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가 그의 친구 베토리에게 보낸 편지
"나는 내 조국을 내 영혼보다 더 사랑한다네." 마키아벨리가 그의 친구 베토리에게 보낸 편지에 쓰여 있는 문장이다.
신성로마제국의 군대와 독일 용병들이 서서히 군대를 이동시키며 로마를 옥죄기 시작했다. 적이 로마냐 지방을 통과하기 전에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하던 마키아벨리의 음성은 교황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교황 클레멘트 7세는 대신 돈으로 적장을 매수하려 들었다. 더 이상 군대를 이동시키지 않는다면 첫 분할금으로 6만 두카토를 먼저 주겠다는 흥정을 시작한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교황의 이 제안을 비웃었다. 틀림없이 적의 장수는 그 돈을 먼저 받은 다음에도 로마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 6만 두카토란 거액을 이탈리아 군사들의 급료로 지불하는 것이 더 현명한 판단이라고 보았다. 적장에게 돈을 주고 또다시 전쟁을 하느니, 차라리 군인들에게 그 돈을 지불하여 그들의 사기를 올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주군은 그런 지혜나 배짱을 가지지 못한 나약한 군주였다. 마키아벨리는 친구 베토리에게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격정적으로 토로했다.
나는 내 조국을 내 영혼보다 더 사랑한다네.
내 육십 평생 경험을 두고 자네에게 감히 말하지만,
지금보다 더 어려운 상황은 일찍이 없었다네.
평화는 필요하지만 전쟁은 불가피하고,
게다가 우리의 주군은 평화나 전쟁 어느 쪽을 위해서든
필요한 일을 하기가 여간 힘든 분이 아니던가?
국제정치의 비극성은 국익을 위하여 비도덕적 수단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생긴다. 그 비극은 국가안보라는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그 목적만큼 도덕적으로 타당하고 정당한 가치를 때론 방기 하지 않을 수 없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국제정치적 선택에는 이런 비극적 측면과 딜레마가 항시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도덕성과 국익 추구의 긴장관계에서 생겨나는 딜레마와 국제정치의 비극적 측면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마키아벨리는 "나는 내 조국을 내 영혼보다 더 사랑한다(I love my country more than my soul)"고 말했던 것이다. 즉, 자신은 도덕주의자가 되고 싶지만, 국가를 위해서는 도덕주의를 선택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처럼 도덕성을 무시하고 안전을 택하는 것이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국제정치는 가장 좋은 것을 항상 정책으로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싫어하는 것들 중에서 덜 나쁜 것을 정책으로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딜레마는 그리스의 고전 [오디세이아]에서 잘 나타난다. 동료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고 자신은 돛대에 묶인 채 노래하는 세이렌들의 유혹을 겨우 뿌리치고 살아남은 오디세우스는 양쪽에 스퀼라와 카륍디스가 있는 계곡과 마주치게 된다. 스퀼라는 여섯 개 긴 목을 가진 괴물로서 사람을 갑자기 물어간다. 카륍디스는 하루에 세 번씩 물을 빨아들이는 무서운 소용돌이다. 국제정치의 현실에서 처럼 오디세우스는 둘 다 선택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선택은 불가피한 것이다. 결국 오디세우스는 스퀼라 쪽을 선택해서 6명의 부하를 희생시킨다. 오디세우스가 카륍디스 쪽을 선택했다면 그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국제정치에서 지도자가 직면하게 되는 정책 선택의 딜레마와 그에 따르는 비극적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국제정치의 비극적 측면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예는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나오는 '밀로스의 대화편(Melian Dialogue)'이다. 아테네는 조그만 도시국가 밀로스를 포위하고 항복을 종용했다. 아테네의 대표자는 힘이 정의의 기준이므로 약자는 강자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밀로스 인들이 아테네의 도덕성과 명예에 호소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밀로스의 지도자들이 항복을 거부하고 모두 자살하자 아테네 인들은 밀로스의 장정들을 모두 죽이고 부녀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삼고 말았다. 아테네는 학살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을까? 밀로스의 지도자들은 영웅적 자살을 선택하지 말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타협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투키디데스는 이 비극적 대화편을 통해 국제정치에서 과연 '도덕적 여유'는 없는 것인가에 관한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국제정치는 국익 추구를 위한 비도덕적 수단이 언제든지 동원될 수 있는 영역이다. 200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버락 오바마는 대통령 후보로서 그가 제시한 비핵화를 통한 국제평화에 대한 비전과 그 이전의 활동이 노벨상의 수상 사유였다고 한다. 대통령 당선 이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된 그는 수상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간디와 킹 목사의 비폭력 노선과 그들의 삶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책임을 진 대통령으로서 그들의 노선을 따를 수는 없다. 이 세상에 악은 존재한다. 비폭력 운동이 히틀러의 군대를 저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바마는 전후 세계의 안정을 가져다준 것은 조약과 선언문 같은 국제제도들이 아니라 미국의 군사력과 미국 국민이 흘린 피였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는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국가와 개인의 도덕성 기준이 같을 수는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언급한 것이다.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한 개인으로서의 희생은 도덕적으로 칭찬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은행이 예탁자들의 돈을 자선사업에 마음대로 써버리고 파산한다면 칭찬보단 오히려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국가와 국가의 통치 책임을 국민으로부터 위탁받은 지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도덕성 측면에서 개인과 국가는 다른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살인은 죄악'이라는 도덕적 신념을 가진 친구와 함께 숙소를 사용하고 싶어 할 것이다. 만일 '살인도 때로는 미덕'이라는 가치관을 가진 친구가 있다면 그와 함께 숙소를 공유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두 친구 중 한 사람과 숙소를 함께 사용해야만 한다면 어떤 친구를 선택하겠는가? 모든 사람이 전자를 택할 것이다. 살인이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친구에게 어느 날 갑자기 봉변을 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지도자를 선택할 경우는 다를 수 있다. 특정 후보가 자신의 도덕적 종교적 신념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죽이는 외교정책은 절대로 선택하지 않겠다는 공약을 한다면 당신은 그를 선택하겠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정치지도자가 자신의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국민을 희생시키거나 국가안보에 저해가 되는 선택을 한다면 그는 지도자로서의 자격과 자질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가 말했듯이 자기의 영혼이 더럽혀지더라도 국가를 위해 비도덕적 수단을 선택하고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국가 지도자가 선택받아 마땅한 사람일 것이다.
총선이 내일로 다가왔다.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이들은 대부분 정치적 야망과 포부를 갖고 있다. 한번 국회의원에 선출되고 경력과 연륜이 쌓이면 재선 의원이 되고 또 3선 의원이 된다. 그리고 국회 각 분과 위원장으로서 정부 시책을 견제하고 입법을 추진한다. 더 나아가 원대 대표와 당 대표로 선출되고, 최종적으론 대선 후보로 진출하게 된다. 그리고 국민의 선택을 받을 경우엔 국가의 최고 정치지도자인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 김상근 [마키아벨리: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현자], 김영호 [대한민국과 국제정치]에서 발췌 인용하여 정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