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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nny May 16. 2020

이길 수 없는 전쟁

미국과 월남, 그리고 월맹의 시각에서 본 베트남 전쟁과 그 교훈

프롤로그  


월남전(베트남 전쟁)은 한국군이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기치 아래 해외로 파병되었던 최초의 전쟁이다. 참전을 통해 한국은 국위선양, 조국 번영의 경제적 기반 조성, 실전체험을 통한 전투력 강화라는 기본목표를 달성하였다. 더불어 라이따이한의 사회적 문제와 참전용사들의 고엽제 후유증 문제는 월남전 종전 5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월남전을 상기시키고 있다. 월남전에 대한 평가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월남전이 단순한 공산주의 대 반공주의의 대결이 아니다.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독립투쟁과 식민주의, 혁명과 반혁명, 통일과 분열, 독립과 의존, 인권과 종교, 자유와 억압, 백인과 유색 인종, 아시아와 서양, 현대와 낙후, 공업과 농업, 초현대식 폭격기와 원시적 소총, 전자계산기와 주판, 선입관과 고정관념, 사랑과 증오를 비롯한, 다양한 갈등 요소가 복합된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이 글의 제목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이다. 편향된 미국적 시각이 아닌 미국과 월남, 그리고 월맹의 시각에서 역사를 봐야 왜곡되지 않게 평가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글을 썼다. 프랑스의 월남 침공과 식민정책에 대항한 호지명 공산당의 조직으로부터 프랑스의 식민 정책과의 투쟁, 프랑스의 철수와 미국의 개입, 월남의 패망에 이르는 단계까지를 월남전의 연속적인 상황으로 보았다. 프랑스와 월남, 미국과 월맹을 동등한 행위자로 보고 국제적 상황과 전쟁의 성격, 전쟁 준비와 국가 동원, 전쟁의 목적과 전쟁계획 및 수행, 교훈, 결과 평가를 통해 월남전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결과적으로 월남전은 월맹이 승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월맹은 분명한 목적하에 철저한 계획과 준비로 전쟁을 수행했다. 반면, 월남은 전쟁에서 승리하려는 의지가 결여되어 있었다. 미국도 확고한 전승 의지 없이 전쟁에 개입하였다. 더구나 전쟁 수행 과정에서 그 의지는 더욱 약화되었다.               



국제적 상황과 전쟁의 성격          


국제적 상황

월남전에 대한 상황 인식은 월맹 측의 입장과 월남 측의 입장에 따라 상반되는 견해가 있다. 월맹의 입장에서 월남전의 역사는 1863년 월남이 불란서 식민통치하에 있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월남전쟁은 자유민주주의 대 공산주의의 대결구조가 아닌 식민지 종주국 대 피식민지국의 대결이며, 수십 년 동안 월남 민족이 식민지 종주국인 불란서와 그 뒤를 이은 미국의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수행한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개념이다.  


월남 측 입장에서 미국은 월남전쟁 개입이 공산주의 팽창을 막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것임을 월남 국민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고 딘 디엠을 등장시켜 민주국가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무차별 체포, 정치적 재교육이라는 명분의 강제수용소 운영, 지방 주민의 강제적 집결 수용 등과 같은 고 딘 디엠의 실정으로 미국의 명분은 약화되었다.

     

전쟁의 성격

제1차 월남전쟁(1945.9-1954.7)은 프랑스가 시대의 조류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 목적에 위배되는 식민지 통치권을 주장하여 군사적인 재점령을 시도한 것이다. 이는 호지명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민족해방전쟁이라는 명분을 주었다. 명확한 종전 전략이 없던 연합국과 프랑스가 무분별한 인도차이나 정책을 수행하고 있을 때, 호지명은 이데올로기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혁명가로서의 자신의 이미지를 모든 월남인에게 심어주도록 선전하였고, 대부분의 월남인들이 월맹에 동조하게 만들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프랑스가 민  주주의를 표방하는 바오다이 정부를 수립하여 국제적으로나 월남 국민들에게 떳떳한 전쟁 명분을 갖으려고 했다.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정책이 바뀌면서 소련과 중공은 월맹 정부를 승인하였고 미국과 영국은 바오다이 정부를 승인하였다. 이어서 미국은 프랑스를, 중공과 소련은 월맹을 지원하면서 월남전쟁이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전쟁이 되었다. 제1차 월남전쟁은 초기에 식민 전쟁과 반식민 해방전쟁의 성격이었으나, 1950년 이후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전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제2차 월남전쟁(1954.8-1973.1)은 월맹이 월남의 무력적화통일을 시도한 재래식 전쟁이었다. 월맹은 게릴라전을 지속 전개하면서 정치투쟁을 병행하였다. 월남 정국을 혼란시킨 후에 정규군을 투입하는 정규전과 비정규전의 배합 전술을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적은 17도선 이북의 월맹군 정규군이었다. 미국은 17도선 이북의 전장에서 월맹의 정규군과의 정규전을 통해서만이 승리를 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치적 이유로 월남 내의 베트콩 섬멸 작전인 비정규전만을 수행하였다. 결국 미국은 주적을 대상으로 하는 전쟁은 해보지도 못하고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제3차 월남전쟁(1973.2-1975.4.30)은 외국 세력의 개입이 없는 월남과 월맹 간 총력전이었다. 월남과 월맹 양국이 파리 협정 이후 미국과 소련·중공으로부터 군사 원조를 받아 수행된 대리전쟁의 성격을 뗬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은 추가원조나 개입을 하지 않았다.               



