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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nny Apr 17. 2020

6.25 전쟁 70주년과 한미동맹의 재조명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미국의 역할을 중국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I. 프롤로그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전혀 알지 못했던 나라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국민을 지키라는 부름에 응했던 우리나라의 아들과 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의미의 이 문구는 미국 워싱턴의 한국전 참전 기념비에 새겨져 있다. 6·25 전쟁 기간 중 미국의 아들과 딸들은 그들이 전혀 들어보지도 못했던-일본의 식민 통치에서 갓 해방된 태평양 건너편의 조그만 약소국인-대한민국과 그 국민을 지키라는 국가의 부름에 따랐고 36,574명이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바쳤다. 6·25 전쟁 3년간 발생한 미군 전사자의 숫자는, 베트남 전쟁 12년간 발생한 전사자 58,193명과 비교해 보면, 6·25 전쟁의 참상을 대변할 만큼 많은 미군 희생자의 숫자다.


  이러한 희생을 토대로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체결되었고, 동년 10월 한반도에서의 전쟁 재발 방지를 목적으로 하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면서 한·미 군사동맹 관계가 시작되었다. 한·미 동맹은 전후 7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의 생존을 보장해 왔고, 한반도에서 긴장 속의 평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대한민국이 급속도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출범한 여러 신생국가 중에서 대한민국이 시장경제 발전과 정치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해 낸 유일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6·25 전쟁 70주년을 맞아 한·미 동맹 관계의 어제와 오늘을 되돌아보면, 대북 관계 개선에 비중을 둔 대한민국 정부의 시책에 따라, 동맹 관계에 부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대북 정책은 주한 미군 철수와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등을 비롯한 한·미 동맹 관계의 재조정 논의의 근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최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방위비 분담금 증액 요구, 한국 내에서의 주한미군 철수와 중국 핵우산 대체 논의 등은 한·미 동맹의 근간을 흔드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동맹이 내일의 적이 될 수 있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맹이 될 수 있다는 국제정치학의 명제처럼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미국의 역할을 중국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6·25 전쟁 이전부터 현재까지의 한·미 관계와 미·중 패권 경쟁의 지정학적 의미를 고찰해 보면 NO라고 답할 수 있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6·25 전쟁 이전 한반도에서 미국의 역할, 6·25 전쟁과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 한·미 동맹의 가치와 동북아에서 미·중 패권 경쟁의 지정학적 의미 등을 간략하게 논의해 보겠다.     


II. 6·25 전쟁 이전 한반도에서 미국의 역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5년 9월 8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미국은 在朝鮮美陸軍司令部軍政廳(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을 설립하여 패전국 일본이 물러난 한반도의 38도선 이남 지역을 통치했다. 미국이 1920~1930년대에 국제사회에서의 책임을 회피한 결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고 믿었던 트루먼과 미국 관료들은 한반도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계무대의 정치·경제적 안정을 도모할 리더 역할을 충실히 하려고 했다. 1946년 6월 초 작성된 미 국무부 보고서에는 이 개념을 한반도에 적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를 소련이 지배하게 되면 중국의 만주 지역 장악력이 작아져서 중국의 대소련 견제 역할을 기대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1947년 3월 트루먼 대통령은 상하원 합동의회에서 세계가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으며 미국의 안보도 이와 연관되어 있다고 선언하였다. 당시 공산화된 유고슬라비아·불가리아·알바니아의 지원을 받는 공산당이 이끄는 폭도들이 그리스 정부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리고 터키는 그리스처럼 내전은 없었으나 국가 유지 차원의 근대화를 달성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터키와 그리스를 지원하던 영국의 경제 불황으로 더 이상의 원조가 어려워졌으므로 미국이 그리스와 터키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면 전체주의 정권이 두 나라를 장악하게 될 상황이었다. 그러면 중동 지역에 혼란과 무질서가 초래되고, 이로 인해 전후 피해를 복구하면서 자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유럽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었다. 미국은 무장한 소수민족이나 외부의 압력에 의해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자유 국민을 지지해야 한다고 트루먼은 역설하였다. 이러한 트루먼의 연설은 그리스와 터키 이외의 국가에 대한 미국의 대외 정책에 문제를 제기했고 한반도 문제가 그중 하나였다. 트루먼의 의회 연설 이후 뉴욕 타임스지에는, 미국과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해 워싱턴·아테네·이스탄불로부터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한반도의 미래가 그리스·터키·유럽 남동부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설이 실렸다. 미·소간의 의견 불일치로 한반도는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으며, 한반도 분단 지속에 대한 책임은 소련에 있지만, 미국도 혼란과 지연과 무관심의 과정을 통해 그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고 비난했다. 한반도는 민주주의의 잃어버린 전선이므로 미국이 관심을 더 많이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1947년 중반 이후 미국은 유럽과 한반도 문제에서 다자적 접근방식을 추구했다. 유럽 문제는 마샬플랜과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통해 접근하고, 한반도 문제는 유엔에 의존하였다. 위기가 고조되자 미국 지도자들은 반사적으로 다자간 국제기구에서 해법을 찾으려고 하였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해 유엔의 감시하에 선거해 한반도에 독립국을 만들자고 제안하였다. 1947년 이 제안은 소련을 제외한 압도적 찬성으로 유엔총회를 통과하였다. 소련이 북한에서의 선거를 거부했으므로, 미국은 남한에 국한하여 선거하는 것으로 유엔 승인을 얻었다. 그리고 1948년 5월 유엔 감시하에 남한 지역에서의 선거가 시행되었다. 그 결과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였다.     


