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엄마의 엄마
나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의 무조건적인 헌신과 그 헌신의 항상성을 말이다. 엄마니까, 혹은 자식이라서……. 모성애라는 세 글자로, 엄마의 삶은 해석되지 않았다. 엄마라고 자식에게 무조건 헌신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세상 모든 엄마가 자식에게 무조건 헌신하는 것도 아니다. 뿐더러 자식에게 무조건 헌신하지 않는 어떤 엄마를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각자의 삶은, 각자가 책임지는 거다. 그게 내가 아는 세상 이치다. 하여, 난 지금까지 내 삶을 책임지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엄마는 여전히 나와 형의 삶을 책임지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나로선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엄마의 엄마를 닮아있었다. 그렇게 살기로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엄마는 엄마의 엄마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그대로 밟아왔다.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외할머니 김춘자 씨에 관해 이야기하는 내내 엄마는 자주 머뭇거렸고, 한참을 고민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어렴풋이나마 엄마의 삶을 이해, 아니 수긍할 수 있었다.
머니 김춘자는 1933년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태어났다. 춘자 부(父)는 춘자 모(母)가 둘째를 임신했을 때 만주로 돈 벌러 떠났다. 지병으로 2~3년 만에 만주에서 돌아온 춘자 부(父)는 얼마 못 가 죽었다. 춘자 10살 때 일이다.
“어느 날인가 우리 엄니가 학교 갔다 왔더니만, 엄마랑 동생이 없더라는 겨. 어른들 입장에서도 어쩔 수가 없었던 거지. 아들은 죽었고, 어린 며느리랑 아이들만 남았는데 누가 다 먹여 살리냔 말이여. 그래가지고 며느리를 재가시킨 겨. 그때 우리 엄니는 10살이나 됐었으니까 못 따라간 거고, 우리 엄니의 여동생은 겨우 두 살배기였으니까 데려갈 수밖에 없었겄지.”
졸지에 고아가 된 춘자는 작은아버지 집에 얹혀살면서 할머니 손에 컸다. 그것도 불과 2년 남짓이었다. 춘자의 할머니는 춘자를 서울 부잣집 식모로 보냈다. 해방도 전이었으니, 먹고사는 형편들 빤했다. 입 하나라도 줄여야 남은 식구가 굶지 않을 수 있었다. 12살이었던 춘자는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모진 시절이었다.
“서울로 가서 고생을 무쟈게 했다더라고. 처음엔 식모살이도 하다가, 나중엔 기술 배운다고 미용실에서 먹고 자면서 일도 배우고. 아무튼 간에 이집 저집 떠돌아다니면서 한 5년을 거지처럼 보낸 거지. 그러다가 도저히가 힘들어서 다시 할머니한테 갔더니만, 밥 축내지 말고 일찌감치 결혼이나 하라고 중매를 섰다는 거 아녀. 그래가지고 17살 때 우리 아부지랑 결혼을 한 겨. 그런 거 보면 나랑 비슷하지 않냐? 나도 딱 우리 엄니 서울 갔을 나이에 동아책방 사장님 댁 들어가서 애 봐주고 집안일하고 그랬잖어. 그 뒤로 니네 아빠랑 결혼하기 전까지 공장 떠돌아다니면서 고생하고.”
춘자에게 결혼은 사랑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10살에 고아가 되어 17살까지 떠돌이 생활했던 춘자에게 누구와 결혼하느냐보다 중요한 건, 결혼 그 자체였다. 춘자에게 결혼은 정착이었다. 더 이상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것. 다시 말해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고, 삼시세끼 밥 먹을 때 누구 눈치 안 봐도 된다는 것. 춘자는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정명식과 결혼했고, 애석하게도 그건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이었다.
