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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홍 Dec 28. 2023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12 가사 노동사

시댁으로 올 때는 모든 일들을 각오는 하고 왔지만 참으려 하는 마음이야 오죽하랴. 청주엘 갔다 조금 늦게 왔더니 어머님께서는 잘못된 모든 일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시며 그이에게 말씀을 하셨다. 난 너무도 어이없는 일이고 며느리들은 다 그럴 것이다 하며 이해하고 말았다. 난 사실 못된 거짓말은 하지 않는데도 어머님께서는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나중에 나이를 먹으면 모든 것은 해결되리라. 내 마음을 알아줄 날들이 오리라는 그런 생각뿐이다. 정말 어렵다. 『동분의 일기』 1983년 5월 25일 中           


1982년, 청주에서 신혼살림하기 직전. 

암묵적 동의와 강요된 희생 


고등학교 3학년 때 얘기다. 야간자율학습까지 마치고 집에 오면 밤 11시였다. 현관문을 열면 언제나 엄마가 날 반겼다.      


“고생했어, 우리 아들.”

“어.”     


직장인이 회사에 나가듯 공부하는 게 당연한 학생이었건만, 대단한 일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항상 입이 ‘대빨’ 나왔다. 또 뭐가 그렇게 늘 짜증이 났는지, 작은 일에도 불같이 화를 냈다.      


“엄마!!! 내 방 청소는 하지 말라니까!!”

“…….”     


그러고는 또 당연하다는 듯, 식탁에 앉아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았다’. 밤 11시에 말이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당시 엄마는 나보다 1시간이나 일찍 일어났다. 한 숟갈이나 두 숟갈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말 아침밥, 그 한 숟갈이나마 먹여 보내기 위해서였다. 속이 든든해야 공부도 잘되는 거라면서. 그렇게 철부지를 학교에 보내고 엄마는 종일 식당에서 음식 서빙하고 김밥을 말았다. 집에 돌아와 저녁 준비하고, 아빠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까지 하고 나면 밤 10시. 겨우 앉아 30분쯤 쉬었다가 또다시 작은아들 식사를 준비했을 거다. 찌개가 보글보글 끓어오를 즈음 나는 또 입을 ‘대빨’ 내밀면서 들어왔을 테고, 엄마는 늘 그랬듯 내 어깨를 토닥이며 이렇게 말했다.     


“고생했어, 우리 아들.”      


수험생이었어 봐야 열심히 한 것도 아니건만, 배는 또 왜 그렇게 늘 고팠는지 모르겠다. 우걱우걱 잘도 먹었다. 그때마다 엄마는 맞은편에 앉아, 밥숟갈 위에 반찬도 올려주고, 생선 가시도 발라줬다. 내가 밥 다 먹고 씻으러 가면 엄마는 또다시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그제야 화장을 지웠다. 우리 집에서 마지막으로 씻는 사람은 엄마였다. 밤 12시였다. 이기심과 암묵적 동의와 강요된 희생으로 빚어낸 역사, 동분의 ‘가사노동사(家事勞動史)’다. 



허연 오뎅국과 뻘건 오뎅국


술과 노름으로 인생 허비한 아버지 대신 밥벌이해야 했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 대신 살림 책임졌던 언니. 그랬던 언니가 결혼한 건 동분 12살 때다. 그때 동분은 다니던 학교를 그만뒀다. 이제 4살밖에 안 된 막내 여동생 돌보고 살림할 사람이 없었다. 동분 말고는. 그게 시작이었다. 도무지 끝이 안 보이는 가사노동의 역사 말이다.      


“그때 겨우 국민학교 5학년이었는데 요리를 했겄어, 뭘 했겄어. 엄니가 일하러 나가기 전에 항상 커다란 양은 냄비에다가 무 넣고, 파 넣고, 멀겋게 된장찌개 끓여놓고 갔단 말여. 그럼, 낮에 그거 다시 끓여가지고 니네 작은이모랑 밥 해먹고 설거지 해놓는 정도였지. 청소랑 빨래나 좀 하고. 그나마도 2년 정도였어. 14살 때 동아책방 사장 댁으로 들어갔으니까.”     


