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9일 월
친정집 근처 대학병원 외래 진료를 동생 둘이 다녀왔다. 막내에게 전화해서 어땠냐고 물었다.
“ 저쪽 병원 진료소견서는 결장암인데 여기 의사 말로는 이 정도 소견으로 오면 바로 외과로 가서 수술을 하는 거라 했어. 전이 여부를 모르니까 일단 입원해서 검사하고 그때 수술 여부 결정한대. 근데 말은 안 하지만, 이런 환자를 왜 데려왔냐는 그런 느낌을 받았어.”
처음부터 대학병원보다 요양병원으로 가자는 의견을 말했던 막내는 진료 소감을 전했다.
다시 가족 톡방이 분주해졌다. 내일 이송할 때 정산과 앰뷸런스 타고 올 사람과 엄마 모시고 갈 사람에 대한 역할분담이 오고 갔다. 나는 조퇴를 하고 엄마를 모시고 대학병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자식이 여럿 있으니 엄마 아버지는 참 다행이다 싶었다.
12월 10일 화
분명히 잠은 깬듯한데 눈을 뜨지는 않은 상태였다. 어떤 사람이 내 그림을 양손으로 받아들이는 장면이 보였다. 요새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잘 안 되는 이런 모습이 자꾸 보이네 하며 아침을 맞았다. 아버지가 대학 병원으로 온다 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꿈에 나온 그림은 지난여름에 여행지 테마파크에서 저녁때 돌아오면서 찍었던 사진을 그린 것이다. 전시회 때는 다른 이름을 냈지만, 마음속으로는 ‘귀가’라는 타이틀을 붙였었다.
커다란 놀이터에서 실컷 놀다가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과 이제 막 어두워지려는 저녁 빛을 받는 나무들, 작은 기념품 가게에서 연하게 비추는 불빛과 길게 늘어선 그림자들을 그렸었다. 저녁이 되어가는 숲의 색감이 잘 안 나와서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었던 그림을 누군가 양손으로 받아 들다니...
아주 가끔 이런 식으로 꿈과 현실의 이중주가 펼쳐질 때가 있는데 굳이 해석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전시회 전에 작품 스캔한 출력물이 있어서 작은 액자에 담아 친정집 현관 장식대에 올려놓았었다. 하필 그 그림이 꿈에 보이다니...
이런 생각들도 바쁜 출근길에 사라지고, 업무를 보고 엄마를 모시러 갔다. 병원에 올라오는 시간에 맞춰 나가도 되지만, 집안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엄마 생각에 예정보다 일찍 조퇴를 했다. 3시쯤 온다고 했으니 일단 집으로 모시고 갔다가 병원으로 가기로 작정했다.
가족들과 좀 거리가 있게 살았었는데 느닷없이 동생네 바로 옆 단지로 이사했고, 친정과는 강을 사이에 두고 20여분 거리에 살게 된 것이 무슨 보이지 않는 그림이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 하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머리 한가득 채워가며 집으로 향해 갔다.
현관을 열고 들어서니 공기가 따뜻하다고 엄마가 한마디 하시더니, 소파에 앉아 창밖을 보며 햇살이 좋구나 하셨다.
“엄마, 지난번에 아버지한테 갈 때도 좋았잖아. 상고대도 보고..”
“그랬지. 오늘도 좋네. 아버지가 올라올 때 덜 고생하려나..”
내가 운전을 하고 조수석에 엄마가 앉으면 본인의 살아온 이야기를 한없이 하신다. 주로 시댁과 아버지에 대한 한풀이식 이야기보따리인데 얼핏 그것만 들으면 엄마는 아버지를 한없이 미워하고 거들떠보지도 말아야 할 것 같은데, 막상 병상에서 아버지를 만나면 살갑게 쓰다듬고 돌봐주는 모습이다. 나와 막내는 이런 엄마를 ‘아버지 바라기’라고 한다.
언젠가부터 내가 오십을 넘어서부터인지.... 엄마 내면의 이중주를 알아차리게 된 이후부터는 엄마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감정으로 공명하지 않게 되었다. 관찰자 모드가 절로 갖춰진다. 아버지가 병상에 오래 있는 동안에 아버지에 대해서는 이런 모드가 잘 되지 않았다. 아버지 본연의 인생이 어떠했는지 들여다보고자 하지도 않았기에, 어쩌면 다시 친정집 근처로 돌아오는 아버지를 대하며, 아버지의 이중주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영혼의 귀가가 일어나기 전에 알고 싶어 진 것인지도...