첩살이 하다, 일찍이 남편에게 버림받은 정명식 모(父)는 아들 하나만 바라보며 살았다. 춘자가 지독한 시집살이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나한테는 친할머니지. 아마도 할머니는 며느리한테 아들을 뺏겼다고 생각하셨던 거 같어. 그러니까 특별한 이유도 없이 괜히 우리 엄니를 괴롭혔다는 거여. 사사건건 시비 걸고 트집 잡고. 이건 아주 나중에 엄니한테 살짝 들은 얘긴데, 할머니가 부부생활도 방해했다더라고. 어쩌다가 분위기 좀 잡을라치면 어떻게 알고 귀신같이 쫓아와서 방문을 활짝 활짝 열어젖히더랴. 왜긴, 왜여. 며느리한테 질투하는 거지. 어쩌면 그래서 우리 엄니가 더 밖으로 나간 거 같어. 할머니가 안방이랑 부엌을 딱 차지하고 있으니까, 부딪히기가 싫었겄지. 집안 형편이 어렵기도 워낙 어려웠고.”
동분이 기억하는 ‘어머니’는 언제나 ‘일하는’ 어머니였다. 술과 도박으로 평생을 보낸 아버지 대신 가계를 책임진 건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손끝이 야무졌고, 수완이 좋았으며, 무엇보다 부지런했다. 동분의 어린 기억 속 어머니는 늘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바삐 움직였다. 대두를 사다 두부를 만들거나, 찹쌀가루를 사와 떡을 찌거나, 그것도 아니면 방앗간에서 짜온 기름을 소분해 포장했다. 그러고는 동도 트기 전, 준비한 걸 소쿠리 가득 머리에 이고 집을 나섰다.
“나는 어릴 때 우리 엄니가 쉬는 걸 못 봤어. 어쩌다가 새벽에 부스스 눈이 떠질 때가 있잖어. 마당으로 나가보면 엄니가 벌써 장사 나갈 채비를 마친 상태였어. 그럼 괜히 칭얼거리는 겨. 어린 마음에 엄마랑 놀고 싶어서. 그럼 엄니가 ‘우리 동분이 왜 벌써 일어났어. 들어가서 더 자. 엄마가 이때 저녁에 맛있는 사탕 사가지고 올게.’ 하고는 나가셨어. 그때 내가 국민학교도 들어가기 전이니까 엄니는 겨우 30대 초반이었잖어. 요즘 같으면 완전 애 아녀. 그런 나이에 애가 줄줄이 넷인 데다가 고약한 시어머니에, 무능한 남편까지 있었으니, 삶이 얼마나 고단했겄냐. 그게 벌써 60년 전 일인데도 가끔 그 장면이 생각나. 어슴푸레한 새벽녘 풍경에 이슬이 맺힐 것처럼 차가웠던 공기랑 고요하게 퍼지던 풀벌레 소리, 조금씩 조금씩 작아지다가 끝내 사라지던 엄니의 뒷모습까지. 그때마다 나는 툇마루에 걸터앉아서, 멀어지는 엄니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방으로 들어왔던 거 같어.”
시간은 흘러, 동분 13살 때 일이다. 당시 집엔 아버지와 어머니, 동분과 막내 여동생 현희까지 네 식구가 살았다. 맏이였던 큰언니 동순은 진작 결혼했고, 큰오빠 동근은 서천에서 고기잡이배를 탔다. 작은오빠 동운은 옆 동네 이발소에서 숙식하며 기술을 배웠다. 사달이 난 건 돈이었다.
“신탄진으로 이사 오고 6개월이나 지났나. 아부지가 도박 빚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 겨. 퇴직금 받아서 빚 갚는다고. 그 뒤로 아부지는 줄곧 술독에 빠져 지내셨고, 그러는 바람에 안 그래도 어렵던 우리집 형편이 완전히 박살 나버린 거지. 그러니까 하루가 멀다고 엄니랑 아부지랑 싸울 수밖에. 엄니는 어떻게든 자식새끼들 먹여 살릴라고 아등바등하는데, 아부지는 눈 뜨면 잠들 때까지 술이었으니. 그날도 저녁 내내 엄니랑 아부지랑 돈 문제로 싸우더니만 다음 날 아침 엄니가 사라진 거여.”