그때부터 섬유, 통조림, 제화 공장 등을 전전하며 기숙사에서 지냈다. 살림은커녕 요리할 일도 많지 않았다. 그러다 22살에 송일영과 청주에서 신혼집 차렸다. 동분이 할 수 있는 요리는 딱 두 가지였다. ‘허연 오뎅국’과 ‘뻘건 오뎅국’. 청주에서 지낸 1년간, 동분은 주야장천 오뎅국만 끓였다.       


“오뎅국이 뭐 별거냐. 우선 무 납작하게 썰고, 오뎅도 무 크기만큼 적당하게 썰어서 준비해. 무랑 오뎅 비율은 1 대 1이여. 그다음에 맹물에다가 무 넣고 끓이는 거지. 그때는 육수 뽑을 줄도 몰라서 그냥 맹물로 했어. 호호호. 그렇게 팔팔 끓으면 오뎅 넣고, 다진 마늘이랑 파 넣고, 한 번은 고춧가루 넣았다가 한 번은 안 넣었다가 하는 겨. 마지막에 소금이랑 미원 조금 넣어서 간 맞추고. 그때는 무조건 미원이었어. 미원만 넣어도 어지간하면 맛이 나니까 많이들 썼지.”     


오뎅국이 쉽고 간단한 요리여서 자주 끓인 것도 있지만, 형편도 형편이었다. 없는 형편에 매번 고깃국이나 생선조림을 할 순 없었다. 그러자니 만만한 게 오뎅이었다. 송일영이 오뎅 싫어한다는 건,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그래가지고 니네 아빠가 지금도 얘기하잖어. 호호호. 자기는 오뎅을 그렇게나 싫어하는 사람인데, 맨날 오뎅국만 얻어먹었다고. 그러니까 엄마가 우스워죽겠는 겨. 니네 아빠 입맛이 좀 까다롭냐? 지금도 반찬 투정을 얼마나 하는데! 그런 양반이 그때는 1년 내내 오뎅국 끓여줬어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잘 먹었다니까? 호호호. 사랑의 힘이었던 거지.”     


그랬던 동분이 가사 늪에 빠지기 시작한 건 신혼 1년 만에 시댁으로 들어가면서다. 첫날부터 동분은 시어머니에게 된통 깨졌다. 수저를 제대로 놓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엄마는 요리할 줄 몰랐잖어. 그래가지고 니네 할머니가 요리하는 동안 행주로 밥상 훔치고, 밑반찬 꺼내놓고, 수저 놓고 그랬지. 엄마 딴엔 첫날이라고 수저도 가지런하게 놓는다고 신경 써서 놓고 있는데, 니네 할머니가 와가지고는 ‘너는 수저 하나를 제대로 못 놓냐? 도대체 뭘 배워왔냐?’ 하면서 대뜸 역정을 내는 겨. 그러고는 내 손에 든 수저를 ‘홱’ 빼앗아 가더니 숟가락을 왼쪽에, 젓가락을 오른쪽에 ‘탁탁’ 소리 나게 내려놓는 거 있지. 엄마가 얼마나 놀랬다고. 니네 할머니 성질이야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 비로소 실감한 겨. 아, 시작이구나.”     


시어머니는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기어이 쫓아와 빗자루든 걸레든 뺏어 들고, 소리를 지르고, 친정 들먹이며 면박을 주고 나서야 물러갔다. 



자급자족해야했던 산골살림


대전광역시 대덕구 상서당1길 OO. 그러니까 동분이 줄곧 “서당살 때”라고 표현하는 시댁(이하=서당)은, 철길 건너 산길을 10분쯤 걸어 올라가야 나오는 산골 마을이었다. 시댁 포함 다섯 가구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니 편의시설이랄 게 전혀 없었다. 시장 한 번 다녀오는 게 일이었다. 거의 모든 걸 자급자족할 수밖에 없었다.     


