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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Jun 27. 2024

늙음은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손가락 때문에 참다, 참다 한의원으로 출동하였다. 2,3,4번 손가락이 차 슬라이딩 도어에 끼이는 참사 후 어느덧 보름. 생각해보니 이 손가락들 말고도 왼쪽 팔꿈치도 아픈지 꽤 되었는데도 그냥 잠을 잘못 잤으려니 하고 돌보지 않았는데,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관능은 생로병사가 없는 모양이다.

가슴이 계속 두근거리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젊은 날에 만났다면,

그리하여 너와 나 사이에 아무런 터부도 없었다면

너를 만난 후, 나는 아마 시를 더 이상 쓰지 않았을 것이다.

네게 편지를 쓰면 되니까."

- 박범신 作 소설 [은교] 중에서


한의원에 갔더니 담당 한의사 선생님이 오늘 쉬신단다. 잘 됐다, 싶었다. 그 선생님, 말씀도 너무 많으시고, 아무리 치료라고 하더라도 슬쩍 슬쩍 골반이나 가슴 쪽 만지는 것 진짜 좀 별로였었다. 원래는 '잠깐 이곳을 건드리겠습니다.' 내지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런 정도의 이야기를 하면서 예상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말이다. 기분 더러웠었는데, 너무 아파서 그 정도는 참아야지, 하고 왔던 길이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그러면 내가 "뻥이요!" 하고 외치며 고추를 잡아당길 심산이었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 영화 <은교> 중 '이적요'


새로운 선생님은 무표정하고, 목소리가 작으며, 딱 치료만 하고 나가는 곤약같은 분이었다.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내 오른손은 아무래도 침치료로 될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왼쪽 팔꿈치는 힘줄에 염증이 났다고 하시며 약침을 놔주셨다. 그리고, 내 손가락 언제 봐주시나 계속 기다렸는데, 그냥 이 한 마디 남기고 떠나셨다. 

"온찜질 자주 하세요. 시간 날 때마다 하세요."

"어? 냉찜질이 아니었나요?"

"다치고 2-3일은 냉찜질인데, 그 다음부터는 온찜질이오."

온찜질이오. 요 어미처리도 마음에 들었다. 나가서 계산하면서 담당 한의사 선생님 요 '온찜질이오.' 선생님으로 바꿔달라고 했다.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 오른 손가락은 그저 다 나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치료였다. 아마 앞으로 어디가 아픈데, 그리고 왜 아픈지 아는데, 그냥 참고 그러려니 하고 사는 나날들이 많아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늙어가는 것'일 것이다. 

한 40년 전, 우리 외할머니가 맨날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이거였다. 

"아고~ 골치 아퍼~ 골치 아퍼 죽겄네."

초고도 비만에 고혈압이 있었던 우리 외할머니는 맨날 골치가 아프다고 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골치'라는 말을 배웠다. 그리고, '골치'라는 단어랑 이상하게 보라색이 겹친다. 우리 할머니가 보라색 옷을 입으셨던 것일까. 할머니는 평생 골치를 견디며 사셨다. 


나도 어쩌면 손가락 마디와 팔꿈치, 발꿈치, 내 몸의 온갖 꿈치들의 고통을 그러려니 하고 감내하며 살아야 할 지도 모르겠다. 늙음은 이렇게 아프게 온다. 젠장. 

막, 늙으면서 날씬해지고, 늙으면서 점점 몸이 개운해지고, 늙으면서 술 겁나 늘어서 말술 되는 이런 현상은 없나. 이런 게 진정한 영피프티 아닌가?


지금은 벌써 <은교>의 이적요와 같은 칠십대가 되었을 어떤 사람이 나에게 해준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평생을 안경 안 쓰고 살다가 처음으로 안경을 썼을 때, 나는 절망했어." 

나야 열한 살 때부터 안경을 써서 그렇다 치더라도, 평생을 좋은 시력으로 살다가 노안이 와서 안경을 쓰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절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른 두 살 때던가 라섹 수술을 받고 안경에서 해방된 이후, 다시 노안으로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썼던 안경처럼 뱅글뱅글 알이 돌아가는 안경은 아니었던 지라 나름 패셔너블한 아이템으로 설렁설렁 썼는데, 이제 전철역에서 갈아탈 때 안경 없으면 아주 짜증 날 지경이다. 그렇게 겨우 겨우 갈아탔다 하더라도 이동 중에 핸드폰이라도 볼라치면 얼씨구, 이제는 가까이 있는 게 안 보인다. 사실 이것이 내게는 바로 저 위 이야기했던 사람 말대로 '절망'이었다. 뿐인가. 여름이면 썬글라스까지 가방에 안경 세 개를 넣어 가지고 다닌다. 

'눈'이 내 늙음의 신호탄이었다. 


큰 병으로 하루하루 애써 투병 생활하고 계시는 분들도 계신데, 겨우 손가락 세 개, 너무 징징대는 것 같아 송구스럽다. 늙어가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 뿐이었다. 나도 혹시 언젠가 중한 병에 걸려 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 수도 있을 테고...

여하튼 내 오른쪽 손가락 세 개 너무 아프다고! 내 고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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