전쟁준비와 국가동원  

        

월맹의 전쟁준비

월남전쟁에서 월맹이 최종적으로 승리를 할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는 보 구엔 지압과 호지명의 전쟁지도에 의한 준비였다. 호지명은 국내적 지지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고, 이를 뒷받침하는 군사력이 있어야 됨을 인식하였다. 그는 1944년 12월 보 구엔 지압에게 월맹군의 모체가 되는 해방군 선전대를 창설하게 했다. 최초 34명으로 시작한 이 선전대를 모체로 계속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일본의 항복 후, 프랑스 군대가 다시 진주할 것으로 판단한 호지명은 전쟁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프랑스와 협상을 하였다. 이 협상이 진행되는 일 년 동안 보 구엔 지압은 군사력을 꾸준히 키워 나갔다. 이 군사조직은 월남전쟁에 적합한 편성으로,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민병대와 지방 군, 군사적 총공세 단계에서 적에게 결정타를 가할 수 있는 정규군의 조직이었다. 실제로 프랑스와 미국을 상대로 한 1,2차 월남전쟁에서 월맹은 혁명전쟁 방식의 게릴라전으로 상대를 지치게 하면서 군사력 확장에 전념하였고 이어진 정규전을 통해 전쟁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다.


미국의 전쟁 준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핵무기의 등장으로, 미국에서는 전쟁은 군인들만이 아닌 전 국민의 생존에 관련된 문제라는 인식이 대두되었다. 따라서 전략 연구와 전쟁 준비도 정치학자나 체계 분석가들에 의해 취급되기 시작하였다. 정치가들은 전쟁의 정치적 목적과 수단에 대한 연구를 하였고, 체계 분석가들은 수단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체계 분석방법을 활용하였다. 이들은 전쟁의 목적과 수단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였고 어떻게 전쟁을 할 것인가는 연구하지 않았다.


월남전 기간 중 미국의 군사전략은 합리적 경제적 측면에서 수립되었다. 미국의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군대에 PPBS(Planning, Prgramming, Budgeting System) 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물자와 장비의 보급 문제를 통제하는 데는 유용하였고 전쟁준비를 위해서는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쟁 수행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었기에 이 제도로 전쟁을 수행할 수는 없었다. 즉 PPBS제도에 의하면, 최소비용에 최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안만을 선택해야 했으므로 융통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결국 미국은 일관성이 없는 전쟁에 일관성을 특징으로 하는 PPBS 제도를 도입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월남의 국가동원

월남은 역사적 정통성 측면에서 프랑스의 식민통치지에서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거쳐 미국의 개입하에 월남정부로 수립되어 민족주의 세력으로부터는 소원해 있었다. 따라서 월남은 월맹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통성이 확보되지 못한 상태였다. 1954년 제네바 협정 이후, 고 딘 디엠 정부가 당면했던 문제는 지지기반의 취약으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 수 없는 당파나 파벌의 난립으로 인한 사회의 분열, 만성화된 부정부패, 심화되는 빈부격차, 오랜 전화에 찌들고 이데올로기에 무관심한 농민, 미약한 군대 등으로 나열할 수 있다.


