계속 엄마 통장에 있었던 겨. 호호호. 목돈을 언제까지 가지고 있을 순 없으니까 엄마도 꾸준하게 이사할 집을 알아보던 참이었지. 근데 또 목돈이라는 게 그렇잖어. 갖고 있다 보면 조금씩 쓰게 되고, 그렇게 찔떡 찔떡 쓰다 보면 푼돈 되고. 니네 큰아빠는 틈만 나면 와가지고 지금이라도 큰 창고 얻어서 장사하라고 아빠 옆구리 쿡쿡 찌르지, 목돈 갖고 있기가 영 불안하더라고. 그러던 차에 그 상가에 있는 부동산 아줌마랑 얘기를 하게 된 거지.”
집을 알아보고 있다는 동분 말에, 부동산 중개업자가 분양권 ‘프리미엄’ 얘길 꺼냈다. 당시 정림동 아파트는 5년 임대 후 분양하는 민간임대아파트였다. 중개업자 말이, ‘프리미엄’을 주고 분양권 사서 5년 살다가 분양받으라는 거였다. 36살이었던 동분은 그때 처음 ‘프리미엄’이라는 걸 알았다.
“엄마나 아빠나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신탄진 촌년, 촌놈이었잖어. 프리미엄이 뭔지, 5년 임대 후 분양이 뭔지 알았겄냐? 월평동 주공아파트 청약됐던 것도 대한주택공사 다녔던 니네 아빠 집안사람 도움으로 된 거지, 우리가 뭘 알아서 됐던 게 아니잖어. 호호호. 부동산 아줌마가 그러더라. 엄마랑 아빠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으니까, 어떻게 이런 것도 모르냐고, 자기가 부동산 하면서 이렇게 순진한 부부는 처음 봤다는 겨. 호호호.”
우여곡절 끝에 동분은 16평 정림동 아파트 분양권을 프리미엄 300만 원에 샀다. 보증금은 1,800만 원이었다. 11평에서 16평으로, 겨우 5평 넓은 집으로 이사한 것뿐인데도 동분은 날아갈 듯 기뻤다.
“월평동은 주공아파트였잖어. 요즘이야 안 그렇지만, 그때만 해도 ‘주공아파트’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거든. 사실이기도 했고. 그런 주공아파트를 탈출했다는 것만으로도 뭔가 남다른 기분이 있었지. 그리고 월평동은 솔직한 말로다가 1.5룸 아녀. 거실 겸 안방에 코딱지만 한 방 하나 더 있었던 거니까. 벌써 느낌이 다르더라고. 거기서 한 2년 살았지.”
그러던 어느 날, 오가며 인사하던 옆집 새댁(당시 동분은 1407호, 새댁은 1408호였다.)이 이사 간다고 얘기하더라는 것. 참고로 해당 아파트는 4세대가 한 개 층에 있는데, 양 끝 집(1405호, 1408호)은 21평, 가운데 두 집(1406호, 1407호)은 16평이었다. 아쉽게 되었다며, 작별 인사 나누고 집에 온 동분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옆집으로 이사 가자.
“부동산 아줌마랑 처음 얘기할 때 원래는 21평으로 이사하려고 했거든. 당시에 21평은 프리미엄 500만 원에 보증금 2,500만 원이었어. 엄마 가진 돈이 2,500만 원이고, 월평동 아파트 보증금이 350만 원이었으니까, 이렇게 저렇게 좀 무리하면 될 것도 같더라고. 근데 하필 그때 21평이 없어가지고 아쉬운 대로 16평으로 이사했던 거거든. 3년만 더 살면 이제 1순위로 싸게 집을 사는 건데, 이왕이면 21평이 좋잖어. 니네 아빠한테 얘길 했지. 그랬더니 알아서 하라고 하더라고. 엄마도 이쪽으론 어둡지만, 니네 아빠는 완전 꽝이거든. 돈 관리를 아예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여. 그래가지고 새댁한테 프리미엄 300만 원을 더 얹혀주고 옆집으로 이사를 했다는 거 아니냐. 호호호. 그래도 그때 마침 모아둔 돈이 쬐금 있었거든. 그러니까 모든 게 딱딱 맞아떨어진 겨.”
