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주홍 Dec 28. 2023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12 가사 노동사 ①

고등학교 3학년 때 얘기다. 야간자율학습까지 마치고 집에 오면 밤 11시였다. 집에 들어서면 언제나 엄마가 날 반겼다.      


“고생했어, 우리 아들.”

“어.”     


직장인이 회사에 나가듯 공부하는 게 당연한 학생이었건만, 뭐 대단한 일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항상 입이 ‘대빨’ 나와 있었다. 또 뭐가 그렇게 늘 화가 났었는지, 작은 일에도 불같이 신경질 냈다.      


“엄마!!! 내 방 청소는 하지 말라니까!!”

“…….”   

  

그러고는 또 당연하다는 듯, 식탁에 앉아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았다’. 밤 11시에 말이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당시 엄마는 나보다 1시간이나 일찍 일어났다. 한 숟갈이나 두 숟갈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말 아침밥, 그 한 숟갈이나마 먹여 보내기 위해서였다. 속이 든든해야 공부도 잘되는 거라면서. 그렇게 철부지를 학교에 보내고 엄마는 종일 식당에서 음식 서빙하고 김밥을 말았다. 집에 돌아와 저녁 준비하고, 아빠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까지 하고 나면 밤 10시. 겨우 앉아 30분쯤 쉬었다가 또다시 작은아들 식사를 준비했을 거다. 찌개가 보글보글 끓어오를 즈음 나는 또 입을 ‘대빨’ 내밀면서 들어왔을 테고, 엄마는 늘 그랬듯 내 어깨를 토닥이며 이렇게 말했다.     


“고생했어, 우리 아들.”      


수험생이었어 봐야 대단하게 열심히 한 것도 아니건만, 배는 또 왜 그렇게 늘 고팠는지 모르겠다. 우걱우걱 잘도 먹었다. 그때마다 엄마는 맞은편에 앉아, 밥숟갈 위에 반찬도 올려주고, 생선 가시도 발라줬다. 내가 밥 다 먹고 씻으러 가면 엄마는 또다시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그제야 화장을 지웠다. 우리 집에서 마지막으로 씻는 사람은 엄마였다. 밤 12시였다.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하지 않은 걸 당연하다고 여기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있었을 뿐. 그렇다. 이기심과 암묵적 동의와 강요된 희생으로 빚어낸 역사, 동분의 ‘가사노동사(家事勞動史)’를 다뤄보려는 참이다.           


1982년, 청주에서 신혼살림하기 직전. 

허연 오뎅국과 뻘건 오뎅국


술과 노름으로 인생 허비한 아버지 대신 밥벌이해야 했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 대신 살림 책임졌던 언니. 그랬던 언니가 결혼한 건 동분 12살 때다. 그때 동분은 다니던 학교를 그만뒀다. 이제 4살밖에 안 된 막내 여동생 돌보고 살림할 사람이 집안에 동분밖에 없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도무지 끝이 안 보이는 가사노동의 역사 말이다.      


“그때 겨우 국민학교 5학년이었는데 요리를 했겄어, 뭘 했겄어. 엄니가 일하러 나가기 전에 항상 커다란 양은 냄비에다가 무 넣고, 파 넣고, 멀겋게 된장찌개 끓여놓고 갔단 말여. 그럼, 낮에 그거 다시 끓여가지고 니네 작은이모랑 밥 해먹고 설거지 해놓는 정도였지. 청소랑 빨래나 좀 하고. 그나마도 2년 정도였지. 14살 때 동아책방 사장 댁으로 들어갔으니까.”     


그때부터 섬유, 통조림, 제화 공장 등을 전전하며 기숙사에서 지냈다. 살림은커녕 요리할 일도 많지 않았다. 그러다 22살에 송일영과 청주에서 신혼집 차렸다. 그런 동분이 남편 위해 해줄 수 있는 요리는 딱 두 가지였다. ‘허연 오뎅국’과 ‘뻘건 오뎅국’. 청주에서 지낸 1년간, 동분은 주야장천 오뎅국만 끓였다.       


“오뎅국이 뭐 별거냐. 우선 무 납작하게 썰고, 오뎅도 무 크기만큼 적당하게 썰어서 준비해. 무랑 오뎅 비율은 1대1이여. 그다음에 맹물에다가 무 넣고 끓이는 거지. 그때는 육수 뽑을 줄도 몰라서 그냥 맹물로 했어. 호호호. 그렇게 팔팔 끓으면 오뎅 넣고, 다진 마늘이랑 파 넣고, 한 번은 고춧가루 넣았다가 한 번은 안 넣었다가 하는 겨. 마지막에 소금이랑 미원 조금 넣어서 간 맞추고. 그때는 무조건 미원이었어. 미원만 넣어도 어지간하면 맛이 나니까 많이들 썼지.”     


오뎅국이 쉽고 간단한 요리여서 자주 끓인 것도 있지만, 형편도 형편이었다. 없는 형편에 매번 고깃국이나 생선조림을 준비할 순 없었다. 그러자니 만만한 게 오뎅이었다. 송일영이 오뎅 싫어한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그래가지고 니네 아빠가 지금도 얘기하잖어. 호호호. 자기는 오뎅을 그렇게나 싫어하는 사람인데, 맨날 오뎅국만 얻어먹었다고. 그러니까 엄마가 우스워죽겠는 겨. 니네 아빠 입맛이 좀 까다롭냐? 지금도 반찬 투정을 얼마나 하는데! 그런 양반이 그때는 1년 내내 오뎅국 끓여줬어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잘 먹었다니까? 호호호. 말하자면 사랑의 힘으로 극복했던 거지.”     


그랬던 동분이 가사노동의 늪에 빠지기 시작한 건 신혼 1년 만에 시댁으로 들어가면서다. 시집살이 첫날부터 동분은 시어머니에게 된통 깨졌다. 수저를 제대로 놓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엄마는 요리할 줄 몰랐잖어. 그래가지고 니네 할머니가 요리하는 동안 행주로 밥상 훔치고, 밑반찬 꺼내놓고, 수저 놓고 그랬지. 엄마 딴엔 첫날이라고 수저도 가지런하게 놓는다고 신경 써서 놓고 있는데, 니네 할머니가 와가지고는 ‘너는 수저 하나를 제대로 못 놓냐? 도대체 뭘 배워왔냐?’ 하면서 대뜸 소리를 빽빽 지르는 겨. 그러고는 내 손에 든 수저를 ‘홱’ 빼앗아 가더니 숟가락을 왼쪽에, 젓가락을 오른쪽에 ‘탁탁’ 소리 나게 내려놓는 거 있지. 엄마가 얼마나 놀랬다고. 니네 할머니 성질이야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 비로소 실감한 거지. 아, 시작이구나.”     


동분의 시어머니는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기어이 쫓아와 빗자루든 걸레든 뺏어 들고, 소리를 지르고, 친정을 들먹이며 면박을 주고 나서야 물러갔다. 동분은 그렇게 농사를 배우고, 된장과 고추장과 김치를 담글 수 있었으며, 된장찌개와 생선조림을 끓이게 됐다.        

매거진의 이전글 14번의 이사와 반 보 전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