당시 대다수의 월남 국민은 불교신자였던 반면, 전쟁의 주도적 사회집단은 가톨릭, 부유층, 장교 집단 등의 소수의 외세 지향적 반공 세력이었다. 따라서 지도층은 월남 국민들과 같이 호흡을 할 수 없었고 국민의지를 동원하는 데 결정적인 취약점이었다. 1963년 쿠데타로 고 딘 디엠 정권이 무너지고 4년여의 혼란스러운 정권교체기를 거쳐 1967년 티우 정권이 선거에 의해 집권하였다. 그러나 티우도 만성적 부정부패와 빈부 격차 등의 사회적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회상은 월남 군인들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하는 전의를 상실하게 하였다. 따라서 당시 월남의 국민의지 동원은 고려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월맹의 국가동원

월맹은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반대하던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자 호지명을 중심으로 1945년 베트민(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프랑스 식민통치세력과 7년 이상 투쟁하여 디엔 비엔 푸 결전에서 승리하여 제네바 협정을 체결하였으므로, 월남에 비해 호지명은 정통성 측면에서 국민들의 지지기반이 상대적으로 확고하였다. 그는 타고난 소박한 성품으로 검은색 파자마를 즐겨 입었고 화려한 겉치레는 일절 하지 않았다. 그는 월남의 민족주의자로서 국민들 가운데 겸손히 행동하여 디엔 비엔 푸 전투 이후에는 더욱더 월남인의 존경을 받았다. 이런 호지명에 대한 인간 평가 내용은 그에 대한 월남인들의 지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미국의 국가동원

미국이 월남전에서 국민의지를 동원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은,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미국이 전쟁에 개입했다는 사실에서 추론할 수 있다. 선전포고는 전쟁 초기 단계에 국민의 지지를 확보하고 합법적 승인을 얻어 전쟁에 대한 범국민적 반대를 무마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 월남전에 개입함으로써, 미국 군대가 미국 국민의 군대가 아닌 행정부만의 군대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했고, 국민들은 월남에서 미군의 전투행위에 대한 합법성을 비난하였다.


미국이 선전포고를 통해 국민의지 동원을 위한 합법적 절차를 밟지 않은 이유는 이런 것이다. 첫째,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월남전이 10년 이상 지속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둘째, 미국은 자국 지상군의 대량 투입은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셋째, 미국 국민의 반전 여론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넷째, 미국과 같은 강대국이 월맹과 같은 약소국에 선전포고를 한다는 것은 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섯째, 월맹에 대한 미국의 선전포고는 소련과 중공의 개입을 초래할 수도 있고, 미국 의회가 선전포고를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행정부의 판단이 있었다.               



전쟁 목적과 전쟁계획, 그리고 전쟁의 수행          


전쟁 목적

1952년 프랑스가 노획한 월맹 노동당의 기밀문서에 나타난 월맹의 전쟁 목적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지역을 공산화하여 공산정권을 수립한다는 명확한 목적이었다. 반면, 미국의 전쟁 목적은 전쟁 기간 중 단 한 번도 뚜렷하게 천명된 적이 없었다. 1949년부터 1967년까지의 미국의 월남전 개입 명분을 분석한 Hugh M. Arnold에 의하면, 월맹의 전쟁 목적이 하나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미국은 22개의 각기 다른 명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미국의 전쟁 목적을 크게 세 가지로 다음과 같이 구분하였다. 1949년부터 1962년까지는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1962년부터 1968년까지는 대게릴라전에 역점을 두었다. 1968년 이후에는 미국 정부의 공약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것이었다.


미국의 월남전 개입에 대한 목적이 변질되었음을 증명하는 자료도 있다. 1964년 11월 29일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의결한 국방성 비밀문서에는 반침략의 보호자로서 명성을 지키고 동남아시아에서의 도미노 효과를 저지하며 남부 베트남을 붉은 손에서 지킨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었다. 1965년 3월 24일 맥노튼 국방차관보가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보낸 “남베트남을 위한 행동계획”에는 미국의 굴욕적인 패배를 저지하기 위함(70%), 남부 베트남을 중공의 손에서 지키기 위함(20%), 남부 베트남의 국민에게 보다 나은 자유생활을 보장(10%), 그리고 수락 불가능한 문제가 남지 않도록 하면서 위기에서 빠져나간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미국의 개입 목적이 최초의 목적에서 변질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월맹의 연합전선전술과 전쟁 계획 및 수행

