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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Dec 11. 2019

3. 가족회의

12월 4일 수


정시에 퇴근해서 친정집으로 갔다. 막내네 부부와 셋째, 엄마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이 모였다. 

의사가 설명한 것을 전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 결정하라는 요구가 있다는 것도 전했다. 


세상에 살면서 이런 결정을 하는 경우가 몇 번이나 있을까?


가족회의 안건은 명료했다. 


1. 요양병원으로 갈 것인지, 대학병원으로 갈 것인가. 

   의견이 반반이라 내가 중재안을 냈다. 대학병원으로 가서 일단 진단을 정확히 받아서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한 후에 치료를 할 것인지는 그때 결정하자. 모두 오케이 했다. 


2. 비용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버지가 처음 사고가 나고 여러 해 병원에 있을 때 셋째의 부담이 컸었다. 이번에는 1/n이다. 그 자리에서 가족 통장이 만들어지고 일단 500만 원씩 넣고 지출하는 것으로 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톡방이 만들어지고 통장이 개설되고 입금까지 순식간에 끝났다. 


3. 병원에 다니는 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막내 네가 한 달 하고 다음에 내가 한 달 하는 것으로 했다. 언제까지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한 달씩 하는 것으로 했다. 엄마를 모시고 다녀야 하고 병원비 정산이며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것 까지 담당하기로 했다. 


이렇게 결정하는데 두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식탁 옆에 서서 외투도 벗지 않고 가방을 한 손에 움켜쥐고 마치 외상값 받으러 온 사람이 볼 일 끝났으니 금방 가겠다는 듯 한 나의 모습을 보며 엄마는 몇 번이나 음식 시켜 줄 테니 먹고 가라 하셨다. 거절하고 돌아갔다가는 엄마가 많이 서운할 듯하며 조금만 먹겠다고 하고 외투를 벗고 식탁 의자에 앉으니 허기가 밀려왔다. 


매운 짬뽕을 나눠먹고 속이 얼얼한 나는 냉장고를 열어 엄마가 담근 김치를 꺼내고 밥을 한 술 따로 떠서 먹었다. 그제야 속이 채워지는 듯했다. 


엄마와 셋째는 전날 이야기를 많이 나눈 모양이다. 나와 막내는 요양병원을 알아보고자 했는데 함께 사는 두 사람은 대학병원 이야기를 나누었나 보다. 엄마의 의향이 우선이라고 우리 모두는 말했다. 


환자 당사자의 결정이 아닌 가족의 결정으로 치료 여부를 판단하다니 인간에 대한 존엄은 어디로 갔을까 싶다. 자기 몸에 대한 치료를 본인이 아닌 가족이 결정한다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 

아무리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다 해도...


식사가 끝나고 뒷정리를 하며 무심코 한마디 했다. 


이다음에 혹시 암 진단 나오면 나는 그대로 안고 갈 거야. 그냥 같이 살지 뭐...


병원은 둘째가 졸업한 대학병원이 동창들에게 약간의 할인을 해주기도 하고 집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니 그곳으로 알아보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진료 예약을 하고 간병인이 요구하는 물품도 구매했다. 기저귀가 많이 필요하다 했다.  


중요한 의사결정이 끝나고 식사도 하고 이제 돌아갈 때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영정사진 이야기가 나왔다. 혹시 모르니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며...


엄마가 보관하고 있던 앨범을 뒤적이며 아버지 얼굴이 있는 사진을 찾았다. 최근 10여 년은 사진이 서너 장 밖에 없었다. 동생들과 가족여행으로 갔던 제주도와 부모님 두 분의 태국여행 사진 중에서 고르기로 범위를 좁혀나갔는데, 아버지가 웃고 있는 사진은 두세장 정도 있었다. 그중에서 엄마와 함께 나란히 앉아있는 사진에서 아버지 부분으로 작업해서 사용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사진 속의 아버지는 거의 웃지 않고 표정이 어색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그 많은 가족사진을 보면서 아버지의 표정을 여태껏 읽지 못했다니 참 나는 무심한 딸이었구나 싶었다.


10년도 훨씬 전의 아버지는 평소에 자신의 건강을 신경 쓰고 운동도 열심히 하셨던  연세보다 젊어 보이는 건강한 모습이었다.  아버지 사진이 정해지자, 엄마 사진도 고르기 시작했다. 이런 건 미리 준비하는 게 좋다며 엄마의 의견을 물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각자 옛날 사진 속에서 자신의 얼굴들을 찾아내며 세월의 흐름을 읽어내고 한바탕 웃기도 하고 이때 우리는 이랬지 하는 이야기들도 나눴다.  


좀 전의 긴장과 약간의 격했던 감정들은 사라지고 추억과 회상이 주는 특유의 즐거움과 웃음꽃이 오랜만에 친정집 거실에 퍼져나갔다. 


12월 5일 목 


새로 만들어진 가족 톡방에는 동생이 검색한 자료가 수시로 올라왔다. 암환자 병원 진료, 호스피스 병동 리스트, 요양병원과 대학병원의 암환자 진료비 청구 관련 기사들이 계속 올라왔지만, 클릭해서 보지는 않았다. 때가 되면 들여다봐야지……. 

 셋째가 친정집에서 가까운 대학병원에 진료예약을 했다. 외래 진료는 6일(금) 오후다. 아버지 담당의사에게 결정된 것을 전달하고, 그렇게 결정했으면 관련 자료를 준비하겠다고 전해 들었다. 잠시 일을 쉬고 있는 막냇동생 내외가 엄마를 모시고 다녀왔다. 폐렴은 좀 나아졌지만 여전히 금식 상태였다. 

