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12월 8일 일
엄마와 아버지의 이야기가 잦아들 때쯤 나는 침대 옆으로 들어서서 말을 걸었다.
어김없이 나이 확인하는 질문부터 시작했다.
“아버지 몇 살이야?”
“난 한 살.”
엊그제는 101살이라 하더니 100살이 사라졌다.
“엄마는 몇 살인데? "
“나보다 두 살 위야.”
“그래서 엄마는 몇 살인데?”
“음.. 102살”
계산이 안 되는 아버지는 치매가 확실히 왔나 보다. 대학병원으로 옮기기 전에 치매 검사도 받아보라고 간병인에게 부탁하고 들고 온 책을 누워있는 아버지 앞에 펼쳐 보였다.
“이거 무슨 책인지 아시겠어요?”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속표지를 펼쳐 보여주니 말씀을 하셨다.
“가정원예”
“어.. 한자는 읽으시네.”
컬러로 된 사진을 짚어가며 식물 이름을 물어보았다. 흐릿한 눈이 조금씩 밝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장미, 목련, 무궁화, 국화는 말씀을 하시고 외래어 식물 이름은 못하셨다.
“아버지, 이 책 누구 거야?”
“내가 봤던 거야.”
“이거 되게 오래된 건데..”
“오래됐지... 그거 네가 가져라.”
“아버지, 사고 나기 전에 국화 커다랗게 꽃 만들어서 우리들한테 나눠주고 그랬잖아..”
“그랬지. 사람들이 그거 좋아했어.”
현재의 나이는 잊어먹었지만, 이런 건 기억이 선명하신가 보다.
사고 나기 전 아버지는 옥상에 50개가 넘는 국화 화분을 재배해서 주변인들에게 나눠준 적이 있었다. 꽃집에서 파는 것처럼 커다란 국화꽃을 몇 송이씩 탐스럽게 키우셨다. 젊어서 첫 직장이 농촌지도소였는데 거기서 작물재배와 원예재배를 했으며, 농업 고등학교를 졸업하셨다고 들었다.
“아버지, 농촌에서 식물 키우고, 농사짓고 하면서 직장 다녔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겠지...”
“아버지, 옛날 고등학교 때 시인한테 배웠다고 했었는데..”
나의 이 말에 아버지의 눈빛이 선명해졌다.
“그럼, 김관식 시인한테 배웠지, 시골 고등학교에서 그런 분한테 배우는 건 대단한 행운이지”
“그때 아버지 문학청년 지망생이었나 봐.”
“그랬었지...”
“그럼 왜 계속 그 길로 안 갔을까?”
“능력이 없는 걸 알았거든..”
능력이 없다는 아버지의 표현은 처음이었다.
경제 활동에서 무력해지는 시점에서도 아버지는 본인이 능력이 없다거나 돈을 못 본다거나 하는 말을 하는 걸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항상 나는 이런 걸 잘했다는 말을 하는 분이었다. 내 기억으로 아버지는 서울대학교 국문과 시험을 보셨는데 떨어졌고 곧바로 직장 생활을 시작하셨다고 했다. 아마 그때 입시에 떨어진 것을 본인의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셨던 것일까?
“그래도 농촌지도소 다니고 농사짓고 꽃 키우고 쭉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아마 시도 쓰고 그랬겠지..”
“그런데 왜 도시로 나왔을까?”
“그때는 농촌이 살기가 너무 힘들었어...”
1936년생인 아버지의 청년 시절은 1950년대에서 60년대이다. 전쟁 직후 농촌에서 대부분 먹을 게 없어 죽을 하도 많이 먹어서, 죽은 입에도 안 댄다는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자주 들었었다. 밥상에 죽이 나오면 그냥 집 밖으로 나갔을 정도였다는데 요양원에서 죽을 많이 드렸으니 많이 힘드셨을 것이다. 소화능력이 없어서 죽을 드린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모르셨을 터이고 요양보호사한테 소리도 지르고 그러셨겠지....
“아버지, 옛날에 시골집 옆에 커다란 양어장, 연못 있었잖아..”
“그랬지. 내가 연못 만들었다.”
“아버지가 만들었다고? 어릴 때 봤던 연못 되게 컸는데..”
“아버지 보양식 해드리려고 내가 연못 파고 물고기 잡아다 넣고 키웠어.”
유년시절 기억에 할아버지는 마른 체격에 키가 크신 분이었는데 강가에 나가 물고기 잡아오고, 어깨에 그물을 걸치고 다니시기도 했었다.
“아버지는 참 효자였네.”
“아버지가 몸이 안 좋으셨어.”
2주째 금식 상태였던 아버지는 비교적 또렷한 의식으로 과거를 이야기했다. 본인이 지녔던 오래된 물건이 열쇠가 되어 기억의 빗장이 풀렸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런 이야기를 앞으로 얼마나 더 나눌 수 있게 될까?
스무 살 대학시절에 아버지와 나는 9시 뉴스를 같이 보는 날이면 어김없이 격렬하게 말싸움을 했었다. 그 후에도 살갑게 아버지랑 이야기를 나눈 적은 거의 없었고,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던 40대 후반의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유려한 문체의 문자를 받고서야 문학청년 지망생이었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십 대 후반부터 아버지가 신문을 읽는 것 외에 독서하는 장면을 본 기억은 없다. 오래된 낡은 책장에 수필집과 문학전집들이 있었고 스무 번이 넘는 이사에도 그 책들은 어김없이 집안 한가운데에 진열되어 있었다. 옥탑방에 있던 책장에서 내가 찾으려고 했던 것은 그 책들이었다. 펜글씨로 몇 줄의 댓글이 적혀 있었던 낡은 수필집...
그 책의 저자는 현재 100세가 넘는 현존 작가이다. 아버지가 101살이라고 자꾸 말하는 것은 혹시 그분과 동일시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긴 이야기 끝에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 다음 생에는 경치 좋은 시골 마을에서 꽃 가꾸고, 연못 만들어 잉어 키우고, 정자에서 시 한수 읊으시고 그렇게 사셔야겠어요.’
이런 말은 속으로만 되뇌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 배에 혹이 있대요. 그래서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몰라요.”
“....”
“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
“아픈 데는 없어.”
“식사 안 한 지 오래됐는데 배는 안 고파요?”
“난 배고프고 그런 거 모른다.”
다시 눈빛이 흐려지며 아버지는 하품을 하셨다. 간병인이 이제 여보야랑 따님이 간다니 손 좀 흔들어보라는 말에 어린아이처럼 손을 흔드신다. 엄마는 내일 또 올 거라며 아버지 손을 잡아주고 가슴도 다독거리고 발도 주물러 본 후에야 돌아 나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