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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Feb 12. 2022

우울함에는 무게가 있다

딸아이를 출산할 때 약 여섯 시간 정도를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고통의 진국을 맛봤다. 열두어 시간을 진통했다는 사람도 많이 있겠지만 여섯 시간도 보통의 시간은 아니다. 결국은 수술을 해서 출산하긴 했지만 진통의 기억은 여전히 남아있다. 어처구니없게 생긴 출산 침대 혹은 의자에 누워서 시대극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기다란 무명천을 쥐고 아이를 낳으려 애쓰는 산모들처럼 수건 하나를 꼭 쥐고 있었다. 그저 뭔가 쥘 만한 것이 필요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의 그 지푸라기와도 같은, 버틸만한 무엇 말이다.

​​


뜬금없는 진통 에피소드라니, 어인 일인가 싶겠지만 '쥐고 버티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살다 보면 원치 않아도 '우울함'이라는 지푸라기를 잡고 버텨야 하는 시기가 찾아온다. 원치 않던 방문객이, 막 문을 닫으려는 찰나 좁은 틈으로 쓰윽 침범해버리는 그런 상황. 대개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위기의 끝에 이르러 달리 잡을 것이 없어 우울함의 옷자락을 쥐고 버텨내게 된다. 생명을 낳기 위해 진통을 하며 어느 산모가 수건을 쥐고 버텨야 했듯이 말이다.

​​


우울함은 질병 자체가 아니라 질병을 이겨내고 싶어 하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막다른 골목에 선 사람은 우울함이 마치 구원의 통로라도 되는 양 온몸과 마음에 우울감이라는 글자를 새겨놓고는 상처를 끝없이 핥는 야생동물처럼 버티고 버틴다. 그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잠깐 몇 마디 말을 나눠봐도 알고, 몇 문장의 글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 실은 표정만으로도 안다. 왜 그리 자신하는가 하면 과거의 내 모습이 어김없이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


자기의 상처를 지긋이 바라보며 상처에 말을 걸고 누군가가 그 상처를 들여다봐주고 공감해주기 원하는 시기를 나 역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겪었다. 벗어나는 방법을 몰랐던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그 상태가 주는 마이너스적 안온함에 빠져들어 있었다는 것 또한 주요한  이유였다(고 지금은 생각된다). 마이너스적 안온함이라는 것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악한 영도 미래를 예언하고 병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는 것과도 같이... 그 끝이 파멸이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다행히 그 강을 건너왔고 이제 다시는 그곳으로, 빨강머리 앤의 언어로 말하자면 '절망의 구렁텅이'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곳은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운 장소에 놓여있기 때문에. (이 '장소'에 대해서라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도입 부분에 잘 묘사되어 있다.)


더 이상 그 어두운 장소로 가고 싶지 않다, 는 말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우울의 강을 건너고 있는 사람과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그들을 미워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다. 어둠이라는 얼룩은 아주 더러운 냄새처럼 잠시 동안만 노출된다고 해도 분명 전염된다. 우울은 확장하려는 의지가 있고 그래서 숙주를 필요로 한다. 어둡고 축축한 곳에 곰팡이가 피는 것과도 같이, 바이러스가 순식간에 퍼지는 것과도 같이. ​


Illustrated by 해처럼



우울함을 피하고 싶다는 마음은 생존본능 같은 것이다. 바이러스를 피하고 싶은 마음과 같다. 그것에 이미 전염되어 버린 사람에 대해서라면 마음이 아프지만 그렇다 해서 건강한 이에게 전염을 허용할 수는 없으므로. 이것을 단순 소박한 소망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밝고 따스하며 명랑하고 단순한 곳으로 끊임없이 나아가고 싶다. 그 발걸음을 멈추고 싶지 않다. 소돔과 고모라의 롯의 아내처럼 걸음을 멈추고 소금기둥이 되고 싶지는 않다.​


우울함에는 무게가 있다. 길게 늘어져 붙어있는 오후의 그림자처럼 존재를 붙들고 깊이깊이 아래로 끌어당기는 중력이 있다. 참을 수 없는 우울의 무거움에 허덕이다 누군가는 헤어 나오지 못해 어둠으로 빨려 들어가기도 한다. ​


그 어두운 통로를 더듬거리며 걷던 시절의 나를 견뎌내 준 이들은 끝끝내 나를 사랑한 사람들임을 안다. 고마워하고 있다. 무척.. 단 한 명의 존재라도 나를 사랑하고 기다리는 존재가 있다면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울의 강을 건너고 있는 이들에게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내라는 그 말을 건네고 싶었다.

​​


우리의 영혼을 위로하는 책을 읽기에, 음악을 듣기에, 그림을 보기에 지금의 문명은 더할 나위 없는 시절 인지도 모른다. 잠시 자신의 상처에서 눈을 들어 조금 먼 곳을 바라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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