“니네 할머니가 소, 돼지, 닭을 아예 안 드셨잖어. 냄새난다고. 생선 중에서도 갈치나 동태, 양미리 같은 거, 비린내 안 나는 것만 조금씩 드셨지. 그러니까 시장 갈 일이 거의 없었지. 그런 데다가 밭에서 메주콩, 배추, 열무, 옥수수, 대파, 상추, 감자, 호박, 가지, 풋고추까지. 아무튼 간에 어지간한 야채는 다 길러 먹었으니까. 마당에 자두나무 큰 거 하나랑 앵두, 대추나무도 있었고, 마당 수돗가 한쪽에 미나리깡도 있었거든. 그러니 쌀이랑 소금, 양파랑 마늘 같은 거, 가끔 생선만 시장에서 사다 먹었지, 뭐.”     


서당의 1년 살림은 3월부터 시작이었다. 앞마당 텃밭에 감자, 대파, 옥수수, 가지, 시금치, 아욱 등을 시작으로 4월이면 고추, 호박, 상추, 5월엔 뒷마당 산자락에 메주콩을 심었다. 철마다 시어머니가 앞장서고, 동분이 뒤따랐다. 동분은 그전까지 줄곧 공장만 다녔다. 농사는커녕 호미 한 번 잡아보지 않았다. 모든 게 서툴렀다. 그때마다 시어머니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찼다. 그러면서 꼭 한마디를 붙였다.     

 

“너는 도대체 집에서 뭘 배워왔냐?”

“…….”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잔소리 들어가며 농사일 배우고 살림을 익혔다. 봄부터 초여름까진 미나리깡에서 키운 돌미나리와 텃밭 상추, 아욱, 시금치 등이 주된 찬거리였다.      


“미나리깡에서 미나리가 얼마나 잘 자랐다고. 한 움큼씩 베어다가 줄기는 김칫국물 담가 먹고, 여린 이파리는 훑어서 식초랑 고춧가루 넣어서 새콤하게 무쳐 먹었지. 아무튼 간에 여름까지는 미나리가 밥상에서 안 빠졌어. 그렇게 베어 먹어도 금방금방 줄기가 올라왔으니까. 그러고 아욱, 시금치 같은 건 물에 살짝 데쳐서 된장이랑 들기름 넣고 무쳐 먹거나 된장국에 넣어서 끓여 먹고. 상추 이파리 올라오면 따다가 쌈 싸 먹고. 시골 밥상이 뭐 있냐? 맨날 김치에 된장국 아니면 된장찌개지. 그냥 척척 하긴? 니네 할머니한테 다~ 혼나면서 배운 겨. 얘기했잖어. 청주에서 신혼 살림할 때 오뎅국밖에 못 끓였다고. 그러니 얼마나 깨졌겄냐. 아휴~ 말도 말어. 아무튼 뭐 하나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어. 너도 알잖어, 니네 할머니 성깔. 얼마나 까다롭고 깔꼼 떠는 양반이었냐.”     


초여름이면 감자를 수확했다. 수확한 감자는 뒷광 흙바닥에 풀어놓고, 1년 내내 골라 먹었다. 채 썰어서 소금이랑 후추 뿌려 볶아도 먹고, 간장 넣어서 졸여도 먹고, 납작 썰어서 감잣국도 해 먹었다. 감자를 시작으로 여름부턴 먹거리가 풍성했다. 옥수수, 호박, 가지, 풋고추, 자두, 앵두 등이 저마다 달렸다. 가지는 식용유에 달달 볶아먹거나 물에 데쳐서 고춧가루 뿌려 무쳐 먹었다. 호박은 감자와 함께 된장찌개에 숭덩숭덩 썰어 넣었다. 새우젓 넣고 자박자박 졸여 먹기도 했다. 호박 이파리도 손질해 쪄서 밥에 싸 먹거나 절구로 으깨 된장국에 넣어 먹었다. 끼니마다 풋고추와 상추도 빠지지 않았다. 긴긴 여름밤이면 자두나 앵두 따다 씻어 먹고, 옥수수 따다 ‘뉴슈가’ 한 숟갈씩 퍼 넣어 쪄먹었다. 옥수수 껍질 벗길 때 수염은 따로 말려 차로 우려먹었다. 무엇 하나 허투루 버리지 않았다. 


