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섬 Feb 19. 2024

[나의 망생일지] 사각사각, 기록의 감촉

우리집 갈매기는 이렇게 운다. 기록. 기록.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할 때에 나는 하루 일과를 정리해서 시뮬레이션해본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 그리고 그다음 이동하고 또 몇 시부터, 몇 시까지...

그나마 감사한 것이 누군가와 약속한 것은 아직도 머릿속에 다 기억하는 편이지만, '혹시 몰라서', 그 혹시 때문에 핸드폰 일정표에도 입력하고 우리집의 탁상 달력에도 손으로 적어 넣는다.


당연히 요즘은 '아, 뭐지? 그날 뭔가 있었는데...' 하는 불안한 기분이 가끔 쳐들어온다. 역시 나이 듦을 받아들여야 할 때이니...

가끔 청소를 하거나, 빨래를 개다 보면 재미난 이야기가 생각나거나, 대사가 불쑥 떠오를 때가 있다.

'이 일 다 끝나고 난 다음에 빨리 그 아이디어 글로 써야지' 하다가는 낭패다. 그 '아이디어' 자체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의 선배님들은 이렇게 이르신다.


"좀만 있어 봐. 내가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를 까먹어."

아아!


한창 직장 다닐 때는 회사 노트에 개인 다이어리에 일 관련 노트까지 따로 만들어서 열심히 기록했었는데, 노트북이 내 주 무기가 되고 나서부터는 기록과 서서히 멀어져 갔다. 대신 에버노트를 원시적으로(?) 활용을 하고 있다.  

즉, 아까 이야기했던 아침 샤워 시간에 오늘은 어디 어디까지 일하고, 어디 갔다가 돌아와서 하루 일과 마쳐야지 정리했던 것들은 생각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러다가 요즘 구독해서 읽고 있는 '폴인'에서 기록학자라는 분의 인터뷰를 접했다.


https://www.folin.co/article/6437


솔직히 여기저기에서 너무 열심히 살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자기 계발서'도 홍수같이 넘쳐난다. 예전부터 '그런' 책 싫어했지만,  하도 사람들이 열광하니까 그래도 한 번 읽어볼까 하고 '세이노의 가르침'이나 '하와이 대저택'이라는 사람이 쓴 책을 보았다.

역시나 크게 성공한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악마와의 키스'에 대한 내용은 한 줄도 씌어있지 않았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도대체, 어딜 가서 그 '악마'를 만나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좋게 좋게 허허실실 사업 성공해서 먹고살만해지면, 어딘가에 과감하게 투자하여 '나는 이 돈은 모르오' 하고 묻어두다가 어느 날 보니까 어? 나 부자네? 이렇게 된 사람 세상에서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그렇게 점점 피로해지던 차에 이 인터뷰를 접하게 된 것이다.

'또 얼마나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거야?'

내심 이 생각으로 클릭!


결론.

잊었던 '기록'에 대한 감각을 되살려주는 인터뷰였다. 심지어 손글씨 기록 말이다.

글씨를 예쁘게 쓰고, 공책 정리 잘하는 사람들 보면 정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는데, 그래도 그 펜이 종이에 닿는 사각사각 느낌을 참 좋아한다.

그래서 종이책을 일부러 사서 읽으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바로 이 '사각사각'에 있다.


내가 좋아하는 노트와 펜들


거의 5년 정도 계속 들고 다니는 노트가 있다. 바로 '두산 아트 센터' 굿즈 판매점에서 구매했던 노트다. 처음에는 한 4-5개월이면 한 권을 다 썼는데, 이제는 일 년을 내내 들고 다녀도 다 채워지지 않는다.

점점 나이 들어서 뇌의 주름도 자꾸 늘어져서 평평해지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매일 아침, 손글씨 자극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록학자인 김익한 교수의 기록은 다음 네 개의 섹션으로 이루어진다.


- 감정기록: 하루 동안의 감정의 흐름. 감정의 원인 찾기.

- 구상기록: 업무 기록, 목표 주안점, 핵심 성공 요인.

- 계획기록: 중요한 일, 해야 할 일 중심으로...(시간 나열 하지 말기)

- 한 줄 일상기록: 느낀 감각과 감정을 시간순으로. 하루에 얻은 아이디어나 대화.


