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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원 Oct 15. 2024

잔다르크의 소원

 막내 네다섯 살 때였나?  대전에 있는 과학관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아이들은 과학관 매점에서 부메랑처럼 날리면 돌아오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아이 셋이 날려대니 남편과 나는 장난감 수거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느닷없이 들려오는 우렁찬 소리.


"내 거야!"

"아니 이건 내 거라니까."

"아니야 내 거야!"

"아니 이건 내가 산 내 거라고."


 얼른 쫓아가보니 막내가 유모차에 앉아서 5~6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랑 싸우고 있었다. 남자아이가 같은 장난감을 던지고 놀다 우리 막내 앞에 떨어뜨렸는데 그것을 주우니 막내가 벼락같이 소리를 지른 모양이었다. 얼른 달려가 남자아이에게 미안하다 아기라 몰라서 그런다 하고 보내고 남편과 나는 속으로 엄청 웃었다. 유모차 탄 꼬맹이 주제에 한 참 큰 오빠한테 지지 않고 대드는 기백이 뭐랄까? 말을 탄 잔다르크 같았달까? 아니면 독립투사 정도?

사진 출처: 픽사베이


 어렸을 때부터 기백이 남다르더니 어쩜 막내는 씩씩하고 용감했다. 학교에서 여자 아이들 사이에 리더 역할을 한다고 했고 집에서도 그다. 유난히 내성적이고 숫기가 없는 쌍둥이 언니들을 리드하며 궂은일을 떠맡기도 했다.


 남편과 내가 밖에 볼 일이 있어 셋에게 처음으로 점심을 사 먹으라고 미션을 준 날이었다. 기뻐하는 막내와 달리 첫째가 울상이었다. 자기는 주문하기 무섭다며 롯데리아 안 가고 차라리 굶겠다는 거였다. 그러자 막내가 하는 말.


"언니야 내가 주문할게 언니는 가서 앉아만 있어." 이런 멋진 걸크러시를 보았나!


 같이 놀자고 하는 것도 나가 놀자고 하는 것도 보통은 막내다. 내가 태몽을 거하게 꿔서 장군감이 나왔나 보라고 속으로 좋아한 적도 많다. 손 많이 가는 애셋 육아에 가끔은 보탬이 되니까 말이다. 예를 들면 이런 일이다.


 9시가 넘어 애들이 차례로 잘 준비를 마치고 내가 씻으러 들어갔을 때였다. 후다닥 분주해지더니 꺄악꺄악 소리를 지르며 쌍둥이 중 하나가 쿵쿵대며 달려왔다.


"엄마 벌레 들어왔어요."


 방충망에 안 걸리고 들어온 놈이면 뭐 작은놈이겠지 싶어


"막내한테 잡아달라고 해"하고 말했다.


  이전에도 그런 벌레 이슈는 대부분 막내가 처리하기도 했고 나는 머리에 트리트먼트를 하고 있던 터라 바로 나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금방 그칠 것 같던 소란은 쉽게 끝나지 않고 이어졌다. 다른 쌍둥이가 다시 달려왔다.


 "엄마 엄청나게 큰 벌레라 막내도 무섭대요."


 '아뿔싸. 내가 나서야겠구나.' 벌레라면 치를 떠는 내가 그동안 애들 앞에서 안무서운 척 가 떤 것이 후회가 되었다. 지금이라도 아빠 오실 때까지 기다리자고 해볼까? 심호흡을 하고 머리를 동여맨 채로 거실로 나가려는데 들려오는 말소리.


"야. 제발 좀 잡아줘."

"나도 무섭다니까!"

           '암만 에미도 무섭다.'

"그래도 너는 수 있잖아."

           '그래 막내야 넌 할 수 있어.'

"내가 벌레 잡으면 뭐 해줄 건데?"

           '얼씨구 협상능력 보시게.'

"너 해달라는 거 다 해줄게."

          '진짜? 지금이라도 내가 잡아주고 나중에 전교 1등 해달라고 할까?'

"진짜지?"

"그렇다니까!"


 이구동성로 외치는 둥이를 보며 결연한 의지를 다진 막내가 소원을 말했다.


"언니야. 그럼 나한테 언니라고 말해봐."

"......"


 유명을 달리한 커다란 벌레는 쓰레기통에 던져졌고 소원을 이룬 잔다르크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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