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는 카레를 한솥 해 놓은 바람에 매일 카레 파티다. 카레밥, 카레밥, 카레밥.... 또 카레밥...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카레를 꼽지 않는다. 그런데도 가끔은 해 먹는 음식이다. 왠지 짜장밥 보다는 더 건강할 것 같고, 냉장고를 부탁하기에도 최고의 음식이기 때문이다.
임신했을 때 지독한 입덧 욕지기에도 말을 듣는 것은 오로지 카레 밖에 없었다. '오뚜기 카레 매운맛' 이거 하나면 조금 나의 속사정이 편안해지는 듯했다. 고기도 필요 없고, 다른 감자, 당근 다 필요 없다. 가루만 물에 풀어서 펄펄 끓이면 충분했다.
내가 카레를 처음 먹었던 것은 다섯 살 때로 기억한다. 우리 어렸을 때에는 동네에서 "누구야~ 노올~자~!" 하고 대문 밖으로 친구를 불러내고 바로 골목 골목에 자리 잡고 앉아서 소꿉을 차리든지, 다른 애들이 뭉쳐서 놀고 있으면 스윽~ 거기에 끼면 됐다. 혹은 혼자 외로이 놀고 있는 아이가 있으면 "우리 같이 놀자." 하고 요청하고 함께 노는 식이었다. 그렇게 어떤 꼬마를 동네에서 만났고, 그 꼬마는 나랑 놀다가 집으로 간다고 했다.
- 엄마가 카레 먹으러 오래.
- 카레?
또 한 번, 지겹게 얘기하지만 우리 엄마는 음식 솜씨 없고 밥과 반찬, 국, 찌개만 만들어주셨다. 카레, 짜장, 떡볶이, 햄버거와는 거리가 먼 분... 그래서 딸인 나도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카레가 뭔지 몰랐던 것이다. 아마도 카레를 먹으러 간다던 그 꼬마는 세 살 정도 되었던 모양이다.
나랑 같이 집으로 가자고 하더니 집에 가서는 기저귀 바람으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예쁜' 엄마가 밥상 위에 카레를 두 그릇 올려 가져다 주셨다.
그날을 잊지 못한다. 온 집안에 풍기는 카레향, 단독 주택 널따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 부엌 쪽은 어두컴컴해서 더더욱 그 대비 때문인가? 밥상을 중심으로 들어오는 햇볕의 아늑함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그날이 내가 처음으로 카레를 먹은 날이다.
한 그릇 더 먹고 싶었는데, 아주머니께 미안해서 꾹 참았다. 이 꼬마는 키도 작고, 나이도 어리고, 아직까지 기저귀 찬 어린애여서 양이 너무 작았단 말이다. 이 꼬마랑 같은 양으로 담아주셨던 터라 또 먹고 싶었다. 앉은 자리에서 어른 팔뚝만한 옥수수를 세 개씩 먹어 치우던 나는 이 처음 먹어보는 맛에 홀딱 빠졌다.
나는 옛날 옛날을 기가 막히게 기억한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고, 너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까지 기억한다.
한 번은 국민학교 1학년 때 친구를 무려 '단독음주자들'이라는 페이스북 모임에서 찾을 정도였다. 감이 딱 왔다. 이 이름 보는 순간, 어쩌면 여덟 살 때 우리반 남자애일지도 몰라.
아니나 다를까....
혹시 단음 회원님들 중 ** 학교 1학년 때 11반이었던 분, 계시냐는 포스팅을 그 모임에 올렸고, 웬일~ 그 애가 맞았다. 그리고 그 애는 어려서 키가 큰 여자애가 한 명 있었다는 것 정도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너무 모든 것을 기억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내가 '사기꾼'이 아니냐고 몰아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다 기억하는 척 하면서 사기를 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기분이야 몹시 나빴지만, 그래, 나 같아도 내가 모르는 것들을 누군가가 알고 있으면 무서울 것 같아서 그냥 바로 연락을 끊었다.
기억력이 너무 좋으니까 인생, 이렇게 피곤하기도 했다.
자자, 너무 긴 글에 지쳐가는 여러분들,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다들 에너지 드링크라도 한 캔 드시고 힘을 내보자.
동부특수교육지원센터에서 장애아를 키우는 어머니들 대상으로 집단 상담을 12주 동안 한다는 공지가 지난 달에 떠서 냅다 신청했다. 그래서 오늘부터 시작.
오늘은 네 명의 엄마들이 한 방에 모여서 이 집단 상담에 대한 개요와 목적들을 이야기하고 자기 소개를 했다. 상담을 이끄시는 선생님은 내가 강의할 때마다 쓰는 방법인 '별명 짓기'를 해서 반가웠다. 내 별명은 '토튀'다. '토마토 튀김'. 스무 살 때 봤던 영화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에서 따온 별명이고, 쓴지는 벌써 20년이 넘었다.
이렇게 집단상담에 모인 엄마들도 다 좋은 사람들이고, 점점 물이 오르고 있을 무렵....
슬쩍 출석부 옆에 엄마들 이름을 봤다. 순간 소오름!!!!!!!!!!
'어? **?'
그 엄마 얼굴을 보니 양 옆으로 삐삐 머리를 하고 기저귀를 차고 있던 동네 꼬마가 휘리릭 스쳐갔다. 어? 정말? 설마?
내 인생 첫 번째 카레를 먹었던 날의 그 꼬마가 집단 상담 학부형이라고?
가슴이 쿵쾅대고, 진짜 말 다 끊고 "언니, 수유리 사람이죠?" 물어보고 싶었는데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2시간 상담 후, 엄마들끼리 남아서 우리 밥 먹고 갈까요? 어쩔까요? 이야기 하고 있는데, 내가 천천히 물어봤다.
- 수유리 사셨어요, 어려서?
그랬더니 너어~무 놀란다!
- 네 맞아요!
아, 그 꼬마 맞구나.
- 기억은 안 나겠지만. 그리고 안 믿기겠지만, 내가 엄마랑 동네에서 같이 놀던 언니였어요.
그런데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그 엄마가 내게 물어봤다.
- 그럼, 혹시 인수 국민학교 나오셨어요?
- 네.
결론. 이 엄마의 남편은 내 동생 친구. 어려서 얼굴 잘 생기고 멋쟁이로 유명한 아이였다. 우리집에 당연히 자주 놀러왔던 아이였다. 그리고 이 엄마의 시누는 내 친구. 나랑 걸스카우트 같이 하던 친구였다.
- 어우야~ 나는 연탄 구멍도 보기 무서워 한단 말야~
어린시절, 함께 스카우트 캠핑을 갔다가 했던 친구의 말이 떠올라서 이 얘기를 해줬더니 완전 뒤집어진다.
- 어머어머, 우리 시누 환공포증 있어요! 맞아요! 웬일이야!
그리고 어머니도 카레를 자주 만들어주셨다고 한다.
세상은 참 넓은데, 또 이리도 좁다.
45년, 46년 전 어떤 날씨 좋은 날 낮에 같이 밥상을 가운데에 두고 카레를 먹던 꿀돼지 다섯 살, 기저귀 차고 있던 세 살 꼬마가 5학년, 4학년 자폐아를 키우면서 이렇게 한 교실에 모이다니...
그 세월 동안, 나는 처음 먹었던 카레만 기억하고, 그 동네 꼬마는 찾을 생각 조차도 못했는데...
기적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