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방기연 Mar 08. 2019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겸손의 미덕

"겸손해야 한다."

가끔 들었던 말이다.

그런데 겸손하라는 말이 억지처럼 느껴진 적이 많았다.

아마도 날 선 비판을 할 때 되돌아온 공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겸손이란 것이 무엇인지 가만히 살펴본다.



어떤 존재이든 제자리에 있을 때 빛이 나기 마련이다.

맛있는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지 않고 옷에 묻는다면 골칫거리가 되고 만다.

병충해를 없애는 농약이 입으로 들어가면 독이 된다.

나름의 쓸모대로 쓰이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모순이 발견되었을 때 그 모순을 해결하려 노력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잘못된 구조를 바로 잡으려 한다거나 더 나은 방식으로 고치려 할 때 저항이 발생한다.

이미 익숙한 방식으로 계속 가려는 관성이 작용하기 때문에 변화를 주려 하는 순간 힘이 든다.

변화를 거부하는 쪽에서는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모순을 지적하며 고치려 드는 대상을 공격하기도 한다.


정의롭지 못한 일들이 관행으로 되풀이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문제제기를 하면 변화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내게 던지는 공격이 "겸손해라!"였다.

겸손이 순응은 아니지 않은가.

본질을 외면하고 엉뚱한 구실을 들이대며 모순을 감추려 하는 행위에 어떻게 순순히 따를 수 있겠는가.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며 억지춘향 격으로 겸손을 강요하는 사람들한테 말하고 싶다.

"벼가 당신들의 스승인가?"라고.

벼가 익으면 낱알의 무게를 지탱하기 힘들어 굽어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 하필 그런 현상을 갖다 붙여서 사람한테 고개 숙이기를 강요하는가.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인데 그냥 멋대로 엮어버린 것 아닐까.

 

사람이 공부를 해서 속이 차게 되면 벼처럼 고개를 숙이는 것이 맞을까?

조금 알게 된 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은 미숙한 철부지이다.

알면 알수록 더 알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아직 밝혀지지 않은 관련된 부분도 많아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많이 알수록 더 신중해지게 되고 이것이 겸손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다.

많이 알수록 더 많이 모르고 있음을 인정한다.

성숙할수록 미숙함을 인정하고 감싸안는 마음도 커진다.

겸손을 강요하는 사람은 겸손을 모르는 사람이다.


자연현상을 억지로 사람의 행동에 끼워맞추면서 자기 입맛대로 남을 통제하려 드는 사이비 지식인들을 많이 보았다.

그들이 사용하는 논리는 수많은 오류를 품고 있는데 정작 그들 자신은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합리성도 부족하고 논리도 맞지 않는 주장을 신줏단지 모시듯 절대화하는 사람들을 보면 측은하기까지 하다.

'어리석음, 어리석음, 어리석음'이란 단어만 내 머릿속을 맴돈다.


상담을 하면서 내가 내담자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돌아볼 때마다 아찔한 심정이 되곤 한다.

정말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

저절로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겸손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히 모른다고 인정한다는 말이다.

모르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진심으로 묻는다.



겸손은 벼가 고개를 숙이는데서 찾으면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고개만 숙이는 것은 겸손이 아니다.

온몸을 낮추어야 겸손이다.

자신을 내세우려 하는 것은 경솔하거나 어리석은 자만일 뿐이다.

모순을 직면하고 해결하려 애쓸 때에는 본질에 집중해서 필요한 조치를 하는 것이 진정으로 겸손한 것이다.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자신의 뜻을 꺾는다는 말이다.

겸손은 자신을 꺾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진리를 구하는 자세가 진정한 겸손이다.

오히려 고개를 들고 귀를 열어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돌볼 줄 알아야 하겠다.

벼는 익어서 고개를 숙이지만 사람은 익을수록 꼿꼿해져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