III. 6·25 전쟁과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같은 해 6월 30일에 개입을 결정했다. 미국이 신속하게 개입을 결정한 이유는 북한의 남침과 소련의 세계 적화 시도가 연관되었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한반도가 남한까지 공산화되면 일본의 국내 안정이 흔들리고 일본이 좌경화되어 미·일 군사안보체제에 위협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 결과 1950년 7월 5일 미 8군 제24사단 예하 부대가 평택에서 북한 전차부대와 최초 접전하게 됨으로써 미군이 6·25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이후 미국은 정전협정이 이루어지는 1953년 7월까지 지상군 3만 2천여 명, 공군 66개 비행 대대, 해군 함정 260여 척을 한반도에 전개하였다.


  미국은 6·25 전쟁을 태평양 지역의 안정과 미국 안보에 대한 직접적 위협으로 인식하였다. 미국은 대한민국에 대한 공산주의 세력의 침략을, 양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치체제의 안정적 기구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국제연합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트루먼은 한반도에서의 전쟁과 대만의 안보를 연계시키고 이를 태평양 지역의 안정에 대한 위협으로 확대해서 해석했다. 트루먼은 북한의 남침은-세계평화체제의 구축이라는-미국의 원대한 계획에 대한 파괴행위로 인식했다.


  북한군의 기습 공격이 개시된 이후, 미국은 6월 30일 백악관 회의에서 미국의 한반도 문제 개입을 결정하였다. 미국의 개입은 북한의 남침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초래했던 일본·이탈리아·독일의 침공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 국내외 상황은 미국의 개입에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북한이 38선을 넘어 전면 공격을 감행한 것은 분명한 침공이었으므로-1945년 8월 미·소간 체결된 모스크바 협정과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한 유엔 결의안을 침해한-명백한 무력도발이었다. 동맹국들은 미국의 강력한 대응을 지지했고, 미국의 국내 여론도 마찬가지였다. 미 합참은 중국 공산당이 타이완을 공격할 경우 이를 저지하기 위한 미 7함대의 출동을 이미 승인했고, 미군의 한반도 파병에 반대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서방세계의 힘과 의지의 상징으로써 미국의 결정적 조치를 정당하게 만들었다.