그런 모든 순간 시어머니가 앞장서고, 동분이 뒤따랐다. 시어머니는 뭐든 자신이 직접 해야 직성 풀리는 타입이었다. 어떤 일이든, 그러니까 농사든 요리든 살림이든 동분에게 전적으로 맡기지 않았다. 설령 맡겨도 끝내는 본인이 와서 다시 해야 비로소 일이 마무리됐다.    

  

“그러니까 서로 피곤한 겨. 차라리 모든 살림을 맡기고 신경 안 써주면 엄마가 마음이라도 좀 편할 거 아녀. 아니면 아예 당신 혼자서 다 하시던가. 그것도 아니면 딱 나눠서 역할 분담을 하던가. 이건 뭐, 시켜놓고 사사건건 쫓아다니면서 잔소리를 해대니 니네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피곤한 거고, 엄마는 엄마대로 몸고생, 마음고생을 다 한 겨. 근데 또 지금 와서 가만가만 생각해 보면 니네 할머니가 뭐 대단하게 잘못했나 싶어. 성깔이 좀, 아니 대~단~하게 까다로웠다 뿐이지. 호호호. 그냥, 그 시대가 그랬던 거지, 뭐. 아무튼 니네 할머니도 스스로를 가만 못 두는 양반이라, 평생 고생만 하다가 갔어. 세월이 오래 지나서 그런가? 가끔 니네 할머니 생각하면 짠한 마음이 든다?”      


예순 넘은 노파와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새댁은 새벽부터 일어나 마당을 쓸고, 아이들을 씻기고, 아침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수돗가에서 손빨래하고 청소를 하고, 밭일하고 점심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밭일하고 저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야식을 챙겼다. 당시 서당엔 시아버지부터 시어머니, 시동생, 동분과 송일영, 주성과 조카 영희와 철수까지. 대식구 여덟 명이 살았다. 감자를 수확하고 노는 텃밭에 7월이면 배추와 무 씨를 사다 뿌렸다. 



산골 살림 기본이었던 장 담그기 


산골 살림 기본은 장 담그기였다. 장을 담글 줄 알아야, 비로소 살림 한다는 소릴 들었다. 과정이 제일 복잡하고 까다로운 건 된장이었다.      


“서당 집이 산을 등지고 있었거든. 집 뒷마당이랑 산의 경계가 말하자면 메주콩 밭이었어. 5월쯤, 날이 푹해지기 시작할 때 메주콩을 뿌리는 겨.”  

   

지력이 좋아, 뿌려만 놓으면 그런대로 자랐다. 11월이면 수확해 마당에 늘어놨다. 가을 햇볕 받은 콩대는 이틀이면 넉넉히 말랐다. 타작은 시아버지 담당이었다. 시아버지가 도리깨질할 때, 동분은 달달한 설탕물을 타다가 드렸다. 


골라낸 메주콩은 커다란 가마솥에 넣어 반나절 동안 삶다가 두어 시간을 더 뜸 들였다. 나중에 발로 밟았을 때 어지간히 으깨질 정도로 삶아야 했다. 너무 푹 삶아도 안 되고, 덜 삶아도 안 됐다. 그걸 가늠하는 건 시어머니였다. 뜸까지 들인 메주콩을 자루에 담고, 다시 비닐로 감싸 발로 꾹꾹 밟아가며 으깼다.      


“그러고 나면 이제 다라이에 쏟아서 네모 모양으로 빚는 겨. 산골에 틀이 어딨냐? 손으로 탁탁 두드려가면서 적당하게 빚는 거지. 그런 다음에 뒷방 윗목에 지푸라기를 도톰히 깔고 그 위에 올려. 아직 말캉말캉하기 때문에 바로 매달면 안 되고 딱딱해질 때까지 며칠 바닥에 말려두는 겨. 많이 안 했어~! 농사지어서 타작하면 메주콩이 딱 한 말 나왔고, 그걸 메주로 만들면 5~6개 정도 나왔어. 여덟 식구 1년 먹을 거니까 그 정도면 적당한 양이었지.”     