새댁이 먼저 이사 나가고, 보름 있다가 동분 가족이 짐을 옮기기로 했다. 그 보름간, 동분은 퇴근하면 곧장 옆집으로 갔다. 가구 하나 없는 21평이 얼마나 넓은지, 동분 눈에 운동장 같았다. 그 집을 보름 내내 윤이 나도록 닦고 또 닦았다. 앞으로 3년만 있으면 ‘내 집’이라는 생각에, 동분은 힘든 줄도 몰랐다.
“거기가 21평 치고는 진짜 넓게 빠진 집이거든. 5평 차이인데도 16평이랑은 차원이 다르더라고. 제대로 된 방이 두 개나 딱 있고, 거실이랑 주방도 꽤 넓고. 너 기억 안 나냐? 그 집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식탁이라는 걸 샀다는 거 아니냐. 호호호. 그 정도로 21평 치고는 주방이 굉장히 넓었어. 주부 입장에서 살림하는 맛이 나는 집이었지. 아무튼 간에 퇴근만 하면 걸레 하나 들고 옆집부터 가는 겨. 이미 몇 번이나 닦아서 윤이 반들반들 나는데도 또 닦아. 창문도 다시 닦고, 화장실 바닥도 또 닦고. 호호호. 그렇게 매일매일 1시간씩 쓸고 닦았지. 다 닦고, 텅 빈 집에 혼자 벌러덩 눕는 겨. 그렇게 누워서 천장 올려다보고 있다가, 몇 번이나 울었다는 거 아니냐. 모르겄어~! 그냥 막, 말도 못 할 만큼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눈물이 나더라고.”
옆집으로 이사하는 거라, 이삿짐센터를 부를 필요는 없었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주성과 친구 서넛이 와서 짐 나르는 걸 도와줬다. 동분은 미안하고 또 고마워 짜장면에 탕수육, 깐풍기까지 주문해 주성 친구들을 대접했다. 그러고도 용돈으로 3만 원씩 줬다. 앞으로 자주 놀러 오라는 말과 함께. 1998년, 동분 나이 38살이었다.
2001년, 5년의 임대 기간이 끝났다. 분양 1순위로 내 집 마련을 한 거다. 당시 21평 정림동 아파트 매입가는 5,800만 원. 5년 임대 후 분양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주변 시세보다 저렴했다. 그럼에도 모아둔 돈이 없었던 동분은 3,000만 원을 대출받았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마침내 ‘내 집 마련’에 성공했다. 1982년 보증금 없는 월세 2만 원짜리 단칸방에서 시작한 지 꼭 20년 만이었고, 시댁에서 분가한 1988년부터 따져도 13년 만이었다. 동분 나이 41살이었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유형별 주택매매가격지수’에 근거해 2001년 매입가 5,800만 원인 대전 아파트를 2023년 6월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9,800만 원이 된다. 말하자면 결혼한 지 20년 만에 채 1억 원이 안 되는 21평 아파트를 겨우 매입한 셈이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1988년에 서당에서 나올 때 니네 큰아빠가 그동안 고생했다고 쌀 반 가마니(40kg) 사줬거든. 내가 시댁에서 받은 거라고는 진짜로 그게 전부였어. 그렇게 6살이었던 니네 형 안고, 이제 돌 지난 너 업고 보증금도 없는 월세 3만 원짜리 단칸방에서 시작한 겨. 그전에도 물론 고생 많이 했지만, 분가하고 나와서부터 또 얼마나 고생했게. 집 살 때도 사실 형편은 말이 아니었지. IMF에 홈쇼핑 타격으로 이불 가게 접고, 한창 길바닥에서 이불 팔 때였으니까. 그러니까 그 돈 3,000만 원이 없어서 대출받은 거 아녀. 어쨌든 간에 계약서에 도장 찍고 서류 받아 나오는데, 정말로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더라고. 그 과정을 견뎌낸 스스로가 너~무 대견스러운 거 있지. 호호호.”
문제는 대출금이었다. 동분이나 송일영이나 그전까지 그렇게 큰돈을 어디서 빌려본 적이 없었다. 내 집이 생겨 좋긴 한데, 한편으론 3,000만 원을 어떻게 갚아야 하나 걱정되더라는 것.
“지금은 대출 1억이나 낀 집에 살면서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거든? 그때는 그 3,000만 원이라는 돈이 진짜 엄~청 크게 느껴졌어. 그 집에서 사는 10년 내내 엄마한테는 그 돈이 항상 마음의 짐이었어. 왜, 그런 기분 있잖어. 방학 때 재밌게 놀다가도 잔뜩 밀린 방학숙제 생각하면 갑자기 우울해지는 기분. 엄마가 맨날 그랬다니까? 자려고 누워 있다가, 아휴 3,000만 원 언제 갚나 하면서 한숨 쉬고, 오랜만에 배부르게 외식하고 와서도 3,000만 원 생각하면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고. 호호호. 그만큼 어렸던 거지.”