  1950년 6월 24일 토요일 자정(현지 시각)에 북한의 침공 소식을 들은 미국은 유엔 안보리 회의 소집을 요청하였다. 유엔 안보리 비상 회의는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오후 뉴욕에서 열렸고 소련을 제외한 모든 이사국이 참석했다. 소련은 유엔이 중국 대표로 공산당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항의하며 보이콧 중이었다. 유엔 한국위원회는 서울에서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문을 보냈다. 유엔 안보리 비상 회의에서는 미국이 보고한 북한의 침공 사실을 확인하고 전면전 성격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국제 평화와 안보 유지를 위협할지도 모르는 심각한 상황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안보리 미국 대표는 이 전문 내용을 지적하면서 한국에 평화가 깨졌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결의안을 상정했다. 북한에 적대적 행위를 중지하고 군대를 38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또 유엔 회원국에 이 결의안의 채택을 지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회의를 소집한 지 3시간도 지나지 않았고, 한국에서 전투가 시작된 지 하루 만에 유엔 안보리는 미국이 제안한 결의안을 거의 원안대로 승인했다. 이틀 후 북한군이 서울까지 진격하자 안보리가 다시 열렸고 소련은 불참하였다. 미국은 안보리가 유엔 회원국이 대한민국에 군사공격을 물리치고 그 지역에 국제 평화와 안보를 되살리는 데 필요한 모든 지원을 제공하도록 권고할 것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상정했다. 1950년 6월 27일 안보리는 승인에 필요한 최저선인 7개국의 찬성을 얻어 이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즉각적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으나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2년여간의 휴전회담을 거쳐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따라서 남북한은 전쟁 이전의 상태로 복원되었고, 분단의 고착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한반도의 분단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을 비롯한 공산주의 세력과 일본의 팽창주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민주주의 진영의 리더인 초강대국-미국과 군사동맹을 체결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953년 10월 1일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벼랑 끝 전술까지 동원하면서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어서 1954년 11월 17일 군사·경제 원조에 관한 한·미 합의 의사록에 양국이 조인하였고,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비준서를 교환함으로써 조약의 법적 효력이 발생하게 되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으로 성립된 한·미 동맹은 전쟁이 끝난 후 70여 년간 한반도에 긴장 속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고,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에도 상당한 기반을 제공하였다.     