연합전선전술이란 혁명전쟁을 수행함에 있어서 열세한 공산당이 보다 광범위하게 대중을 동원하고 적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사용하는 전술이다. 자기들의 궁극적 목표를 드러내지 않고 시기와 환경에 맞는 융통성과 적응성 있는 강령을 내세워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적과 일시적인 연합을 결성하여 목표를 달성한 후, 내부로부터 침식하여 분열을 조장하고 각개 격파함으로써 승리의 결과를 독점해 버리는 투쟁전술이다. 월맹은 전쟁의 전기간을 통해서 이 연합전선전술을 적절하고 일관성 있게 사용하여 그들의 궁극적 목표였던 월남의 적화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


연합전선전술의 목표는 제1차 월남전쟁까지는 월남인들의 지지를 획득하고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의 공백 기간에 정권을 장악하고 국제적 인정을 받는 것이었다. 제2차 월남전쟁 기간에는 민족해방전선(NFL)을 내세워 그들의 무력적화통일의 야욕을 내란으로 위장하였다. 이는 미국의 본격 개입을 방지함과 동시에 월남 사회를 분열시키고 혼란을 조장하면서 각종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월맹이 연합전선전술을 구사하면서 계획하고 수행한 전략은 모택동의 지구전 전략에 의한 부대 운영이었다. 프랑스와의 제1차 월남전쟁에서 호지명은 그의 정부와 정규군을 이끌고 북부 산악지대로 올라갔다. 그곳을 자기들의 근거지를 잡고 군사력 확장에 전념하면서 민병대와 지방 군을 이용한 게릴라전으로 프랑스군을 괴롭혔다. 군사적 균형 단계에 도달했고 모택동의 중국 본토 석권과 한국전쟁의 발발로 국제적 여건까지 성숙되었다고 판단한 호지명은 1950년 총공세를 감행하였다. 프랑스의 막강한 화력 앞에 대규모 병력손실을 입었지만, 악착같은 최후 발악식 총공격으로 프랑스 군대와 국민의 전의를 마모시켰다. 결국 디엔 비엔 푸전투에서 호지명은 프랑스의 전의를 꺾을 수 있었다.


미국과의 제2차 월남전쟁에서도 월맹은 최초 혁명전쟁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게릴라 전을 통해서 월남을 적화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미군과 연합군의 대규모 투입으로 실패하였다. 월맹에서 월남으로 정규군 투입 시기를 판단하면서 전략적 공세의 호기를 포착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72년 춘계 공세로 월맹에 1개 사단을 남겨놓고 12개 사단으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10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전열이 정비된 1975년 반메투 전투를 통해 사이공을 월맹 4개 군단이 완전히 포위하였다.

     

미국의 제한전쟁

미국은 월맹의 군사적 패배를 원하지 않았고 월맹이 무력으로 월남을 적화 통일하는 것은 성공할 수 없다고 인식하였다. 미국은 이를 중지시키거나 또는 협상으로 해결한다는 정치적 목표를 갖고 있었다. 미국은 중공과 소련의 개입을 야기하고 전면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는 17도선 이북 즉 월맹에 대한 지상공격은 제한하였고, 해상과 공중 작전 위주로 전쟁을 수행하였다. 월남과 접경한 라오스와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 설 경우 중립국가 침범이라는 것 때문에 미국은 국경선을 넘는 지상공격을 제한하였고 그곳은 월맹군의 성역이 되었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적의 저항력을 박탈하는 3개 요소는 적군의 격멸, 적 영토의 점령, 적의 저항의지 분쇄라고 하였다. 이 중 가장 신속하고 확실한 방법은 적군을 격멸하거나 적의 영토를 점령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불가능한 경우에는 소모전으로 적의 영토를 황폐하게 하고 적의 고통을 증가시켜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적을 지치게 함으로써 전쟁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해야 한다. 다른 방법으로는 직접적인 정치적 염증을 일으키는 작전을 수행하여 적의 전투의지를 상실시켜야 한다고 했다.