동분은 그때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집이 마지막이라고. 겨우 방 2칸에 거실 딸린 21평짜리 아파트지만, 단칸방 살던 때 생각하면 감지덕지했다. 그것보다도 3,000만 원을 어떻게 갚을지가 더 큰 고민이었다. 그 정도로 길바닥 이불장사가 녹록지 않았다.
그렇게 10년 세월이 훌쩍 지났다. 그 사이 주성이 직업군인으로 4년간 군대 갔다. 전역하고 얼마 안 있어, 주홍이 독립했다. 그러니 방은 2칸이었어도 그럭저럭 지냈다. 그리고 2011년이 왔다. 그렇다. 지방 부동산이 요동치던 바로 그해였다.
2011년 대한민국 부동산은 매우 특수한 한 해였다. 수도권 아파트 시장은 글로벌 금융위기와 금융규제 강화 등 영향으로 수요심리가 크게 위축됐다. 이에 따라 2010년 매매가 대비 서울(-1.73%), 수도권(-0.5%), 인천(-3%) 등이 하락했다. 반면, 지방 아파트 시장은 수도권과 상반된 모습이었다. 공급물량 감소로 2010년부터 회복세(2009년 매매가 대비 경남(9.85%), 부산(9.22%), 전북(9.07%), 대전(5.7%), 전남(4.28%) 등이 상승했다.)를 보였던 지방 시장은 기업도시, 혁신도시, 여주엑스포, 광주유니버시아드,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등 지역별 개발 호재까지 겹치며 아파트값이 대폭 상승했다. 이 가운데 충청권도 과학벨트 선정, 세종시 개발 등 호재에 힘입어 매매시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2010년 매매가 대비 전북(15.57%), 부산(14.08%), 광주(13.42%), 경남(13.41%), 대전(12.92%) 등이 크게 상승했다.(<아시아경제> ‘2010 부동산 시장 결산 ① 호재마저 삼켜버린 침체’, <부동산 114> ‘2011년 결산-아파트 전세값 강세 속 소형과 지방 아파트값 상승’ 등 참조.)
“그때 우리가 104동 살았잖어. 그 104동에서 반장하던 아줌마가 있어. 엄마랑 동갑이라 오며 가며 친하게 지냈거든. 그 아줌마가 엄마한테는 아주 은인이여. 어느 날,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한다는 겨. 축하한다고, 부럽다고 했더니, 엄마한테도 빨리 집 알아보라고 하더라? 그래가지고 ‘아휴~ 내가 그럴 돈이 어딨어, 맨날 쪼들려서 이 집 대출금도 이자만 겨우 갚고 있는데.’ 그랬더니, 아줌마가 펄쩍 뛰면서 이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한다고, 지금 집값이 얼마나 올랐는데 그러냐고. 호호호. 엄마나 아빠나 바보 같아가지고, 사느라 집값이 오르는지 어쩌는지도 모르고 지냈던 겨.”
뒤늦게 알아보니 5,800만 원에 매입한 21평 정림동 아파트가 1억 500만 원까지 올랐다. 물론 그사이 10년이 흘렀지만, 동분은 놀라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 대출금 3,000만 원을 빼도 무려 7,500만 원이 남았다.
단돈 만 원이 아까워, 집어 들었던 과일을 도로 내려놓고 슈퍼에서 나온 게 도대체 몇 번인지, 부사관으로 군대 가 있던 주성에게 전화해 돈 빌려달라고 했던 건 또 몇 번이고, 주홍이 갖고 싶다던 나이키 신발 사주기로 해놓고 미룬 건 또 몇 번인지, 전국 팔도로 이불 장사 다니며 컵라면으로 끼니 때웠던 날들, 야채 장사 아르바이트하며 견뎌야 했던 갖은 수모까지. 지난 10년의 기억이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떠올랐다.
“결국, 반장 아줌마는 32평짜리 다른 동네 아파트로 이사 갔지. 가면서 엄마한테 같이 가자고 하더라고. 아휴 근데, 그 집으로 이사 가려면 또 1억이나 대출받아야 하는데 무섭더라고. 내 수준에 1억 대출받아서 언제 또 갚어. 3,000만 원 대출받은 것도 내내 마음의 짐이었는데. 그래가지고 104동 21평 집 팔고, 대출 7,000만 원 더 받아가지고 101동 24평짜리를 산 겨. 1억 4,700만 원에.”
