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영화는 <자전거 탄 소년>입니다. 다르덴 형제의 작품으로 작품성은 뛰어났지만 영화가 어렵고 영화적 재미는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스토리 흐름과 상관없이 임의적으로 아이의 성장 과정으로 나눠봤습니다. 스포가 있으며 영화를 보신 분들이 글을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첫 장면부터 궁금하게 만듭니다. 아이는 전화기를 붙들고 아빠에게 수십 번 전화를 합니다. 아빠에게 버림받았을 리가 없다고 믿으며 그렇게 전화를 하고 또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아빠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아빠에게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는 최후통첩을 받고서야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깨닫습니다. 그리고 시릴은 충격에 빠져 자해하며 분노를 표출합니다.
아이에게 부모님은 하늘과 같은 존재이고 어려운 존재이며 없어서 안 되는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시릴은 그런 존재에게 버림받습니다. 이 단계를 부모님과 떨어지는 과정이자 초기 부정 단계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는 부모를 항상 자신을 케어해주는 존재로 인식하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을 어린이집에 보내는 행위를 자신이 버림받는다고 생각하며 떼를 씁니다. 초기 부정 단계에서 이러는 이유는 아직 자아가 없는 아이들이 부모와 자신을 동일시 여기기 때문에 이런 행위들이 나타납니다. 시릴도 아버지에 집착하고 자해하며 초기 부정 단계에 진입합니다. 영화에서는 이 과정을 현실보다 더 냉혹하게 보여주며 관객이 시릴에게 연민의 마음을 가지게 만듭니다.
아빠를 찾게 도와준 이는 우연히 만난 사만다라는 여성입니다. 이 여성은 시릴이 가지고 있던 자전거를 다시 찾아주고 보육원에서 일주일에 한 번 외출할 수 있게 만들어준 장본인입니다. 굳이 역할을 부여하면 엄마 같은 존재입니다. 시릴은 사만다에 의지하고 관심을 끌기 위해 다양한 행동들을 합니다. 둘의 관계는 오묘합니다. 모자지간 같기도 하다가 애인 같기도 합니다. 시릴이 관심이 필요한 순간에는 모자지간 같습니다. 시릴은 자전거 타는 자신의 모습을 보라고 강요하거나 하지 말라는 행위를 하며 관심을 끕니다. 이런 행위 속에서 사만다는 시릴을 아들처럼 상대해줍니다. 또 한, 시릴이 무슨 일을 당해도 그를 걱정하고 받아주는 모습은 엄마의 모습이었습니다. 시릴도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엄마에게 느끼는 감정을 느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애인과 같은 모습도 보여줍니다. 시릴이 범행을 저지르고 돌아와 '아줌마를 항상 살고 싶어요.'라는 장면에서 오묘한 감정이 흐릅니다. 단순한 모자지간에서 느낄 수 없는 감정 말이죠. 이건 글로 설명이 안됩니다.
저는 사만다가 남자 친구와 자고 있는 방에 들어간 장면에 집중했습니다. 이 장면 역시 오묘합니다. 시릴의 행동은 밤에 엄마가 필요한 아이 같았지만 눈빛은 옆에 남자 친구를 증오하는 눈빛이었습니다. 시릴의 복합적인 감정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이 장면에서 시릴은 사만다를 엄마와 애인 중 어느 선상에서 생각해야 하는지 고민합니다. 인간 발달 과정 중 '남근기'에 해당하며 아이가 자신의 성적 능력을 의식하고 은연중에 어머니를 독차지하고 싶어 하는 과정입니다. 아버지를 제거하고 어머니와 천국을 만들고 싶어 하지만 곧 이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란 걸 알게 되죠. 이 과정에서 아이가 아버지의 존재와 어머니와의 관계를 인정해야 사회적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사만다가 남자 친구가 아닌 시릴을 선택하며 아빠와 엄마의 관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닌 둘만의 천국이 형성돼버립니다.