미국은 정치적인 제한으로 소모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소모전으로 수행할 수 있는 군사작전은 월남에 있는 베트콩의 격멸과 월맹에 대한 북폭이었다. 미국이 월남에서의 지상작전과 북폭으로 월맹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손실을 주어야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월남의 900마일에 달하는 긴 국경선은 병력으로 적의 침투를 차단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베트콩의 격멸은 월맹군의 보충 능력을 초과해야 하는 데, 미국은 국경지대를 월맹군의 성역을 만들어 줘서 이것도 불가능했다. 17도선 이북에 대한 북폭도 미국 중앙 정부의 철저한 통제하에서 월맹의 전략적 목표나 전쟁지도 본부 등의 핵심 표적에 대한 집중 강타가 아니라 보급로나 군사분계선 바로 북방에 위치한 폭격만을 제한적으로 실시할 수 있었다. 미국의 제한적 전쟁 수행은 월맹의 전쟁의지에 영향을 주지 못하였고 병력이나 보급품의 침투를 차단하지도 못하였다. 미 국방성의 전략개념인 전략적 방어를 반영한 웨스트 모어랜드 장군의 전역 계획이 있었지만 현실감이 결여된 계획이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승리를 위한 뚜렷한 전략도 없이 전쟁을 수행한 것이다.



전쟁의 교훈          


월맹의 승리 요인

월맹의 승리 요인은 호지명과 보 구엔 지압의 시기적절하고 지구력 있는 전쟁지도였다. 더 중요한 승리 요인은 월맹군과 월맹 국민들의 불굴의 전쟁의지였다. 그들은 남부에 비해서 기온이 낮고, 산악이 험하고, 문명의 혜택을 덜 받은 반면, 인구는 더 많고 상대적으로 열악한 생활환경과 중국 유교의 영향으로 복종심이 강한 여건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공산체제의 엄격한 통제와 감시하에서 대다수의 월맹 국민과 군인들은 프랑스와 미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적인 반항심에 불을 붙이는 공산 이데올로기에 도취되어 민족해방과 남부 해방을 위한 전의는 그들의 상대를 압도해 나갔다.

     

미국의 패배 요인

월남전에서 미국의 패배는 제한전쟁 논리에 따른 민간지도자들의 정책과 전략의 과오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다. 전장에서 미군이 전술적으로는 승리하였으나 전략적으로는 패배했다. 개별적인 전투력의 운용과 전투행동의 과오 같은 문제도 있었지만, 전쟁 이후의 비판은 주로 군의 기풍 문제나 군 내부 관리상의 제반 문제에 귀착되었다.     


첫째, 경직된 군의 풍토와 출세주의다. 월남전시 군의 상급 지휘관들은 민간 정책 수립자들에 의해서 수립된 정책과 전략이 승리를 불가능하도록 제한하는 것에 대해서, 그들을 설득시키거나 설득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사표를 던져 강력한 항의를 표시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직위와 출세에 연연하여 자리를 지킴으로써 패배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 제기된 문제는 반대의견을 제시하지도 수용하지도 않는 군대의 경직성과 무조건적인 맹종이었다. 지휘관의 명령은 이유 없이 즉각 시행되어야 하는 것이 군의 미덕이라고 할 지라도, 국가정책으로부터 상급자의 명령, 지시에 이르기까지 다른 의견이 있으면 정당하게 의사를 표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의견을 검토 수용하면서 이들을 보호하고 키워줄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군이 발전할 수 있으나, 당시 미군에는 이러한 풍토가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군의 경직된 풍토와 출세주의로 인하여 월남전쟁 기간 동안 잘못된 정책이나 전략에 대하여 항의하고 사임하는 장군이 하나도 없었음은 물론 야전에서 저질러지는 잘못도 그대로 방관하고 지나갔고 병사들은 귀국 후 반전운동에 가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둘째, 방만한 군사조직과 관리다. 월남에서 연합 지휘체제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물론 미군 내에서조차 통합작전체제가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주월 미 군사원조 사령부는 월남 내의 모든 작전과 Laos회랑, DMZ지역 일대에 대한 작전만을 담당하였다. 월맹 지역에 대한 북폭은 명목상으로는 태평양 사령부의 책임이었으나 워싱턴에서 직접 통제하였다. 함포 및 항공모함의 지원은 태평양 사령부, B-52 전략폭격기는 미 전략공군사령부 소속으로 주월 미군사령부 요청에 의해 지원되었다. 월남 내 모든 미군 부대는 주월 미 군사원조 사령관의 작전 지휘 아래 있었으므로 군사작전 이외의 행정 문제는 각군 고유의 권한으로 경쟁적으로 방만한 편성을 하였고, 이에 따라 불필요한 복잡한 행정 요소가 발생하였다. 또 맥나마라 국방장관 취임 후 미군 내에 풍미한 관리 제일주의 풍조는 장교 개인의 경력관리를 최우선시하게 함으로써 필수 경력과 참전 경험의 균등이라는 명목 하에 지휘관의 보직이 6개월로 실시되어 지휘관의 잦은 교대는 많은 문제점을 야기시켰다.     