누구처럼 부모님 도움 받아 전셋집부터 시작한 것도 아니었고, 또 누구처럼 벌이가 좋아 단숨에 24평까지 온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딱 ‘반 보’씩 전진했다. 단칸방에서 시작해 11평으로, 다시 16평으로, 또 21평으로, 마침내 24평까지 왔다. 꼭 30년이 걸렸다. 동분 나이 51살이었다.
“꼴랑 3평 차이였지만, 결정적으로다가 24평은 방이 세 칸이었잖어. 21평에 살 때 말이여. 이 집이 마지막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나중에 주성이, 주홍이 결혼해가지고 명절에 며느리랑 손주들까지 다 오면 어쩌나 걱정했거든. 방은 두 칸밖에 없는데 다 어디서 자냔 말이여. 그러다 방 세 칸짜리로 이사를 했으니 한시름 놨던 거지. 호호호. 엄마는 다른 것보다도 그 아파트 단지 안에서 누가 어디 사냐고 물어볼 때, ‘어~! 나 101동 살어~!!’ 그 한마디 하는 게 그렇게 기분이 좋았어. 호호호. 아 왜, 그 아파트 안에서는 101동이 젤 넓었잖어. 그러니까 다른 말 필요 없이 101동 산다는 말만 해도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던 거지. 호호호.”
시간은 다시 흘러, 2017년. 주성이 베트남에서 아내 데려온 시점이다. 당시 24평 정림동 아파트 구조는 이랬다. 동분이 혼자 쓰는 널찍한 안방, 주방 옆 주성이 쓰는 중간 방, 그리고 현관문 바로 옆 작은방(주홍이 아주 잠깐 썼고, 그 뒤로 줄곧 송일영이 머물렀다.), 거기에 적당한 거실과 주방까지.
“얘기했지만, 엄마는 처음부터 니네 형한테 따로 살라고 했었어. 근데도 굳이 굳이 같이 살겠다고 하더라고. 그래가지고 안 되겄어. 그래도 신혼인데 니네 형 쓰던 중간 방에서 신혼생활 하라고 할 수 있냐? 그래서 니네 형수 한국 오기 전에 형한테 안방 내주고, 엄마가 중간 방으로 간 거지. 그러고 나서 봤더니, 안방에 붙박이장이 떡하니 버티고 있잖어. 아무래도 옹색해 보이더라고. 그래서 또 부랴부랴 붙박이장 다 뜯어내고, 새하얀 옷장 작은 거랑 화장대랑 침대까지 엄마가 다 사줬지. 니네 형수가 베트남에서 왔으니까 무슨 혼수를 해올 수 있었겄냐. 몸만 왔지. 그러니까 내가 친정엄마 역할까지 다 해준거여. 호호호.”
그렇게 어떻게든 24평에서 살아보려 했다. 그러던 2018년 3월, 첫 손주 요섭이 태어났다. 유모차에, 장난감에, 베란다 짐은 자꾸만 늘어나지, 주성은 둘째, 셋째까지 계획하고 있으니, 도무지 답이 안 나왔다. 대책 없이 그저 한숨만 푹푹 내쉬던 2018년 11월이었다. 주성이 동분을 따로 부르더란다.
“니네 형 한다는 말이,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자는 겨. 자기가 다 알아봤는데, 자기랑 아빠는 개인사업자라(길바닥 이불장사, 택배기사 모두 개인사업자다.) 대출이 쉽지 않고, 엄마가 직장 다니니까(2018년 5월부터 대학병원 청소 시작) 대출이 될 거라는 겨. 엄마 명의로 대출 이빠이 땡겨서 아예 넓은 집으로 이사하고, 대출금이랑 이자는 자기가 전부 갚겠다고. 엄마는 그때까지 담보대출만 알았지, 직장인 담보대출이 뭔지도 몰랐어. 제대로 된 직장 생활을 한 번도 안 해봤잖어. 호호호. 그래서 ‘주성아, 엄마가 겨우 대학병원에서 청소하는 사람인데 대출을 해줄까?’ 했더니, 다 알아봤댜. 무조건 되니까 걱정 말라는 겨. 그래가지고 그때부터 또 집 보러 다니기 시작한 거지. 처음에 대략 훑어보니까 어설프게 이사할 거 같으면 안 가느니만 못하고, 어차피 갈 거면 적어도 34평으로는 가야겠더라고.”
