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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약 Mar 04. 2024

의욕없는 날

온몸이 젖은 솜처럼

저번주 목요일에 한번 그렇게 기분이 다운됐었다. 이유없이 자꾸 눈물이 났다. 그런 날이 간혹 있다. 그런데 그 감정이 가시지 않았나보다. 어제는 가장 친한 친구들이 우리집 집들이에와서 그렇게 신났었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표정이 그렇게 생동감있었다는데, 오늘이 또 뿌연 날이라 그런가. 오늘은 또 무엇도 하고 싶지도 않다. 이런날은 차라히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일정이 가득한게 좋다. 


봄이 오니까, 이번주는 또 묘하게 행사가 많다. 예비청년창업가 관련 정책제안 행사도 있고, 청년정책협의체 회의도 있고, 결혼식들도 있다. 행사가 없더라도 매일 아침 산책과, 하루에 한개정도씩 있는 다양한 레슨시간, 낮잠시간과 글쓰는 시간, 저녁 요가를 더 하면 이동시간까지 약 8시간이 든다. 왠만한 근로시간과 같아서, 하루를 허투로 보내기 힘들다.


나는 왠만하면 시간을 아끼고, 매일 열심히 살고 싶은 의욕이 가득한 사람이다. 인생은 단 한 번 산다고 생각하고, 시간은 한정되어 있지만 내가 하고 싶은건 많은 사람이라 그렇다. 그런데 가끔 감정에 지는 날, 의욕에 지는 날이 있다. 오늘같은 날이 그렇다. 아침부터 바빴다. 일어나 아침 산책을 하고, 어제 집들이로 정신없는 식탁을 치우고, 산부인과에 가서 정기점진도 하고, 롯데리아에 들려 불고기 버거 테이크아웃을 해서 양재 레슨에 다녀왔다.


양재 레슨 공간에 주차를 끝내자마자 남편이 하나 미룬 일이 내게 연락이 왔다. 평소 뭘 미루는걸 너무나 싫어하는 탓에, 절대로 납부기한을 놓치지 말라 그렇게 신신 당부를 했건만, 그는 이번달 보험비 납부를 또 놓치고 말았다. 하, 싫어하는데 신경좀 쓰지, 이렇게 반복되다니 갑자기 서러워졌다. 내가 결혼을 잘못한건가, 부터 시작해서 열심히 사는게 무슨 의미가 있나까지 생각은 확장됐다. 남들은 임신하면, 출산하면 비싼 선물도 턱턱 받는데, 나는 그런거 사주란 말도 안했는데, 고작 보험료 제때 못내서 독촉 전화를 받다니 싶었다.


카톡으로 자고 있는 남편에게 성질을 있는대로 내도, 분은 풀리지 않았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차라히 혼자 살걸 그랬어.. 더 나은 사람을 만날걸 그랬어.. 며칠 집을 나가야겠어.. 별 것 아닌걸로 시작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눈덩이처럼 불었다. 차에서 한참을 울다 레슨을 다녀왔다. 레슨이 끝나고 다시 차에 타는데 남편이 읽고 답도 안하기에 또 눈물이 터졌다.


그렇게 집에 오는데 아뿔싸, 후진하다 아파트 기둥을 박았다. 차 뒷범퍼는 움푹 들어가고 라이트는 깨졌다. 다른 차 안박아서 다행이지 싶다가도 서러움은 절정을 찍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나에게 왜 이래. 앙앙 울면서 집에 들어섰는데 자다 깬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나를 맞았다. "돈가쓰 해줄게, 일단 점심 먹자. 다치진 않았어?" 다정한 말투에 미움이 사르륵 녹았다. 돈가스를 먹으며 그는 말했다. 그냥 이제 내 잔소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게 된다고. 예전같으면 서로 성을 내며 싸웟을텐데, 이게 좋은건가, 아닌건가 헷갈렸다. 어쨌든 밥을 다 먹고 나서 나른하니 졸려 자고 일어났다.


그 전까진 괜찮았는데 일어나니까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사과랑 오렌지를 부랴부랴 깎아 먹었다. 사실 내가 이번주에 해야할 일들을 보면 지금 그림을 그려야 하는게 맞는데, 물도 갈고, 작업실에서 서성거리다 그냥 서재로 다시 들어왔다. 오늘 너무 울어서 그런가, 나쁜 마음을 먹은게 미안해서 그런가 몸이 물먹은 솜 같다. 이따 저녁 요가와 그 후 음악 프로젝트 관련 미팅이 있다. 그래, 괜히 감정에 빠지느니 뭐라도 써내는게 낫겠지 싶어 브런치를 킨다. 쓸 글감이 없어 한참 다른 글들을 구경했는데 오늘 있었던 일도 어쨌든 글감이 되는구나.


의욕없는 날. 저녁 요가까지 두시간정도가 남았는데, 뭘 해야겠다는 생각이 안들고 오히려 빨리 시간이 갔으면 좋겠다 싶었다. 브런치를 키고 글을 쓰다보니 벌써 남은 시간은 30분이다. 이럴땐 어짜피 해야할 일이 있는게 훨씬 좋다. 어떤 날은 의욕은 없어도, 의무는 많은게 좋다. 사실 미뤄논 일들이 없는건 아니다. 그래도 오늘 저녁 일정이 있어서 다행이다. 빨리 30분간 미뤄둔 일들을 하고, 챙겨서 요가를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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