IV. 한·미 동맹의 가치와 미·중 패권 경쟁의 지정학적 의미

  한·미 군사동맹은 6·25 전쟁의 폐허 위에서 경제 발전과 정치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동맹의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한·미 동맹이 성공한 모델로 칭송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동맹 정신을 토대로 양국 인사들이 지속적인 교류와 파트너십을 발휘해 왔기 때문이다. 역대 정부의 안보정책 변천 과정에서 한·미 동맹이 한국의 경제·사회·문화에 미친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때론 반미 감정 같은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한·미 동맹에는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한 혈맹이라는 동맹 정신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군사적 유대 관계뿐 아니라 양국이 추구하는 가치와 국민의 이해와 정서를 결속시키는 한·미 동맹은 안보 동맹을 주춧돌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두 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구조다. 특히 70년 전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이 감행한 무력 남침으로부터 양국이 함께 공산주의 확산을 차단하여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였고, 한·미 군사동맹으로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여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완성한 것이다. 민주화를 향한 국민적 열망이 강해지면서 민주주의적 가치에 대한 양국의 공감대가 커졌고, 이로 인해 한·미 관계가 더 건강하고 내실 있는 관계로 발전될 수 있었다. 그리고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한국의 경제 성장이 전쟁을 억제함으로써 안정과 평화가 이루어진 배경에서 가능했다는 면에서 한·미 동맹의 역할과 기여는 결정적이었다. 한·미 동맹은 전쟁 억제를 통해서 한국의 평화와 안정에 크게 이바지하며 정치·경제·안보적 차원에서 양국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한국 안보의 버팀목이 된 한·미 동맹의 가치를 평가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정치적 측면에서 한·미 동맹의 전략적 가치는 자유 민주주의·시장경제·인권·법의 지배 등 보편적 가치를 한국과 미국이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주한 미군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전략적 가치는 안보 비용 절감과 대북 억제력 제공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국가 위험도를 줄여 국가 신뢰도를 제공해 온 것이다. 군사적 측면에서도 한·미 연합방위체제를 통해서 전쟁 억제는 물론, 억제 실패 시 전쟁에 승리하여 자유 민주주의 통일을 완성한다는 전략 목표를 양국이 함께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한·미 동맹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70여 년이라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양국 정부의 대외 정책에 따라 양국 간의 동맹 관계에 부침이 있었다. 최근 미국은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요구하면서 주한 미군 축소 논의를 하고, 한국에서는 주한 미군이 철수한 상황에서의 중국의 미국 핵우산 대체설까지 나돌고 있다. 양국의 정치지도자들이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협상을 하기 위해 이런 논의를 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것이 공론화되어 굳건한 한·미 동맹을 흔들게 된다면 큰 문제다. 과연 대한민국 안보를 위해 중국이 미국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까? 우리의 혈맹이며 민주주의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세계적 패권국 미국은 역사적으로 유럽 또는 동북아 지역의 영토를 점령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대서양 또는 태평양을 건너서 그 지역의 강대국에 대하여 미국이 군사력을 투사하는 일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1900~1945년경 동북아 지역은 외부 침입에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 미국이 의도했다면 이 지역에서 상당히 넓은 영토를 정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태평양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극복해야 하는 지정학적 이유로 당시 동북아의 주 강대국인 일본과 러시아를 미국이 점령하는 것은 가능치 못했을 것이다. 물론 20세기 동안 유럽과 동북아 지역에 미국이 군대를 파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는 영토 점령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역 패권 유지 차원에서 군사적으로 개입한 것이었다. 현재 동북아 지역에서 미국의 의도는 한국·일본 등과의 군사동맹을 이용하여 중국이 역내 패권국으로 부상하는 것을 견제하여 미국 국익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북한의 혈맹이며 지역 패권을 추구하는 공산주의 국가 중국은 아시아 지역에서 여러 주변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그리고 지정학적으로 주변국을 공격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국가이다. 또한, 중국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국이 주변국에 대해 공격적으로 행동했으며, 국력이 부상하면 주변국에 대해서 더욱 공격적인 태도를 취해왔음을 증명하는 풍부한 역사적 사례가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미국의 역할을 중국이 대체할 수 없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더욱이 북한을 제외한 중국 주변국의 가장 큰 두려움은, 미국이 그들을 공격해서 없애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오늘의 중국은 미국 해군을 대순다군도-일본-필리핀-대만을 연하는 제1도련선 밖으로 추방할 수 있는 중국 해군력 달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의도가 실현된 상태에서 한국전쟁이 재발한다면 미국 해군은 한국을 지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심지어 중국은 괌을 지나 몰루카제도까지 이어지는 제2도련선 밖으로 미국을 몰아낼 계획까지 논의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이 이를 달성하면 일본과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해양 지원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중국은 동북아 지역에서 패권국이 되기 위한 역량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미국이 군정기를 거치면서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 정부 수립에 영향을 미쳤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6·25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한반도에서의 전쟁 방지를 위해 한·미 군사동맹을 체결하였고, 그 결과 대한민국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정착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미국의 행태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가치를 미국과 공유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존립이 미국의 국익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미국의 역할을 중국으로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성경에 나오는 예화 중에서 이런 내용이 있다.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가시나무가 나무들의 왕이 되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자신의 소임에 충실하겠다며 모두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만일 너희가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않으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동북아 지역 안정자(stabilizer)로서의 미국의 역할을 중국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사고는 불과 가시로 통치하려는 사악한 의도를 가진 가시나무를 왕으로 삼겠다는 발상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반도뿐 아니라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굳건한 한·미 동맹의 토대 위에서, 한국과 미국이 상호 국가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가치관과 비전을 공유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미 동맹 70주년에는 한·미 양국 정부와 국민이 서로 축하하며 감사하는 성숙한 모습을 상상하며 글을 맺는다.


이 글은 해병대전략연구소에서 발간하는 [RIMS Journal] 제17호(2020.1.31.)에 6.25 전쟁 70주년 특집으로 게재되었습니다. www.rims.kr에서 검색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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