한겨울이었다. 쌀이고 연탄이고 쟁여놓고 지낼 형편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사라진 지 이틀 만에 연탄불이 꺼지고, 쌀이 똑 떨어졌다. 어머니 찾아오겠다며 아침부터 나간 아부지도 소식이 없었다. 당시 5살이었던 여동생과 동분은 냉기 도는 방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엉엉 우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해가 떨어질 무렵, 동분은 동생 손 꼭 잡고 집을 나섰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니까 방 안이 얼마나 추운가, 굶어 죽기 전에 얼어 죽게 생겼어. 안 되겄다 싶어서 현희 데리고, 작은오빠 일하는 이발소로 간 겨. 오빠 보자마자 또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 오빠한테 그간 있었던 일을 대강 얘기하고, 지금 집에 연탄불도 꺼지고 쌀도 떨어졌다고 했지. 그랬더니 오빠가 이발소 사장한테 돈을 얼마 가불 받아가지고 나오더니만 쌀 요만큼이랑 연탄 몇 장을 사주데. 그러면서 이거 가지고 집 가서 내일까지만 좀 버텨봐라, 엄니든 아부지든 오지 않겠냐, 하더라고.”
집으로 돌아온 동분은 작은오빠가 사준 연탄으로 겨우 불을 살리고, 냄비에 밥을 안쳤다. 평소 어머니가 일 나가기 전에 밥과 된장국을 한 솥씩 끓여놓고 나갔다. 그걸 아침, 점심으로 데워먹고 동생 돌보는 게 동분 역할이었다.
“그때 나도 겨우 13살이었잖어. 밥을 해봤겄어, 국을 끓여봤겄어. 그냥 대충 냄비에다가 쌀이랑 물 넣고 팔팔 끓인 거지, 뭐. 그랬더니만 이게 도대체가 밥인지 쌀인지 죽인지 모를 냄비 밥이 완성되더라고. 그 밥에다가 김치 하나 달랑 놓고 먹는데 또 울음이 터지는 거 있지. 결국 그날도, 그다음 날도 엄니랑 아부지가 안 돌아왔어. 엄니 집 나간 지 4일째 되는 날 아침이 되니까 연탄불이 또 꺼지고, 쌀도 떨어지고. 그러고 나니까 이게 현실인가 싶데? 그래도 처음엔 곧 돌아오겠거니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던 거 같어. 근데 4일이 됐는데도 감감무소식이니까, 우릴 버리고 영영 떠났구나 싶더라고.”
동분은 두렵고 무서웠다. 어머니 찾으러 나간 아버지가 곧 돌아온다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변변한 직장도 없이 매일 술만 마시는 아버지가 자신과 동생을 과연 보살펴줄까. 결국 자신과 동생은 보육원으로 가겠구나, 우리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져 부모 없이 고아로 살아가겠구나 싶었던 거다.
“그런 생각에 이르니까, 밥이고 뭐고 아무것도 하기 싫더라고. 그래서 그냥 종일 멍하니 누워있었던 거 같어. 현희는 5살이었으니까 돌아가는 상황을 잘 모를 거 아녀. 그러니까 옆에서 배고프다고 밥 달라고 계속 보채는데, 아휴. 지금 밥이 문제냐고. 그렇게 또 해가 뉘엿뉘엿 지는데, 엄니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겨. 뒤따라서 아부지도 들어오시고.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지. 호호호.”
사연은 이랬다. 돈이 똑 떨어져 당장 쌀과 연탄 살 돈이 필요했던 어머니는 큰아들 얼굴도 볼 겸, 답답한 마음에 바람도 좀 쐴 겸 서천에 갔던 거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 하필 큰아들이 고기잡이배를 타고 막 떠난 참이었고, 3일 뒤에나 돌아온단 얘길 전해 들었단다. 어머니 생각에,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빈손으로 돌아가기도 뭣하니 3일만 기다렸다가 큰아들 보고 가야겠다 싶었다고.