 간병인이 고향 사람이라며 아버지는 맘에 들어하는 것 같다는 엄마의 전언이 있었다. 매일같이 엄마를 만나고, 누군가 옆에서 자신을 돌보는 것에 안심이 되어서 그런지 요양원에서 보였던 아버지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입원 첫날을 제외하고는 밤에 잘 주무시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고 한다. 주삿바늘이 꽂혀있는 손등을 자꾸 건드려서 손 싸개를 해놓은 것 외에는 딱히 달라진 점이 없다 했다. 


요양원에 면회 갔을 때 아버지 침상 난간은 스티로폼으로 된 파이프 보온덮개 같은 것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밤만 되면 소리 지르고 자꾸 난간을 두들겨서 옆의 환자들이 잠을 못 이루고 힘들어했었다고 한다.  지난 면회 때 살펴본 아버지 팔에는 여기저기 퍼렇게 멍자욱이 있었다.


“아버지, 밤에 안 주무시고 소리 지르고 자꾸 난간 두들기면, 아버지 팔도 아프고, 다른 분들도 못 주무시고 그러니, 그만 하세요.”

“팔이 자꾸 저려서 두들기면 좀 덜 아파서 그래.”


누구나 자신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요양원 간호사는 섬망 증세인 것 같다고 했다. 12년을 엄마의 돌봄을 매일 받다가 엄마 없는 낯선 공간에서 아버지가 보인 증상은 요양환자들에게서 흔히 있는 것이라 했다. 가족을 다시 만나고 편안해지면 회복되기도 한다더니 입원 이후 아버지를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병원에 가는 막내에게 아버지 사진과 동영상을 부탁했다. 아버지가 병상에 있는 기간 동안 사진이 별로 없던 게 걸렸었다. 동생이 보내온 아버지의 모습은 여행 사진처럼 어색한 표정이었다. 의식이 흐려져도 카메라를 대하는 것은 변하지 않나 보다. 흰머리에 볼이 파이고 팔다리가 가늘어진  피부가 하얀 노인이 어색한 표정으로 누워있는 모습을 아버지의 모습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시간이 걸릴듯하다. 


가족 톡방에 일요일에는 내가 간다고 올렸다. 토요일에는 둘째가 온다고 엄마가 올렸다. 아버지의 입원으로 가족회의가 있던 날 이후로 친정 식구들은 많은 양의 문자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일정을 공유하고 있다. 각자의 방식대로…….


내 일정도 조정해야 할 때가 되었다. 여행을 취소하는 것…….

어제 여행사 대표에게 문자를 보냈었는데 오후에 연락이 왔다. 이미 항공권 발권과 호텔 예약을 진행한 상태라 예약금의 상당 부분은 환불이 안 된다는 말을 들었고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했다. 환불되지 못한 금액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라 여행을 함께하지 못함에 대한 것이다. 


 1월에 인도를 다녀오고 7월에 여행 드로잉 그룹 전시도 했었는데 그 팀에서 소규모의 특별한 여행을 다시 하기로 했었다. 그때 멤버에 새로 합류하는 사람을 포함하여 두 번째 인도 + 포르투갈 여행 일정이 2020년 1월에 계획되어 있었다. 아직 시간이 한 달도 훨씬 넘게 남아있지만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20일에 가까운 긴 일정으로 한국을 떠나 있는 것은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합류하지 못함에 대한 서운함을 다음 여행에 대한 기약으로 돌리고 취소를 했다. 


100만 원 예약금 중에 67만 원은 환불되지 않았다. 아깝지는 않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는 법이다. 이번 여행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묘하게 걸리던 무언가의 신호를 무시하고 갔던 것에 대한 지불이라고 해석하기로 했다. 처음 여행을 결정할 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긴 했었다. 요양원에 계시는데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지나는 말처럼 하긴 했지만, 6개월 전의 예약이고 그때는 일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아버지 상황보다는 여행팀을 꾸려가는 과정에서 걸림이 있긴 했었다. 그룹 전시회를 끝내고 국내여행을 가며 부탁했던 것들이 스킵되어 버린 것, 대표가 폰을 잃어버리면서 내 연락처가 사라진 것, 새로운 여행팀에 대장암 병력이 있는 분이 합류했다가 취소한 것 등등…….

 지나고 보니 약간씩 뭔가 신호가 있었던 게 아닐까 라고 현재의 시점에서 내 방식대로 해석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여행에 대한 끌림이 지난번보다 훨씬 덜하다는 것에 계속 물음표가 붙어있긴 했었다. 두 번째라 그럴 거라며 한쪽으로 그 물음표를 치워놓았었다. 


이번 여행 일정에 있던 바라나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지난번 여행 일정에 바라나시가 없고 타지마할과 아그라성이 있어서 너무나 좋았었다. 여행 중에도 나는 바라나시에 끌리지 않는다는 말도 했었다. 죽음을 다루는 장소의 보이지 않는 중력에 끌려가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현재 의식에서는 알 수 없지만, 묘하게 죽음을 맞닥뜨리는 상황이 연출될걸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는지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에 대한 관념들과 방식에 대해 다르게 접근하고 싶을 뿐이다.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구체화 작업의 하나라고 본다. 어떻게 할 것인지 정교한 프로젝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눌려진 감정의 분출이나 자신의 한스러움이 투사된다거나, 마치 가면 안 될 곳을 가는 것처럼 대하고 싶지는 않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의 마무리 과정으로 접근하고 싶은 것이다. 


영혼의 숨결이 느껴지는 마무리 과정을 경험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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