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2일 목
담당의사의 회진 시간에 맞춰 엄마를 모시고 아침 8시에 병원을 갔다. 아버지는 가래가 심해서 석션을 4차례나 했다 한다. 엄마가 잠이 든 상태인 아버지 발을 건드리자 눈을 뜨셨다. 아버지 72세에 사고가 나서 병원생활이 시작되었고, 2년 후 엄마 72세에 아버지를 돌보며 요양보호사 자격을 따셨다. 환자의 발을 건드리며 반응 본다는 것을 그때 배우셨다고 했다. 나는 잠이 든 아버지를 그냥 뒀으면 했는데 엄마는 말을 걸고 눈을 맞추고 싶어 하신 듯했다. 간병인 보고 잠시 쉬시라고 하고 한참을 아버지를 들여다보니 입술이 말라서 가장자리가 터졌다. 립밤을 발라드리니 입술을 위아래로 움직이는 데 아기 같았다. 피부도 여전히 뽀얗고 희한하게 환자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나만 못 맡는 걸 수도..
드디어 담당의사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수술 동의하셨다고요,”
“네. 환자 호흡기 상태가 좋지 않은데 수술이 가능한가요?”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수술은 그대로 진행하고요. 주말부터는 외과로 넘어갑니다,”
아주 짧은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갔다. 늦어도 10시까지는 출근을 해야 하기에 엄마를 집으로 모셔다 드리고 출근했다.
일하느라 가족 톡방을 늦게 봤더니 셋째한테 수술동의서 작성하라는 연락이 와서 병원에 가서 사인했다는 내용이 올라왔다. 동의서 항목이 올라오고 검사 일정과 담당의사와 협진 내용도 올라왔다. 병원 앱으로 자료가 즉시 공유되는 모양이다. 수술동의서에는 만일의 경우라는 단서조항으로 개복수술과 중환자실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수술하다가 잘못되거나, 수술하려고 들여다봤는데 이미 상태가 너무나 안 좋아서 그대로 덮어버렸다거나, 수술 도중에 심정지나 호흡정지가 일어나는 것과 같은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상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왜 자꾸 이런 상상만 일어나는 건지....
어쨌거나 노령에 오랜 병상의 몸이라 좋은 결과를 기대하지 못하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시간이 지나기만을 바랬다.
12월 13일 금
막내가 일찍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왔다. 아버지는 콧줄은 빼고 내시경 검사 대비 관장을 하느라 많이 힘들었고, 간병인도 힘들어했다는 내용이 톡방에 올라왔다. 엄마한테 ‘여보야’라고 하며 찾았었는데, 검사하러 이동하면 간병인 옷을 붙잡고 ‘여보 슈’라고 하셨단다.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거나 관계의 호칭은 안 되는 모양이다. 그래도 예뻐하던 늦둥이 막내딸과 여보야를 매일 보니 아버지는 많이 편안하고 안정되어 가는 느낌이다.
12월 14일 토
일찌감치 독립해서 생활하고 있는 아들 녀석과 기숙사에서 아르바이트하러 나온 딸애를 만나느라 병원에 가지는 않았다. 대학병원으로 이송을 결정하고 난 후에 애들한테 할아버지를 만날 시간을 내보라고 했더니 시험을 앞두고 있다며 다음 주말에 간다 했었다.
빵집으로 아르바이트 가는 딸애를 데려다주고, 아들 녀석과 아침을 함께 하고 강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늘 가던 커피 집에서 커피를 한잔 사들고, 늘 다니던 산책길을 걸어가는데 유난히 물에 비친 잔영에 눈길이 머물렀다. 강가의 풀숲에는 파란 칠을 한 배가 둑에 기대어 있었다. 아침 햇살이 수면에 빛나고 가벼운 바람이 물 위에 주름진 무늬를 만들어 내는 것을 한없이 바라보다 손이 차가워지고 있음을 뒤늦게 깨닫고 외투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한번 얼은 손은 쉽사리 따뜻해지지 않았다. 뜨거웠던 커피 잔도 온기를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되어 감싸 안아도 손이 따뜻해지지는 않았다.
마치 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돌아다니다가 딸애가 부탁한 김밥이 생각나서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김밥을 사서 나오니 백팩을 메고 자전거를 탄 청년이 앞에서 한 바퀴 돌더니 멈춰 선다.
“엄마, 뭐하세요?”
“아.. 응.. 네 동생이 김밥 사달라고 해서.. 근데 어디가?”
“과외 끝나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려고..”
“그래, 잘 다녀와.”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다가 아들애 집으로 갔다. ‘혼자서도 잘해요’를 실천하고 있지만, 시험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집안일이 밀린 듯했다. 설거지를 하고 청소하고 세탁기 돌려서 빨래 널고 반찬 몇 개 해놓고 나왔다. 창가 화분에 물을 주는 것을 끝으로 오늘의 일과 끝! 시험이라 봐줬다는 문자를 넣고 돌아왔다. 어무이 고마워요 하는 아들의 답이 왔다.
오늘은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고 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