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올백을 디올백이라 부르지 못하고 '작은 파우치'라고 고집하는 어느 언론인을 보고 있자니 세상 답답하다가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마저 떠오르니 기자 출신이라는 그가 한편으론 처량 맞기도 하다. 정치적 진영과 이념의 모호한 경계를 떠나서, 스스로 당당하지 못한 모습에 시대의 절망을 느낀다. 자신도 부끄러워하는 걸 과연 신념이라 말할 수 있을까.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명령하면, 코끼리만 생각하게 되는 사람심리를 정치권에서는 프레임이라 부르고 곧 잘 이용한다니, 파우치도 홍길동도 코끼리도 존재의 모양도 인용의 시대적 배경도 제각각 다르지만 이래저래 우리의 일상은 프레임이라는 틀에서 자유롭지 못한 듯싶다. 지금의 '소비사회'나 예전의 '노동사회'나 결국, 정치와 경제를 틀어 쥔 어느 권력자들이 만들어 놓은 큰 틀의 프레임 아니던가.
이렇게 씁쓸한 마음은 개인의 일상에도 다반사다. 얼마 전 여행길에서, 이젠 사랑 따윈 잊어버리자, 그럴 수 있다며 호언 장담하던 나는 며칠도 안 지나 낙엽하트를 만들고 있고, 누군가 만든 하트낙엽 앞에서 어린애처럼 그저 좋아라 하며 찰칵찰칵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사랑도 하트도 신이만드신 프레임이려나. 나도 사랑이라는 깊은 프레임에 빠져 평생을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사는 게 너무 메마르고 각박하지 않은가. 그래도 사랑인데... 믿음과 소망보다 그중에 제일은 사랑인데... 자기 합리화와 자기 객관화, 삶의 모순이 충돌하는 교차로에서 나는 어렵사리 방향 잡고 올곳이 전진한다.
산해 진미와 풍미 가득한 인천 차이나타운. 정작 인천 사람들은 잘 안 간다는 한중로. 중식당 연경. 한 그릇 짜장면 앞에 앉고서야 나는 어지러운 정신머리 가라앉히고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신께서 말씀하신다.
"책 한 권 다 읽었다고 짜장면을 드시다니요."
여름부터 가을 지나도록 강신주의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를 읽고 꼼꼼히 필사하였다. 책 한 권을 두 달 가까이 붙들고 씨름했으니 마땅히 치러야 할 행사는 책떨이 파티다. 한없이 아리송한 화두들, 수많은 명 문장과 지혜, 통찰이 넘실거리는 책이었지만, 초보 작가의 패기를 한 껏 부려 한 문장으로 요약해 본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隨處作主 立處皆眞). "머무르는 곳에서 주인이 되면 그곳이
바로 진리의 자리라는 뜻으로, 어느 곳 어느 처지에 다다르더라도 주관을 잃지 말고 자신의 주인이 되라는 뜻" 결국, "매달린 절벽이라는 집착을 버리고, 스스로 당당히 주인의 삶을 살아라. 그것이 바로 부처이고 자유다."
아이쿠. 두 문장이네. 다시 해보자. 결국 "자신의 본래면목을 찾고 자유롭게 살거라."는 가르침이겠다.
저자의 의도와 맞든 안 맞든 나만의 해석인 한 문장으로 정리해 보니, 이런 내가 제법 대견스럽기도 하다. 이제 남은 건 실행뿐이겠지.
스스로 대견스러우니 반주 한 잔이 쭉쭉 들어간다. 짜장면도 단무지도 훌훌 마신다. 이슬 한 방울에 금세 취기가 올라오니, 인하대 3대 주당이었던 '천하의 호서평'* 도
이제 나이 먹어가나 보다. 그러니, 나이 들수록 좋은 점은 가성비로다. 조금 마셔도 많이 마신 듯한 이 충만감이여.
(* 학창 시절의 별명임 : 등소평 이후 최고의카리스마라는...)
연오정에 누웠다. 서울대 안 가기 잘했다. 저널리즘에 몸 달아 꿈꿨던 기자 안되기 잘했다. 맹목적이고 피상적인 목표 아래 그 이너써클 안에서 자기 생각 없이 살아왔다면, 삶의 주인이 아니였다면 내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예상해 본다. 국영방송의 사장이면 뭐 하냐. 스스로 당당하지 못함은 부자유이겠고,
월세방에 살아도 책 한 권에 행복하다면 그것이 자유가 아니던가. 오호라. 신박한 결론이로다. 껄껄껄 웃기에는 연오정이 최고다. (낮술이 이렇게 무섭답니다~)
낙엽이 하트가 충만한 가을은 사랑이었다. 사랑은 프레임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진심은 애써 잊어야 할 것도 잊혀질 것도 아닌 그리움이었다.