월남의 패배 요인

전쟁 당시 월남 총참모장이었던 카오 반 비엔 장군은 그의 저서 [월남의 붕괴]에서 월남의 패인을 이렇게 지적하였다. 1969년 이전부터 월남화 정책을 실시하여 월남군을 육성하고 훈련시키지 못한 미국의 정책적 과오, 미국식 전쟁 방식의 답습, 중국과 소련의 월맹 지원, 수세적 방어전략, 신생 독립국가에서 전쟁 수행을 곤란하게 만든 민주주의 취약성, 혈연과 신망도 등에 우선한 정부와 군부의 인사정책, 연합 지휘체제의 미확립, 월맹의 전 분야에 걸쳐 일관된 전쟁지도, 파리협정 후의 전쟁준비 부실 등이 지금까지 누적되어 월남의 패망 요인이 되었다.


월남 패망 당시 주월 한국대사관 경제 담당 공사였던 이대용 장군은 월남이 패망하게 된 근본 원인은 반공 세력의 분열, 전 월남 사회에 팽배하였던 부정부패, 정치·사회·군사 등 전 분야에 침투하여 활동하였던 공산주의 분자들을 막지 못한 방첩 보안의 실패 등 3가지 요인의 누적 결과라고 보았다. 월남의 패배 원인에 대한 여러 가지 분석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근본적으로 전투를 수행했던 월남군의 전투의지 부족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 월맹군에게 승리를 보장한 것이었다.


월남군의 전쟁 의지에 관한 문제를 분석해 보자. 당시 월남의 정치·경제·사회·심리의 제반요인이 월남 장병들에게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하는가 하는 전투 동기를 부여하지 못한 것이 첫째 요인이다. 군 수뇌부의 타락과 전쟁의 월남화 의지 결여로 군부 자체에서 장병의 전투의지를 고양시킬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 요인이다. 월남 사회의 제반 현실과 월남군의 능력에 맞는 적절한 전쟁지도를 하지 못한 월남 전쟁지도의 과오가 세 번째 요인이다.      


         

에필로그

        

월남전은 과거 서방 열국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반발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이러한 피압박민족의 환경적 요인이 공산주의의 혁명전쟁이론과 수행방식을 설득력 있는 현실논리로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 월남전을 평가할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은 베트남의 민족주의 정신이다. 그들은 1,000년에 걸친 중국과의 관계에서 예속된 일이 없었던 강인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다. 호지명 자신이 민족적 추앙을 받도록 유도하고, 미국의 개입에 대한 명분을 약화시키려는 호지명의 전략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이 바로 그들의 민족주의 의식이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하지 않은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은 실패하였다. 미국의 전쟁 개입도 미국식 퇴진의 결과를 가져왔다.


종합해 보면, 베트남 민족성은 정통성이 약한 외세 의존적인 월남보다는 자주적인 월맹의 지지기반을 강화시켰다. 이를 배경으로 전 베트남의 공산화라는 확고한 전쟁 목표를 가지고 연합전선전술과 지구전 전략을 병행하여 조직적으로 전쟁을 지도한 공산주의 세력에게,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고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못한 월남의 배경 하에서 뚜렷한 전쟁의 목표와 전략도 없이 분산된 전쟁지도체제하에 전쟁을 수행한 민주주의 세력이 패배한 것이다. 즉,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던 것이다. 또 베트남의 민족성이, 외세에 의해 지속되는 전쟁수행을 통한 민주주의의 수호보다는, 전쟁의 염증 속에서 탈피하고자 공산정권에 의한 통일로 부자유속의 자유를 추구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현재 우리 대한민국은 자국의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은 자국의 국가이익에 부합될 경우에 한해서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이며, 이와 상충될 경우에는 명분이나 이념보다는 국익을 더 우선시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America First 정책은 이를 더욱 명확하게 말해 준다. 물질의 풍요로움 속에 안보의식은 나날이 해이해지고 있으며,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에서 구조적인 병리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만일, 제2의 한국전쟁이 발발한다면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 반문해 보면 매우 걱정스럽다. 국제사회는 냉엄하다. 맹방은 없고 영원한 국가이익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금언을 상기하면서, 전쟁의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을 통해 자국의 안보는 자국의 역량으로 확보할 수 있도록 국가 제 분야의 통합된 노력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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