새벽부터 메주콩 삶기 시작해도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일을 마무리 했다. 메주콩을 삶든 말든, 삶은 메주콩을 빚든 말든 어김없이 끼니는 찾아왔고, 빨래와 청소를 거를 순 없었다. 밥하고 설거지하는 틈틈이 가마솥을 들여다보고 아이들을 씻기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짬짬이 삶은 메주콩을 발로 밟아 으깨고 모양을 빚었다. 그런 날, 동분은 자신의 코 고는 소리에 놀라 깼다. 


메주를 일주일가량 윗목에 두면 겉에 곰팡이가 어슴푸레 피면서 적당히 말랐다. 그러면 지푸라기로 잘 여며 처마 밑에 매달았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말랐다 반복한 메주는 이듬해 봄, 속까지 바싹 말랐다. 된장은 따뜻한 기운이 돌기 전에 담가야 맛있다고 했다. 하여, 보통은 1~3월 사이에 담갔다. 시어머니는 3월부터 메주 상태를 수시로 살펴 가며 마땅한 시기를 잡았다. 어쨌든 3월을 넘기지 않았다.      


“메주 겉에 먼지랑 곰팡이가 잔뜩 쌓였을 거 아녀. 그러니까 메주를 물에 담가서 솔로 살살 씻어내는 겨. 그렇게 물로 씻어내도 이미 딱딱하게 굳어서 으스러지지도 않어. 깨끗이 씻어낸 메주를 다시 소쿠리에 담아서 반나절 말려. 물기가 남아있으면 된장이 맛없는 법이거든. 그런 다음 단지에 메주를 차곡차곡 넣고, 소금물을 한가득 붓는 겨. 그 위에 숯이랑 홍고추 말린 걸 잔뜩 뿌리고. 그렇게 해놓고 뚜껑 딱 닫아서 석 달 정도 더 숙성시키는 겨.”     


5월에 메주콩 심고, 11월에 수확하고 타작해 삶고, 메주로 빚어 겨우내 말리고, 3월 단지에 넣어 소금물로 절인 메주가 숙성되는 동안 다시 5월이 되어 새로운 메주콩을 심었으니, 어지간한 인내와 수고로움으로는 될 일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산골에서 찌개를 끓이고 나물을 무치고 생선을 조리자면 된장과 간장이 필요했다. 그래야 밥상을 차릴 수 있었다.  


6월이 되면 단지에서 메주를 건졌다. 새카맣게 변한 소금물은 그것대로 체에 걸렀다. 조선간장이다. 건진 메주는 ‘다라이’에 놓고 조물조물 치댔다. 치댄 걸 다시 단지에 꾹꾹 눌러 담고, 그 위에 굵은소금을 소복이 뿌렸다. 시어머니는 그래야 구더기가 꼬이지 않았다고 했다.      


“6월에 건져서 치대면 그게 된장이여. 바로 먹어도 상관없는데 깊은 맛이 덜해. 그래가지고 뚜껑 대신 망을 씌어 다시 햇볕 좋은 곳에서 보름 정도 숙성시키는 겨. 그렇게 7월은 되어야 비로소 깊고 부드러운 된장이 완성되는 거지. 그러니까 니가 한 번 생각해 봐라. 지난해 5월 심은 메주콩으로 된장 담그기까지 얼마나 걸렸나. 장작 1년 하고도 2개월이여. 그러니 그게 어디 보통 일이었겄냐.”     


된장에 비하면 고추장은 소꿉장난이었다. 여름에, 시장 가서 마른 고추 사다가 방앗간에서 고운 고춧가루로 빻아왔다. 엿기름과 메줏가루, 소금까지 준비해 ‘다라이’에 한데 넣고 물을 부어가며 두어 시간 계속 치대면 완성이었다. 시어머니는 음식 단 걸 싫어해 고추장 만들 때도 설탕이나 물엿은 넣지 않았다. 하여, ‘서당표’ 고추장은 간간하고 칼칼하면서 뒷맛이 텁텁하지 않고 깔끔하게 딱 떨어졌다.     

 

“워낙 오래 전이라 다른 음식은 별로 생각 안 나는데, 니네 할머니가 감자랑 호박 숭덩숭덩 썰어 넣고 끓이던 고추장찌개는 가끔 생각난다? 엄마가 나중에 똑같이 해봐도 영~ 그 맛이 안 나더라고. 아마도 고추장 차이겄지? 칼칼하게 딱 떨어지는 맛이 참 일품이었는데.”   