이 과정은 시릴이 이미 4~6세에 겪었어야 하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시릴의 유년기에 이런 과정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단순히 사만다와 남자 친구로 인해 이런 과정이 겪으며 사회성을 배울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사회성의 결여는 무서운 결과로 나타납니다. 사만다의 잘못된 선택으로 시릴은 우연히 만나게 된 동네 문제아 웨스에게 잘못된 감정 전이가 일어납니다. 시릴에게 그의 행동이 반사회적 행동인지는 상관없습니다. 그저 웨스를 위해 무조건적으로 그의 지시를 수용합니다. 사만다와의 잘못된 관계 형성은 웨스에게 의존하는 형태를 만들어냈으며 훔친 돈을 아버지에게 가져가 다시 키워달라는 등 반사회적 행동을 일삼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매몰차게 거절하고 시릴에게 의존할 대상은 사만다 말고는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심리학에서 이런 의존의 시작을 유아기에서 찾습니다. 어린 시절 결핍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엄마와 교감이 충분하지 못해 사랑 욕구를 채우지 못한 아이는 자라면서 뭔가 허전한 마음에 다른 대상에 대해 취약성을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시릴의 경우 취약성이 웨스와의 관계를 통해 나타납니다. 이 둘의 관계는 유아기에 결핍이 일어난 아이들이 후에 게임 중독 같은 잘못된 감정 전이로 나타나는 현상을 의미한다고 보면 됩니다.
시릴에게 사만다가 있었지만 부모님의 부재에서 오는 결핍은 사만다로도 채우지 못하는 결핍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잘못된 감정 전이와 아빠로부터 배워야 할 남성성, 사회성 형성 시기까지 놓치게 되며 사회성 결여 문제는 더욱 커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릴의 범죄 행위가 발각되며 법적 제재가 가해집니다. 직접 피해자와 대면해 사과하고 보호자인 사만다가 벌금을 내야 하는 상황에 이르자 그제야 시릴도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반사회적 행동이 자신과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시릴의 사회성이 발달합니다. 부모와 아이의 관계에서 발달해야 하는 사회성을 시릴은 법적인 제재를 통해 깨닫습니다.
시릴의 또 다른 깨달음은 인간적 응징으로 인한 깨달음입니다. 피해자 아들에게 쫓기던 시릴은 나무 위로 피신하고 돌에 맞고 나무에서 떨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시릴은 확실히 깨닫습니다. 사만다처럼 모든 걸 다 받아주지는 사람은 없으며 인간관계 속 반사회적 행위에 대가가 어떠한 결말인지 몸소 체험합니다.
자전거는 자아확립의 중요한 열쇠입니다. 시릴은 초반에 아빠가 자전거를 팔았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자전거에 엄청난 집착을 합니다. 시릴 본인과 자전거 모두 아빠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자전거에 자신을 투영시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자전거를 훔쳐 가는 아이를 끝까지 좇아가 응징하고 지켜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왜 자전거를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자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후반부에 사회성이 성립이 되는 과정에서 시릴은 자전거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쓰러져있는 자전거를 똑바로 세우고 타고 화면 밖으로 사라지며 자아를 찾게 됩니다.
시릴의 성장 과정은 다른 아이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아빠에게 받은 상처, 사회성 결여 등 다양한 문제들에 직면하지만 사만다를 만나며 그나마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물론 사만다가 부모의 존재감을 100% 대체할 수는 없었지만 무조건적으로 엄마이자 애인의 역할로 시릴에게 다가갔다는 점에서 캐릭터의 매력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른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캐릭터이자 사만다가 시릴을 위해 행동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엄마와 아들이나 애인끼리의 무조건적 사랑이라는 이유로만 해석이 가능합니다. 영화를 보면 사만다는 시릴에게 가위에 찔리면서도 시릴을 다시 받아줍니다. 화가 나서 때릴 만도 한 장면들이 많았지만 사만다는 참고 또 참습니다. 마치 엄마가 아이를 훈육하는 과정 속에서 참는 것처럼 시릴을 인격체로 대해줍니다. 그렇게 서로 인격체로 대등하게 바라보며 관계가 형성이 됩니다.
저는 영화를 "특수한 성장 과정에 놓인 아이에게 엄마란 무슨 의미일까?"라는 논점으로 영화를 봤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만다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지만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사만다 역시 시릴의 주변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영화를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영화라 머리를 쓰며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