“그래가지고 큰오빠 숙식하는 집에서 하루를 자고 이튿날이 됐는데, 웬걸. 아부지가 불쑥 들어오더라는 겨. 부부가 이심전심이라고, 아부지 생각에도 큰아들한테 갔겠거니 하고 찾으러 갔던 거지. 호호호. 얼마나 우습냐. 큰오빠도 없는 빈집에서 엄니랑 아부지가 이틀을 더 보내고 큰오빠 만나서 돈을 얻은 겨. 그러고는 바로 생선이랑 쌀이랑 반찬거리를 바리바리 사가지고 집으로 오신 거지. 여하간 그때 내가 새삼 실감했다는 거 아니냐. 우리 집에서 엄니 존재가 얼마나 컸는지를. 얼마 전에도 내가 엄니한테 그 얘길 했다니까? 나는 엄니한테 너무너무 고맙다, 엄니가 돈을 많이 벌었든 적게 벌었든, 우리 공부를 시켰든 안 시켰든, 그런 걸 다 떠나서 고생고생하면서도 우리 형제들 안 버리고 끝까지 책임지고 보살펴준 거, 그거 하나만으로도 너무 감사하다고. 그렇지 않냐? 요즘 같아 봐라. 진작에 다 버리고 도망갔지.”
어머니가 본격적으로 직장생활 시작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둔 후였다. 두부랑 떡 같은 거 만들어 파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손끝이 야무졌던 어머니는 기숙사 식당에 취업했다.
“그러니까 내가 동아책방에서 나와 가지고, 공장 다니면서 기숙사 생활하던 때부터 우리 엄니는 공장 기숙사에서 내 또래 여공들한테 아침이랑 점심밥 해주면서 돈을 번 거여. 그 세월이 30년이다, 30년. 이 기숙사 저 기숙사 옮겨 다니며 넘 자식들 밥해 먹인 세월이……. 우리 엄니가 거의 70살까지 기숙사 식당에서 일했으니까. 그렇게 아부지 대신 집안 생계를 책임졌던 거여. 우리 형제들 결혼할 때나 집안에 무슨 일 있을 때 통장 깨고, 금가락지 팔았던 것도 엄니였고. 지금 엄니 혼자 사시는 집도 뭐 우리 형제들이 해드린 집인 줄 아냐? 엄니가 평생 조금씩 모은 돈에다가 마지막 기숙사 식당에서 받은 퇴직금 합쳐서 직접 마련하신 집이지. 동네 사람들이 우리 엄니를 괜히 ‘수단꾼’이라고 했겄어?”
그렇다. 어머니 김춘자는 동네에서 ‘수단꾼’으로 통했다. 숫기 없고 물렀던 아버지 대신 집안 대소사를 결정하고 해결하는 건 물론이요, 동네에서 벌어지는 굵직굵직한 문제까지도 김춘자가 두 팔 걷어붙여 처리했다. 동분이 기억하는 가장 큰 사건은 큰오빠의 구속이었다.
“요즘 법은 어떤가 모르겄는데, 옛날엔 자동차로 사람 치면 감옥에 가고 그랬어. 그때 큰오빠가 회사택시 몰던 때였는데 횡단보도에서 무단 횡단하는 사람을 쳤던 모양이야. 아부지도 그렇고 우리 형제들도 뭘 어째야 할지 몰라가지고 어버버 하고 있는데, 국민학교도 안 나온 우리 엄니가 여기저기 쫓아다니면서 알아보고 이리저리 돈을 마련하더니만 변호사를 사가지고 어찌어찌 해결하더라고. 그래가지고 교도소에서 한참 있다가 나올 큰오빠를 어떻게 금방 나오게 만든 겨. 그래도 몇 개월 살다가 나오긴 했는데. 그거 보면서 엄니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지. 아무튼 간에 엄니가 못 배웠어도 워낙 현명한 사람이었거든. 붙임성도 무쟈게 좋고, 추진력도 남달랐고. 한마디로 수단이 좋았던 겨. 동네 사람들도 뭔 일만 있다 하면 ‘춘자 언니’, ‘춘자 언니’ 하면서 우리 집으로 찾아왔었으니까.”