산골에서 된장만큼 중요한 건 김장이었다. 된장과 김치만 있어도, 겨우내 그럭저럭 한 끼를 또 해결했다. 7월에 씨 뿌린 배추는 9월부터 알이 차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예쁜 놈은 놔두고 못난 놈부터 속아다가 겉절이 담가 먹는 겨. 작년에 담근 김장 김치가 그때까지 있겄냐? 봄이면 벌써 끝나지. 산골 겨울엔 먹을 게 없잖어. 그러니까 겨우내 김장 김치만 파 먹는 겨. 그냥도 먹고 찌개나 국도 끓여 먹고 전도 부쳐 먹고 볶아서도 먹고. 봄부터는 미나리로 김칫국물 담가 먹고, 여름에 열무김치 좀 먹다가 가을에 못난 배추 속아 먹다 보면 또 김장철이 되는 겨. 아무튼 한 100포기 정도만 남겨놓고 속아 먹다 보면 10월 초에 배춧속이 차올라. 그러면 니네 할머니랑 지푸라기 갖고 가서 일일이 묶어줬지. 그러다 11월 초에 싹 수확하는 겨.”     


더 추워지면 배추가 싱거워진다고, 시어머니는 늘 강조했다. 하여, 11월 중순을 넘기진 않았다. 서당의 김장은 2박 3일이나 이어졌다. 시어머니는 언제나 그랬듯, 무엇 하나 ‘설렁설렁’이 없었다. 첫날 오전, 배추를 수확해 겉잎을 훑어내고 소금물로 꼼꼼하게 씻어내면 점심이었다. 밥 먹고 오후부터 들통에 배추를 한 포기 한 포기 쌓아가며 층층이 소금을 뿌려 절였다. 저녁 먹고 나면 맨 위의 배추가 맨 밑으로 가도록, 다시 모든 배추를 다른 들통에 한 포기 한 포기 옮겨가며 소금을 뿌려 쌓았다. 


다음날, 다시 소금물에 세 번 헹군 배추를 소쿠리에 줄줄이 늘어놨다. 물기 빼는 사이, 전날 저녁 미리 준비한 무, 쪽파, 고춧가루, 풀 등을 ‘다라이’에 한 데 섞어 양념소를 준비했다. 음식에서 냄새나는 걸 질색했던 시어머니는 멸치액젓 같은 건 일절 넣지 않았다. 


준비한 양념소로 배추를 치대 단지에 한 포기씩 차곡차곡 쌓고, 맨 위에 억센 겉잎을 꼼꼼히 덮어 감싼 후에야 뚜껑을 닫았다. 그렇게 커다란 단지 서너 개를 배추로 가득 채우면 어느새 저녁이었다. 그다음날, 동치미까지 담가야 서당의 2박 3일 김장이 끝났다. 집안에 장정이 둘(송일영과 시동생)이나 있었건만, 김장은 오직 시어머니와 동분 몫이었다. 그다음 날에도 시어머니는 어김없이 새벽에 일어나 마당을 쓸었다. 동분 또한 하릴없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야 했다. 



남편이 결혼하고 처음으로 해준 요리

 

딱 한 번 있었다. 송일영이 오롯이 동분을 위해 앞치마 두른 ‘사건’. 불과 몇 개월 전 일이다.    

 

“일 끝나고 집에 왔는데 암만 봐도 지독한 몸살감기 같더라고. 그대로 쓰러지듯 소파에 누워 있었어. 문득 따끈한 콩나물국 한 그릇 먹었으면 싶은 겨. 그래가지고 ‘에라 모르겄다~’ 하는 마음으로 니네 아빠를 불렀지. 호호호. 주성 아빠~! 나 꼼짝도 못하겄으니까 콩나물국 좀 끓여봐, 하고.”     


평소 같으면 뭐가 이러니저러니 하면서 여러 소리 붙였을 양반이 그날따라 웬일로 군말 없이 냉장고를 뒤적이더란다. 그러고는 어렵사리 콩나물 한 봉지를 찾아 동분에게 와서 한다는 말이.     

