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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Dec 19. 2019

9. 아버지의 책 2

12월 15일 일 


느지막한 아침을 맞고 싶었지만, 5시도 되지 않아서 깼다. 너무 일찍이야 하며 물을 한잔 마시고 커피를 내리고 창밖을 보니 춥지 않아 보였다. 오늘도 날씨가 좋으려나...


10시쯤 엄마를 만나서 병원에 갔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주차는 수월하게 했고 항상 기다리던 엘리베이터도 바로 탈 수 있었다. 왠지 느낌이 좋았다. 


어제까지 대장 내시경에 여러 가지 검사를 하느라 힘들었을 텐데도 아버지는 엄마를 보더니 반색을 했다. 내가 누구게 하는 말에 큰딸이라고 답을 하셨다. 여전히 101살임을 말씀하시기도 했다. 

엄마는 여기저기 살펴보고 쓰다듬어보고 간이침대에 앉았다. 엄마가 자리를 잡고 난 후에 내가 들어가서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 옛날에 보던 책 찾아보니 신문스크랩이 여러 개 있던데.. 오늘 내가 가져왔거든..”

“이거 아버지가 한 거 맞아요?”

“응..”

“사랑에 관한 시가 많네.. 아버지 로맨티스트였나 보다..”

한 장씩 펼쳐서 보여드리니 한동안 들여다보셨다. 글자를 응시하는 눈빛이 조금은 밝아지고 오래된 신문 조각의 글자를 읽고 있는 모습이었다. 며칠 전에 한자도 읽으셨는데 이 정도는 쉽게 하시겠지 싶었는데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으셨다. 


오래전 신문 스크랩을 접어서 넣어둔 책은 ‘우리 시 100선’이었다. 2008년도 신문에서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詩’라는 코너를 잘라서 모아두신 것이다. 


사랑 사랑 내 사랑  (오탁번)

어느 사랑의 기록 (남진우)

찔레 (이근배)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김용택)

거미 (김수영)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 석)

고추씨 같은 귀울음 소리 들리다 (박성우)

날랜 사랑 (고재종)

행복 (유치환)

사랑의 역사 (이병률)

농담 (이문재)


아버지가 이런 시를 모아서 보관하는 사람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우리에게 시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동생들도 잘 모를 것 같았다. 엄마는 이런 아버지의 세계를 알고는 있었을까? 아버지는 도대체 이런 걸 누구와 나누고 있었을까? 

다시금 흐려지는 아버지의 눈빛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질문이 올라왔고 답 아닌 답도 혼자서 내리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 아버지는 참 외로운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판단을 처음으로 하게 된다.  여행이나 모임을 하면서 유난히 혼자서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발견되는 공통점은 많은 이야기를 하는데 본인의 이야기만 한다는 것이다. 상대와 교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말을 쏟아내고 있는 모습들...

친가 식구들이 모였을 때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냥 그런 모습이 싫기만 했었는데..

이제야 새롭게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했다. 그리고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내일의 수술을 앞두고 참 상념이 많다. 


오래 병실에 있으면 상념에 깊게 빠져들 것 같아 엄마를 모시고 나왔다. 날이 너무 좋으니 드라이브하자 했더니 우리 집으로 가자고 하셨다. 집에 가서 좀 쉬게 해드리고 싶었다. 강변을 따라 10여분 달려가는 차 안에서 엄마는 날이 좋다는 말씀을 연거푸 하셨다. 


점심 식사는 안 한다고 해서 과일이라도 드린다 했더니 물만 달라고 하셨다. 요즘은 도서관이 서가 정리 기간이라 책을 빌리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저자 사인본으로 갖고 있는 책을 꺼내드리니 소파에 앉아 책을 펼치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돌보다가 힘들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해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700권이 넘었다. 내 평생 1000권을 읽는 게 목표다.”


햇살이 따듯하게 비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쿠션을 놓고 그위에 책을 올려놓고 독서하는 엄마의 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아버지를 돌보며 엄마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58년을 함께 살아온  아버지의 젊은 시절과 엄마의 노년 시절이 맞물리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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