70살 가까워 은퇴한 김춘자는 가만히 쉴 성격이 아니었다. 소일삼아 경로당 다닌 지 불과 몇 개월 만에 경로당 살림을 떠맡았다. 얘기인즉, 경로당마다 매달 얼마간 정부 보조금이 나온단다. 그 돈으로 시장에서 장 봐다가 노인들 점심밥 한 끼 차려주면서 경로당 살림 관리해 줄 사람이 한 명 필요했다고. 평생 기숙사 식당에서 밥하는 게 직업이었던 데다가, 동네에서 수단꾼으로 통하던 ‘춘자 언니’ 말고 누가 하겠냐며 다들 등을 떠밀었던 것.
“인건비로 겨우 20~30만 원 정도 받았다는데, 누가 그 귀찮은 일을 나서서 하겄냐고. 그래가지고 또 엄니가 맡아서 했던 거여. 무려 15년이나. 그것도 계속 해달라는 거, 엄니가 나이도 있고, 이제 기력이 딸리니까 도저히 힘들어서 못 하겄다고 해가지고 80대 중반에 그만둔 거지. 그러니까 엄니의 삶을 가만가만 생각해 보면 진짜 아득해진다니까? 니가 한번 생각해봐라. 12살부터 식모살이 시작해가지고 80살 넘어서까지 밥벌이를 한 거 아녀. 자그마치 70년을. 그 긴 세월을 어떻게 말로 다 풀 수 있겄냐? 근데 또 웃긴 게 뭔 줄 아냐? 호호호. 내가 꼭 그러고 산다?”
동분은 그즈음이었던 거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경로당 살림 일마저 그만두고 얼마나 지났을까. 딸이 왔는데도 본체만체, 맥없이 TV만 보더란다. 그날 동분은 처음으로 ‘우리 엄니가 언제 이렇게 늙었지?’ 싶었다고. 어머니 손을 꼭 잡고 밖으로 나온 건, 그래서였다.
“딸이 셋이나 있으니까 엄니랑 뭘 해도 늘 다 같이 움직였지, 엄니랑 나랑 단둘이 어딜 가본 적은 없었던 거 같어. 근데 그날따라 왠지 엄니 옷 한 벌 사드리고 싶더라고. 그래가지고 엄니 모시고 중앙시장 가서 옷 구경도 실컷 하고, 황토색 예쁜 외투랑 신발도 하나씩 사드리고, 늘 가는 반찬가게 가서 팥죽도 한 그릇씩 먹고 그랬지. 엄니가 엄청 좋아하시더라고. 왜 아니겄어. 평생 바깥일만 하던 사람이 한동안 집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외출한 거니까.”
청소노동자로 병원에서 일하는 동분은 자주 죽음을 마주한다. 자식들 도움 받으며 몇 년씩 병원에 누워있는 환자도 이따금 본다. 입원이 길어질수록 환자와 가족이 모두 지쳐가고, 서로에게 가시 돋친 말을 내뱉고, 그러다가 환자가 눈을 감았을 때, 한편으로 안도하는 것 같은 가족을 볼 때마다 동분은 시선을 돌린다. 그럴 때, 동분은 어머니를 생각한다.
“평생 식당에서 밥 하고, 그 먼 길 걸어서 출퇴근하느라고 무릎이 성하질 않잖어. 그래가지고 거동이 좀 불편하시긴 한데, 그래도 우리 엄니가 벌써 92살 아녀. 연세에 비하면 엄청 정정하신 거지. 지금도 밥 한 그릇씩 잘 잡수시고. 그것만으로도 자식 입장에선 감사할 따름이지. 나도 니네 아빠 만나서 니들 낳고 키우다가 한세월 다 보낸 거 아니냐. 그렇게 살아보니까 새삼 더 그런 생각이 드는 거여. 우리 엄니, 참 고생 많이 했겄다. 그러니 내가 엄니한테 뭘 더 바라겄냐. 지금처럼 건강하게 지내셨으면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