 

“이거 콩나물을 어떻게 해?”

“어떡하긴! 일단 물로 헹궈.”

“…….”     


또 군소리 없이 콩나물 들고 싱크대로 간 송일영이 어설픈 손놀림으로 콩나물을 헹구고, 찬장을 한참 뒤져 적당한 냄비를 찾아서는 또 동분에게 어기적어기적 오더란다.      


“콩나물 다 헹궜는데, 냄비는 여기다가 하면 돼? 물은 얼마나 넣어?”

“어, 그 냄비에다가 물을 반만 넣고 일단 물부터 끓여. 물 끓으면 콩나물 넣고 소금이랑 새우젓이랑 다진 마늘 좀 넣어. 간장 반 숟갈만 넣고.”

“…….”     


또 어설픈 손놀림으로 한참이나 국을 끓이던 송일영이 다시 어기적 어기적 동분에게 오더란다.     


“간장이 두 갠데? 큰 거랑 작은 거. 어떤 거 넣어?”

“큰 거. 국간장이라고 쓰여 있는 거.”

“넣었어. 다 된 거 같은데, 어떻게 할까?”

“간을 봐야지. 간 한 번 봐봐.”

“…….”     


팔팔 끓는 국을 살짝 떠먹어 본 송일영이 이번엔 흡족한 표정을 짓더란다.     

 

“괜찮은 거 같어.”

“그럼 파 좀 썰어 넣고, 불 꺼.”

“…….”     


어설픈 칼질로 파를 썰어 국에 넣은 송일영이 또다시 동분에게 오더란다.

      

“또 왜?”

“다 된 거 같어.”

“그럼, 상을 차려. 밥도 푸고. 냉장고에서 김치만 꺼내봐.”     


몸살감기 때문에 몸은 아파죽겠는데, 시키는 대로 어기적거리는 남편 모습이 한편으론 우습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좀 있으면 칠순인 양반이 콩나물국 하나를 못 끓이나 싶어 괜히 얄미운 마음도 들었다. 이러나저러나 저 양반보다 하루만이라도 더 살아야지 싶은 마음도…….     


“그런대로 맛이 괜찮더라고. 하긴, 엄마가 일러준 대로 끓인 거니까. 어쨌든 그거 한 그릇 후루룩 먹고 감기가 싹 나았다는 거 아니냐. 근데 기막힌 게 뭔 줄 아냐? 그 콩나물국이 니네 아빠가 처~음으로 해준 요리여. 아이고, 그 뒷모습이 어찌나 우습던지. 호호호. 니네 아빠도 이제 늙는가보다 싶더라고.”      


동분은 여전히 그렇게 살아간다. 콩나물국 하나 못 끓이는 남편 밥 굶을까, 끼니마다 밥을 챙기고, 함께 식사한 후엔 바로바로 설거지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을 거둬 탈탈 털어 개어 놓는다. 저녁엔 청소기를 돌리고, 손걸레를 빨아 방바닥을 훔친다. 그날 빨랫감은 그날그날 세탁해 널어놓고, 전날 널어둔 빨래는 곱게 접어 수납장에 넣어둔다. 여전히 명절이나 기념일엔 주성이 좋아하는 잡채를 한 ‘다라이’ 준비한다. 연례행사처럼 어쩌다 주홍이 찾아올 때면 김치찌개를 끓이고, 호박전을 부쳐 낸다.      


“요즘이야 남자가 요리도 하고, 집안일도 같이 하지만, 그때는 남자가 부엌 들어가면 꼬추 떨어진다고 말하던 시절이었잖어. 살림은 당연하게 여자가 하는 걸로 알았지. 니네 아빠나 엄마나 그냥, 그런 시대를 살아온 겨. 이제 와서 니네 아빠한테 밥하고 설거지하라고 할 수 있겄냐? 뭘 제대로나 할 줄 알아야 시키지. 우리 시대는 이렇게 끝이 난 거고…….  앞으로는 니네 몫이겄지. 그래도 니네 형은 밥 먹고 나면 꼭 자기가 나서서 뒷정리하고 설거지하더라. 너도 니네 형 보고 좀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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