그해 겨울, 동분은 참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주홍이 2018년 여름 이혼했다. 추석 즈음, 동분에게 문자 한 통 보내 이혼 사실을 통보했다. 그 뒤로 1년간 연락 두절이었다. 주홍이 어디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일 끝나면 집 보러 다니랴, 집 오면 집안일 하랴, 살이 쪽쪽 빠졌다.
“엄마가 원래 58kg 정도 나갔었는데, 쪽 빠져가지고 그땐 50kg 밖에 안 나가더라니까? 니 걱정 때문에 밥은 안 넘어가는데 그 와중에 또 이사는 해야 하니까 집 보러 다니느라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 그리고 엄마만 마음에 든다고 덜컥 결정할 수 있냐? 니네 형이랑 아빠는 둘째 치고, 니네 형수가 마음에 들어야 하잖어. 아휴, 그래서 진짜 계룡시부터 대전까지 수십 군데를 뒤지고 다닌 거 같어. 엄마가 마음에 쏙 들면 니네 형수가 싫다고 하고, 니네 형수가 좋다고 하면 엄마가 괜히 찝찝하고.”
우여곡절 끝에 결정한 곳이 복수동 34평 아파트였다. 동분은 2019년 1월, 24평 정림동 아파트를 1억 3,200만 원에 처분했다. 2011년 1억 4,700만 원에 매입했으니, 앉은 자리에서 1,500만 원을 손해 봤다. 8년간의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손해는 더 컸다. 24평에 깔려있던 대출금 7,000만 원 갚고 동분 수중에 떨어진 돈은 6,200만 원. 그것이 59살 동분과 65살 송일영이 평생 피땀 흘려 모은 전부였다.
손해도 손해지만, 동분은 정림동 아파트를 떠나는 것도 어쩐지 섭섭하게 느껴졌다. 주성이 중학교 1학년이던 1996년 처음 정림동 아파트로 왔다. 그때 동분 나이 겨우 36살이었다. 늘 다녔던 단골 슈퍼와 정육점, 미용실, 저녁 먹고 이따금 걸었던 천변 산책길, 주홍이 졸업한 정림초등학교, 오가며 늘 인사 나눴던 이웃들. 동분에게 정림동은 그런 동네였다. 발길 닿는 곳곳마다 추억이 깃든 곳, 가는 걸음마다 ‘아는 얼굴’이 있어, 반갑게 안부 주고받다보면 어느새 10분이 후딱,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할 수밖에 없던 동네, 그렇게 두 아들 키우며 인생 절반을 함께 한 동네였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그럼에도, 더 이상 이사를 미룰 순 없었다. 대출금 3,000만 원에 벌벌 떨던 동분이었는데 말이다. 세월이 켜켜이 쌓여 며느리를 보고, 손주까지 보더니 대담해졌던 걸까. 아마도 장성한 큰아들을 믿었기 때문이리라. 동분은 직장인 담보대출로 1억 5,000만 원을, 그야말로 ‘이빠이 땡겼다’. 그렇게 34평 복수동 아파트를 2억 200만 원에 매입했다. 단칸방에서 시작해 마침내 34평까지 오고야 만 거다.
“24평 살 때 니네 형수한테 제일 미안했던 게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는 거였거든. 그러니까 며느리랑 시아버지가 거실 화장실을 같이 쓰는 거 아녀. 니네 아빠야 무슨 상관이었겠냐만, 니네 형수는 여러 가지로 불편했겄지. 34평으로 이사하니까 다른 것보다도 그게 제일 좋더라고. 니네 형이랑 형수가 쓰는 안방에 화장실 따로 있는 거. 그리고 24평 살 때는 신혼 방이랍시고, 엄마가 혼수를 몇 가지 해주긴 했어도 옛날 아파트라 아무래도 옹색했거든? 근데 복수동 아파트는 안방이 진짜 운동장 같더라고. 안방이랑 안방 화장실 사이에 붙박이 화장대도 따로 있고. 애들 뛰어놀 수 있을 정도로 거실로 널찍하고. 그러니까 이래저래 엄마는 마음이 놓였지.”