아버지 책을 찾고자 했던 것도 이런 나의 심리적 역동이 있는 거라는 알아차림이 왔다.
잠시 동안 멍하니 생각의 세계를 헤매다 현실로 나왔다.
“ 엄마 이제 점심 드셔야지?”
“ 난 아무거나 먹어도 된다.”
“ 근처에 콩나물 국밥집 있는데 드실래요?”
“ 좋지.. 근데 집이 참 좋다.”
“ 알았어요. 된장찌개 끓여드릴게. 어째 어제 반찬을 잔뜩 사더라..”
월요일 문화센터 그림 수업이 끝나고 반찬가게에서 나물 종류를 여러 개 사고, 호박도 샀었다. 오늘 이렇게 요긴하게 써먹을 줄 어제의 내가 알았을까? 밥을 새로 하고, 호박을 넣은 된장찌개를 끓이고, 나물을 반찬 그릇에 담고, 시골 할머니들이 만들어 보내온 고추부각을 함께 내놨다.
“이 부각 참 맛있네.”
“그거 시골 할머니들이 해서 보내오는 거야.”
“이건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한 거야.”
“응, 막내한테도 줬더니 맛있다 했어.”
“나도 옛날에 시골에서 많이 했는데..”
“어릴 적 엄마가 아카시아꽃 말려서 찹쌀풀 입히고 튀겼던 거 기억해! ”
“난 이렇게 토속적인 음식이 좋더라. 맛있네..”
평일 한낮에 엄마랑 둘만의 식사는 아주 오랜만이다.
식사를 끝내고 믹스커피 한잔을 드시며 다시금 맛있게 먹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근데 난 네가 해주는 밥 처음 먹어본다.”
“응?”
“네가 매번 외식으로 사주기는 했어도 집에서 해준 것은 처음이야.”
“그랬나?”
그러고 보니 광주로 이사 후 집에서 밥을 해드린 적은 없었다. 최근 한 십 년이 넘는 기간에 엄마가 이렇게 올 수도 없었고, 어쩌다 엄마 생일에는 외식을 했었다.
“ 그랬네. 이렇게 엄마랑 낮에 둘이 있는 것도 오랜만이야. 맨날 애들이랑 다 같이 잠깐 만나거나 그랬지... 아니면 아버지 있는 집에서 봤지.”
온전히 엄마랑 둘이만 있는 시간을 갖는 것도 어려웠었는데, 친정집 근처로 이사 온 것은 또 다른 기회가 되겠구나 싶었다.
12월 10일 화
엄마와 둘 만의 오붓한 점심시간은 앰뷸런스로 출발했으니 3시까지 병원으로 오라는 문자를 보면서 끝이 났다. 3주간의 광주 병원생활이 끝나고 대학병원으로 이동이다.
1228호
아버지가 입원한 병실을 연락받고 올라가는데 입구가 막혀있다. 먼저 들어갔던 동생이 나와 나머지 식구들을 데려고 들어가려니 간호사가 제지했다. 암병동은 면회 시간이 정해져 있고 보호자 1인만 출입한다고 설명하면서 정부지침이라 지켜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주중에는 저녁시간, 주말에는 오전과 오후에 면회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동생들이 나오고 지팡이를 짚고 있는 엄마 옆에 내가 따라 들어가니 제지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낯선 환경에서 여보야(엄마)를 만나서 반가운 표정이다. 이틀 만에 체구는 더 작아져 있었다. 내가 누구냐, 나이는 몇 살이냐는 질문을 했더니 순순히 답변을 하신다.
여전히 101살 , 엄마는 두 살 위로 102살
계산이 되지 않는 상태다. 아버지는 오래 살아계셔서 좋겠다며 웃었는데도 표정에 별 변화가 없었다. 낯선 환경에서 그래도 엄마의 모습에 안심이 되었는지 하품도 하고 눈이 멍해지면서 졸음이 오는 듯했다. 엄마는 가져온 물건이 제대로 있는지 이것저것 확인하고 있었고, 나는 조용한 아버지를 바라보며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 상태의 막막함을 침묵으로 나타냈다.
병실 밖의 동생이 새로운 간병인을 구하고 내 연락처를 줬다며 교대하고 간다 했다. 당장 올 수 있는 사람은 남자 간병인으로 비용은 좀 더 지불해야 한다 했다. 그러자고 했다. 다시 가족 톡방이 분주해졌다. 담당의사일정과 검사 일정이 올라오고 간병인이 요구하는 물품에 관한 것이 올라오고, 3주간 병원비와 간병인비 정산내역도 올라왔다. 병원비보다 더 많은 간병인비가 지불되었다.