김교수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리듬과 집중이었다.

사람인데, 어떻게 내내 온몸에 힘 꽉 주고 365일을 사냐는 것이다. 중요한 일을 가리고, 추출해서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휴가도 가야 한단다.

나는 머릿속이 복잡할 만큼 할 일이 많을 때는 메모지에 아주 빼곡하게 할 일을 다 적어 넣는다.


1. 세탁기 돌리기

2. 식기세척기 돌리기

3. 쓰레기통 비우기

4. 빈 그릇 정리하기

5. 기획안 작업하기

6. 자료수집

7. 청소하기

8. 아들 수영장 준비

9. 출판 계약한 책 아웃트라인 잡기

10. 도시가스비 입금, 월세 입금, 뭐뭐뭐 입금... (아악!!!)

11. 에세이 한 편(브런치 글...) 완성

12. 딸 저녁 지어주기

13. 어제 끓이던 갈비탕 오늘 완성(응?)

14. 각 방 침대보 갈기

15. 사마디 관련 유튜브 시청

.................................

이런 식이다.

실제로 오늘 내가 한 일 메모다. 지금 줄줄이 적혀 있기는 한데, 뭐가 중요한 일이고 뭐가 뒤로 빼도 될 일인지는 구분이 전혀 되어있지 않다. 나는 이 15가지의 일을 다(심지어 마지막 수정하는 지금은 두세 가지 일이 더 추가되었다), 빠른 시간 안에, 완벽하게 해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내게 가끔씩 무섭도록 침범하는 불안과 번아웃의 원인이 여기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정말 365일을 노트북을 끼고 있다. 그리고, 매일매일 일한다. 그런데 보면 일과 일상의 경계를 제대로 가르지를 못하고 지지부진... 늘 보면 일은 하고 있는데, 집중하는 시간은 탈탈 털어보면 하루 네 시간 정도 잘 채우면 다행이다.



내가 좋아하는 두산아트센터의 빨간 공책이 아직도 열 권은 족히 남았다.

촉감도 사이즈도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서 평생 쓸 생각하고 미리 십수 권 사둔 것이다. 내게는 아직도 이 공책을 능가하는 물성을 만나지 못했다!

그동안 개점휴업이었던 이 공책을 다시 가동할 시간이 온 것 같다.

일단 매일 하는 작업에 대한 기록부터 시작해 보겠다.



요즘 여덟 번째 기획안 다 엎어져서 아홉 번째 기획안 스토리 다시 잡고 있다.

(이 소식에 지긋지긋하실 분들 계실 텐데... 기획안 쓰는 나는 정작 지긋지긋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여기에 필요한 마인드맵 작업 초안을 마칠 예정이다.

깃마인드라고 ai 기반으로 하는 마인드맵 툴이 나왔는데, 명령어에 따라 좌르르 스토리 트리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힌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혹은 나의 명령어가 충분하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인간의 작업만큼 엣지나 재미가 있지 않다. (인간으로 태어나 글을 쓰는 작가로서 정말 다행이다! ai를 내 비서로 고용해서 사이좋게 잘 지내고 싶을 따름이다)

오늘 마쳐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에 따른 자료조사나 독서 등은 다음 단계.


집안 일도 완벽하게 되어 있으면 좋을 테지만 내 노력이 너무 많이 들어가고, 나중이라도 비용을 들여 도우미의 손을 빌리면 더더욱 시간을 알뜰히 쓸 수 있을 것이다.

출판 계약한 책 아우트라인 잡기는 나 혼자 할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 내일쯤  연락을 취하면 된다.

일단 오늘은 일찍 취침해서 좋은 몸과 뇌의 컨디션을 만들어서 내일치의 집중력과 창의력을 뽑아낼 준비를 하자.

(이렇게 야무지게 하루의 마무리를 하는 척하지만, 사실 다음 날 아침이면 늘 후회와 자책, 그리고 새 결심으로 시작할 때가 많다)


에에,  이제 나는 담배 사러 간드아~

https://youtu.be/0PTp7ZXvVCU?si=-Ioo31RLcZ99lv9n





이전 17화 [나의 망생일지] 그래서 기획 회의 어떻게 됐다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