영혼까지 끌어 모아 매입한 34평 복수동 아파트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동분에겐 신의 한 수였다. 2020~2021년 부동산 단기 폭등이 시작된 거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2021년 전국의 아파트값 상승률은 13.25%를 기록했다. 2020년(7%)에 이어 2배 가까이 오른 거다. 이는 2006년(13.95)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이었다. 주택 공급 부족과 시장 불안심리 확산에 따른 추격매수, 전세시장 불안 등이 이유였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복수동 34평 살 때가 엄마 인생에서 체력적으로 제일 힘들 때였어. 2020년에 둘째 민설이가 태어났잖어. 그때 엄마가 딱 60살이었는데, 새벽부터 나가서 병원 청소하고, 집 와가지고 니네 형수랑 교대로 애들 보고, 저녁 밥 차리느라 정신 없었지.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5분을 못 앉아있었다니까? 그런 와중에 2021년 되자마자 니네 형수가 셋째 임신한 거 아녀. 엄마도 이젠 할머니가 다 됐는데, 셋째까지 임신했다는 얘기 들으니까 진짜로 덜컥 겁부터 나더라고.”
그런 와중이었으니, 안 그래도 그쪽으로 어두운 동분이 집값 오르는지 어쩌는지 알 리가 없었을 터. 어느 날 슈퍼 갔다 온 송일영이 동분을 붙들고 그러더란다. 담배 하나 사 가지고 나오면서 옆에 부동산을 우연히 봤는데, 집값이 상당히 올랐더라는 것. 그때까지도 동분은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다. 그런 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러고 또 한 달이나 지났을까. 송일영이 동분에게 집값이 더 올랐다며 호들갑을 떨더라는 것. 평생 “돌 굴러가유~”만 하던 충청도 양반이 웬일인가 싶었다. 동분도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상가 오갈 때마다 부동산 한 번씩 봤지. 그랬더니 하루가 멀다고 집값이 폭등하는데, 와 진짜 무섭게 올라가데? 2019년 1월에 2억 200만 원 주고 매입한 아파트가 딱 2년 만에 2억 9,500만 원까지 올라간 겨. 안 그래도 니네 형수 셋째 임신했다는 얘기 듣고부터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무슨 돈이 있어야지 따로 살든가 말든가 할 거 아녀. 그런 참에 잘 됐다 싶더라고. 그래가지고 니네 형한테 얘기한 거지. 엄마가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안 되겄다, 집값 올랐을 때 얼른 팔아서 절반으로 나눠가지고 따로 살자. 그때 집값 안 올랐으면 여태 니네 형이랑 같이 살았을 겨. 생각만 해도 삭신이 쑤시는 기분이여. 호호호.”
2021년 5월, 동분은 34평 복수동 아파트를 2억 9,500만 원에 팔았다. 대출금 1억 5,000만 원을 제하고 남은 돈은 1억 4,500만 원. 동분과 주성은 정확히 절반으로 나눴다. 동분은 그 돈에 대출금 1억 원을 보태, 21평 관저동 아파트를 매입했다. 주성은 그 돈에 전세자금을 일부 대출 받아 옆 동네 27평 아파트로 들어갔다. 현재는 다자녀 1순위로 34평 아파트 청약에 당첨돼 열심히 돈 모으는 중이다.
“그래가지고 니네 아빠가 지금도 맨날 그 소리 하는 겨. 자기가 개인택시 번호판 양도한 돈으로 우리 가족이 먹고 산 거라고. 니네 형 7,250만 원 준 것도, 다 자기가 준 거나 다름없다고. 그때마다 엄마가 어이없어서 콧방귀를 뀐다는 거 아니냐. 호호호. 니네 아빠 말대로 그 2,500만 원 종잣돈 삼아 여기까지 온 건 맞지. 근데 뭐, 그게 그냥 알아서 굴러온 거냐? 고비 고비마다 엄마가 다 결정하고 발품 팔아서 이사 다니고, 주변 사람 도움 받아 가지고 여기까지 온 거지. 복수동 아파트 팔았을 때 1억 4,500만 원 남았잖어. 그게 딱 그거여. 개인택시 번호판 2,500만 원에다가, 21평 팔 때 한 4,000만 원, 34평 팔 때 한 9,000만 원 이득 본 거. 그거 세 개 합치면 딱 그 돈이여. 그러니까 니네 아빠나 엄마나 머리가 나빠 가지고 죽어라 일만 했지, 평생 100원도 못 모으고 그냥저냥 먹고만 산 겨. 호호호. 그러다가 이렇게 다 늙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