말투가 다른 남자 간병인의 등장에 아버지는 예민해졌다. 사고 나기 전까지 건강에 엄청나게 신경 쓰던 아버지는 배가 많이 나온 낯선 아저씨를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버지, 먼저 있던 여사님은 이제 없어. 집 근처 병원으로 옮겨서 그분은 못 오셔요. 새로 오신 선생님이 이제부터 아버지를 돌봐 드릴 테니 말씀 잘 듣고 지내셔야 해요.”
아버지는 표정이 없고 고갯짓도 안 하셨다. 오래 누워있던 환자는 욕창이 발생하지 않도록 공기 매트를 사용하는데 아버지 침대에 깔려있지 않고 짐 보따리에 구겨져 있었다. 간호사실에 연락해서 담당자가 오고 간병인과 함께 아버지를 움직여가며 매트를 깔고 시트 정리를 했다. 낯선 사람들이 몸을 건드리며 움직이니 양 팔을 저어가며 저리 가라고 하며 짜증을 내는 아버지를 정말 오랜만에 다시 봤다. 엄마가 돌볼 때도 본인 불편하게 하는 것 같으면 거칠게 말이 나오고 했다더니 이런 모습이구나 싶었다.
침대 정리가 끝나자 간병인에게 부탁을 했다. 아직은 말은 알아들으시니 몸을 건드리게 되면 먼저 설명을 하고 행동을 취해달라고 하고, 낯을 좀 가리니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질 거라는 말도 전했다.
한바탕 소동 끝에 침대 정리가 끝나자 간호사와 젊은 의사가 왔다. 혈관에 바늘을 꽂아 혈액 검사용 채혈을 하고 소변검사와 분변검사를 한다고 했다. 요의를 느끼지도 못하고 조절이 안 되어 소변검사는 튜브 삽입으로 했다. 10여 년 전에는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는 게 싫었는데 이번에는 별다른 거부감이 일지 않았다. 그 세월의 흐름에 녹아버린 것인지 아니면 어쩌면 하는 마음에 아버지와 사이에 있던 심리적 장벽이 사라진듯했다.
퍼렇게 멍자욱이 있는 손등에서 혈관을 찾는 게 쉽지 않아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성공했는데, 아프다고 하며 바늘이 꽂혀있는 튜브를 잡아당기려 하셨다.
“아버지, 금식이라 이거 꽂혀있어야 검사도 하고 주사도 맞고 수액도 들어가니 절대 뽑으면 안 돼요. 알아들으셨나?”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 하신다. 84세 아버지는 아기가 되어 버렸다.
그 소동 중에 젊은 의사에게 아버지가 말을 걸었다.
“ 본관이 어디야?”
“ 무슨 말이에요? 아버지”
“ 본관이 어디냐고?”
무슨 질문인지 황당해하는 의사에게 성에 관한 질문인 거 같다고 하니 문화 류 씨라고 했다. 의사 가운에 있는 “류”라는 글자를 읽으신 게다.
“아버지 눈 좋으시네. 언제 그 글자를 다 읽으시고..”
“문화 류 씨는 우리 큰집 동네야...”
참 인간의 뇌는 신기하다 싶었다. 더하기 계산이 안 돼도 글자는 읽을 수 있다니...
간병인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아버지가 빨리 익숙해지려면 엄마를 모시고 나가는 게 우선이다 싶어 이제 집에 간다 하니 아버지 표정이 굳어졌다.
“아버지, 엄마 허리 아프데요. 아침부터 이때 껏 병원 옮기는 거 기다리셨거든.. 내일 막내가 엄마 모시고 올 테니 밤에 소리 지르지 말고 잘 주무시고 계세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허공으로 손을 번쩍 들어 흔드신다. 아버지식의 인사다.
빠이~~ 빠이~~~
엄마는 아버지 발도 만져보고 가슴도 다독이고 머리도 쓰다듬고 손을 흔들고 돌아 나오셨다.
담당의사는 일단 CT 검사 결과를 보고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을 할 거라고 했다. 아버지의 체력이 검사와 치료를 받을 수 있는지도 판단이 안 되는데 병원에 들어오니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가장 최악의 경우에 따른 상상이 스쳐갈 때마다 아버지가 고생은 많이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이러다가 일을 당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오랜 투병 끝에 지친 엄마는 마음과 다른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 그러기에는 날씨가 좋아도 너무 좋은 날에 아버지는 대학병원 암병동에 입원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